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대륙의 검 (1)
콰아앙!
“히, 히히히!”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금빛 섬광을 보며 이프레인 슬릭이 웃었다. 지팡이를 들었다. 흑요석처럼 맺힌 결정이 폭발하며 전방으로 투다다 쏟아졌다.
물러서지 않았다. 금발의 영웅 재빨리 원을 그려 오러 쉴드를 만든 뒤 하체에 힘을 주었다. 투다다다다, 콩 볶은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용사의 제전에서 만났던 이나시오 카라한의 절기와 비슷했으나, 더욱 위력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이른 파레이라는 그때와 달랐다. 끓어오르는 증오가 강제로 출력을 끌어올렸다.
원래라면 한 수 접고 가야 할 타이밍임에도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으로 뚫어 버리기 위해 더욱 강하게 대처했다.
퍼엉
펑, 펑, 펑, 퍼벙!
몸속 가득 휘몰아치는 불꽃이 터지고, 또 터졌다. 괴로웠지만, 효과는 발군이었다.
내부에서부터 이어지던 연쇄 폭발이 발바닥을 통해 발현되었고, 어마어마한 반탄력은 그대로 속도로 치환되었다.
“헛!”
이프레인 슬릭이 깜짝 놀라 지팡이를 휘둘렀다. 저주의 기운이 일렁였지만, 그런 임기응변에 당할 아이른이 아니었다.
코앞까지 접근한 그가 검을 휘둘렀다.
찌지지직-!
하체가 찢어지고 상체가 날아갔다. 이번에도 검날이 아닌 검면이었다.
악마나 마인 특유의 재성을 염려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더 큰 고통을 주고 싶었다.
물론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었다.
두 번의 공격으로 머리통만 남은 이프레인 슬릭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며, 아이른이 물었다.
“말해.”
“키히히.”
“말하라고. 이그넷은 어디 있지?”
“하, 하하, 하하하.”
“빨리 말하라고!”
“하하, 생각보다 훨씬 강해졌구나, 아이른.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이프레인 슬릭의 머리통이 광소를 터뜨렸다.
눈에서도, 입에서도, 잘린 목구멍에서도 끊임없이 검은 액체가 쏟아졌다. 그런데도 아무 문제 없이 말을 내뱉는 모습이 몹시 그로테스크했다.
물론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른은 빨리 대답하라는 듯 정수리를 쥔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머리채를 온통 쥐어뜯을 듯 가차 없는 손길이었다.
허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크고 넓게 울려 퍼졌고, 그에 따라 눈의 초점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자신을 농락한다고 생각한 그가 표정을 굳힌 채 마인의 뺨을 때렸다. 변함없었다. 녀석은 고장 난 알람시계처럼 끊임없이 웃었다.
“……!”
느낌이 이상했다.
그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고, 직후 뻐엉 소리와 함께 머리통이 폭발했다.
안 그래도 불안하던 최상층에 균열이 생겼고, 그것도 모자라 마탑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콰르르르르……
푸슈우- 푸슈-
우우우웅-
“…….”
흙먼지, 어둠, 마기.
아이른이 세차게 검을 휘둘렀다.
허나 상황은 그대로였다. 감각을 방해하는 어두운 기운이 여전히 눈앞을 부유했고, 점점 더 짙어졌다.
암흑 결계였다. 그 역겨움에도 불구하고 영웅은 눈을 감지 않았다. 코를 막지 않았다.
좋지 않다.
머릿속에서는 경고음이 세차게 울렸고, 피부 곳곳이 찌르르 울렸다. 가슴 역시 쿵쿵거렸는데, 이것은 나쁘지 않았다.
빠른 심장 박동으로 인한 혈액의 공급이 아이른의 몸을 가볍게 만들고 있었다.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다.
1초.
2초.
……5초가 지나가는 시점.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콰드득
덥석!
“……!”
지면을 뚫고 올라온 손이 아이른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기 직전에 피해 냈다. 콰각, 검을 박아 넣었으나 상대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피륙이 스치는 감각이 없었다.
‘땅속에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
생각이 채 이어지지 못했다.
쾅쾅쾅쾅,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다가온 근육 덩어리가 괴성과 함께 대형 망치를 휘둘렀다. 기세가 몹시 흉험했다.
감히 경시하지 못한 그가 왼발을 축으로 옆으로 피했다.
후우우웅
피했다.
후우우우웅-!
한 번 더 피했고, 더는 어울려 줄 생각이 없었다.
한 번 한 번의 속도와 위력은 좋았지만, 연결 동작이 매끄럽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빈틈투성이였고, 땅속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더 일찍 반격했을 터였다.
쒜에엑, 완벽한 타이밍을