◈ 111. 대륙의 검 (3)
츳
츠츳
‘뭐야!’
‘사라졌……!’
대륙 최강을 다투는 두 검사, 이안과 율리우스 휼이 움직였다. 섬전과도 같은 속도였다.
악마 대부분이 둘을 놓쳤다. 그들을 상대하러 모인 마스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나 하늘을 가리고 있던 적과 청의 악마는 달랐다.
‘우리가 상대해야 한다.’
‘대비를 해야 해.’
포탈에서 등장한 순간부터 둘의 관심은 오로지 그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푸른 악마는 이안, 붉은 악마는 율리우스 휼. 각자의 상대를 정한 악마들이 손을 뻗었다.
즈으으응-!
빛나는 갑옷을 입은 성기사의 도약보다 반 박자 빠르게 주문이 완성되었다.
상대의 공격을 약화하는 동시에 공포와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보호막이 열세 겹 형성되었다. 흰자가 없는 눈에서도 역겨운 기운이 쏘아져 나갔다.
율리우스 휼은 멈추지 않았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성스러운 대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꽈아아아아앙!
기우뚱-
“……?”
검에 왼쪽 뺨을 얻어맞은 붉은 악마가 무릎을 꿇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납득할 수 없는 파워였다.
포탈이 떠올랐을 때부터 준비했던 보호막이 유리창처럼 연속으로 깨어졌다. 균형을 잃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괴력이 느껴졌다.
“아빌리우스의 성기사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죽어라!”
자신의 어깨 위에 당당히 서 있는 노인에게, 붉은 거인이 오른손을 휘둘렀다.
타앗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피한 백기사단장이 눈에 힘을 주었다. 후속 공격이 이어졌다.
동산이 통째로 날아오듯 위협적인 주먹질에 그가 오러를 쏘아 냈다. 꽈아앙! 상대의 팔이 튕겨 나가며 상체 균형이 무너졌다.
퍼펑!
물론 율리우스 휼 역시 강가에 던져진 조약돌처럼 나아갔으나, 발바닥으로 오러를 터뜨려 멈춰선 뒤 자세를 갖췄다.
“아빌리우스의 성기사는 강인하다.”
“후우웁!”
이번에는 악마도 뒤처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중심을 회복한 그가 연속으로 공격을 쏟아 냈다.
후웅
후우웅-
후웅!
무지막지한 속도에서 이어지는 공간이 터져버릴 듯한 강격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단순한 주먹질이 아니었다.
멍청해 보이는 거체에도 불구하고 정교하고 세련된, 기술적인 움직임이 율리우스 휼을 착실하게 압박해 나갔다.
허나 문제없었다. 성기사의 몸이 강렬히 빛났다.
검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백색으로 물든 율리우스 휼은 깔끔하고 절제된 동작으로 상대의 공격을 피해 냈고, 쳐 냈다. 간헐적으로 날아드는 피의 저주도 신성마법으로 파훼했다.
“아빌리우스의 성기사는 재빠르다.”
“아빌리우스의 성기사는 어둠이 우습다.”
“아빌리우스의 성기사는 물러서지 않는다.”
‘필멸자 녀석이!’
휘익, 붉은 악마가 뻗었던 주먹을 회수하며 상대를 움켜쥐려 했다. 박살 내고 싶었다.
공격을 막아 낼 때마다 잘난 듯이 떠드는 인간 녀석을 잡아채 부숴 버리고 싶었다.
허나 실패였다. 솜씨 좋게 손바닥에 착지한 노기사가 팔을 타고 얼굴 쪽으로 쇄도했다.
이를 악문 악마가 권속을 소환했다. 퍼퍼펑, 혈액과 살점이 터지며 피부에서 구울과 스켈레톤이 솟아났다.
율리우스 휼은 멈추지 않았다. 쏘아지던 관성에 원심력을 더하고, 한층 더 강한 힘을 끌어올리고, 오러 소드의 크기를 키우고!
“아빌리우스의 성기사를…….”
쒜에에에엑-!
“이 정도로 멈춰 세울 수는 없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퍼펑-!
잠시 후, 악마의 팔뚝과 수평을 그리며 날아가는 반월형의 오러!
그것이 붉은 악마 휘하의 권속 수백을 일격에 터뜨렸다. 바스러뜨렸다. 세상에서 지워 버렸다.
그 뒤를 바짝 쫓아 달리던 노기사가 또다시 오러 소드를 뽑아내 악마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쩌어엉!
콰콰콰콰콰콰-!
“이 쓰레기 같은 녀석이이이이이!”
“아빌리우스의 성기사는 쓰레기가 아니다. 쓰레기는 너…….”
“죽어라──────!”
바닥에 거대한 고랑을 남기며 날아갔던 붉은 거인이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해머처럼 내리쳤다. 참을 수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아빌리우스의 성기사’ 어쩌고 하며 쫑알대는 벌레 녀석이 너무나도 증오스러웠다.
쩌어어엉-!
……콰콰콰콰쾅!
허나, 닿지 않았다. 율리우스 휼의 것만큼이나 거대한 오러가 악마의 턱을 강타했고, 버텨 내지 못했다.
산처럼 거대한 악마가 하늘 높이 떠올랐다 추락하는 믿을 수 없는 광경!
잠시 이를 감상하던 율리우스 휼이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빌리우스의 성기사를 대표하여, 도움에 감사드리오.”
“그거, 자네가 요즘 미는 대사인가?”
“지금 쓰러진 녀석이 듣기 싫어하기에. 이번 전투까지는 고집해 볼까 하는데…….”
“그렇군.”
“그렇습니다.”
“…….”
“…….”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증오에 찬 눈으로 다시금 일어서려는 붉은 악마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이안을 쫓아오는 푸른 악마. 둘이 내뿜는 살의가 피부를 찔렀다. 시선을 교환한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끝나고 봅시다.”
팟
파팟-!
처음과 마찬가지로 크게 도약한 둘이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걷어차고, 밀어내고, 날려 버리며 본대와 두 악마의 사이를 멀리 벌리려고 노력했다. 일검, 일검마다 지형이 뒤바뀔 정도로 신화적인 싸움이었다.
그렇듯 대륙 2강이 거대한 악을 걷어내자, 마탑 주변의 어둠이 옅어졌다.
거기에 고위 사제들의 신성 마법이 더해지자 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웠던 거리가 조금씩 빛을 찾아갔다.
물론 여전히 안심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여전히 악마들은 많았고, 강력했다.
로브를 뒤집어쓴 해골의 공격을 받아 내며, 제트 프로스트가 숨을 골랐다.
“허억, 헉, 허억…….”
쉽지 않았다. 다른 소드마스터 하나와 협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위를 점할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눈앞의 악마는 강력했다.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콰가가각-!
“이 자식, 맨손으로 검을……!”
터어엉
“이걸 막았다고?”
콰직-!
“크윽, 불카누스에게 받은 검이…….”
“정신 차려! 이거 받아!”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용사의 제전에서 훌륭한 실력을 벌였던 이나시오 카라한과 데반 케네디, 그 밖의 여러 강자 역시 악마들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다.
마스터를 상회하는 단단한 육체와 급소 따위 존재하지 않는 특수함, 인간 검사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공격들.
어째서 선대 검사들이 악마라면 치를 떨었는지, 불과 10분도 되지 않았건만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세상이 좁다며 목소리를 높였던 마스터들은, 상식을 초월하는 저주받은 존재들 앞에서 오랜만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콰드드드득!
꽈앙! 콰앙! 꽈아앙!
“…….”
“……역시, 오크족 최고의 전사.”
순식간에 나타나 해골의 머리통을 가루로 만든 대전사 카라쿰의 무지막지한 괴력!
그에 못지않은 실력으로 온갖 곳을 돌아다니고 있는 전대 적기사단장, 퀸시 마이어스!
거기에 더해 가문의 절기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악마 중에서도 특별히 강한 녀석들을 찢어발기고 있는 5명의 검술가주들까지.
가까스로 숨을 돌린 제트 프로스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들의 승리다!
인간의 승…….
퍼엉
푸화아아아악-!
“…….”
잠시 기쁨에 젖어 있던 그가 표정을 굳혔다.
주디스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 검을 들고, 그보다 더욱 붉은 핏발 선 눈으로 악마 하나를 터뜨리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불길에 휩싸인 것 같았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어둠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쪽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불에 비견될 듯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바람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좀먹는 어둠조차도 겁에 질려 여기저기 흩어질 정도로 세찬 바람이, 사나운 폭풍이 되어 주변을 갈아 버리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있는 존재 역시, 평소 같지 않았다.
슬픔을 가득 품은 해일이 악마 하나를 집어삼키는 것을 보며, 제트 프로스트가 조용히 생각했다.
‘……그렇지. 끝이 아니지.’
신성왕국 측으로부터 들었다.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실종되었다고.
그 아이른 파레이라보다도 강하고 빛났던 흑기사단장을 생포해 갈 정도로 강대한 마가 출현했다고.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최속의 검사라 알려진 쿤의 목숨마저 앗아갔다.
불과 몇 달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대륙 최강 중 하나와 대륙 최고의 희망에 어두운 손길을 뻗친 셈이다.
‘지금 상황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뭐지?’
열세를 인정하고 물러난 것일까?
상황을 반전시킬 힘을 기르기 위한 걸까? 쿤의 시체를 거두고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생포해 간 것은 그 이유 때문인 걸까?
알 수 없었다. 미지의 공포가 그의 마음에 불안과 초조를 심는 한편, 자연스레 누군가의 이름을 떠오르게 했다.
제트 프로스트는 여전히 거친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폈다.
“…….”
보이지 않았다.
그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분노에 휩싸여 주변을 불태우던 주디스도.
마음에 폭풍을 품은 채 악마들을 도살하던 일리아 린제이도, 그녀들의 곁에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던 브랫 로이드도 알아챘다.
직전까지 함께였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지아 룬텔에게 전하려 했다.
신성왕국 최고의 기사인 율리우스 휼이 자리를 비운 이상 그녀가 이곳의 총책임자였다.
‘어디 있지?’
‘없는데?’
‘어떡하지? 퀸시 마이어스 경에게라도 전해야 하나?’
분노와 슬픔의 한 가운데 친우에 대한 염려가 떠올랐다. 연인을 향한 걱정과 불안이 짙게 피어났다.
그 혼란을 놓칠 악마가 아니었다. 인간의 약한 감정에 누구보다 예민한 그들은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에 숨을 죽였고, 입맛을 다셨다.
머리를 터뜨리자. 흘러내리는 뇌수를 음미하고 혈향에 흠뻑 취하자. 곳곳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이들이 힘을 모았다. 악의를 집중하여 날카롭게 벼렸다.
허나 그들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잠시 후.
지금까지의 전황을 완전히 바꿔 버릴 거대한 힘이, 고다라에 내려앉았다.
드드드드드드드득-!
“뭐야!”
“……!”
“이건……!”
전장에 넓게, 높게 솟구친 대지의 벽.
그것을 여러 차례 휘감은 환상 결계와, 온갖 이동 방해 주문.
그것은 오러도 아니었고, 신성력도 아니었다. 어둠의 기운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간간이 터져 나오던 정령사의 다섯 가지 기운과도 결이 다른 힘이었다.
마법(魔法).
극도로 폐쇄적인.
그렇기에 제대로 아는 이가 극히 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혀진 일부만으로도 룬텔 왕국을 대륙의 2번째 강국으로 우뚝 세운 신비롭고도 강력하기 그지없는 능력.
“너는 알고 있겠지, 이프레인 슬릭.”
“으, 으, 으…….”
“환경이 갖춰진 마법사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말이다.”
마법 결계를 뚫고 들려오는 슬릭 가 가주의 목소리에 마인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둠에 발을 담그고 인간을 초월한 그였지만, 여전히 무서운 존재가 둘 있었다. 그중 하나가 가주, 카이든 슬릭이었다.
그가 무채색의 유리알 같은 눈으로 자신을 훑어볼 때마다 이프레인은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는 어릴 때부터 형성된 공포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지울 수 없는 것이었다.
허나 그런 그조차도 비할 수 없는 존재가 있었으니…….
파직, 파지직
“…….”
“…….”
“…….”
마인이 위를 쳐다보았다.
악마들 역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드높이 솟아오른 대지보다도 까마득히 높은 곳에, 뇌전을 로브처럼 두른 채 떠 있는 여성이 보였다.
마법진.
마도구
고위 마법사들의 조력과 포션의 도움, 거기에 충분한 시간까지.
그야말로 갖출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충족시킨 룬텔 왕국의 최강자…… 아니, 모든 마법사의 왕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흑마법사.”
“…….”
“죽어라.”
냉엄한 판결과 함께, 벼락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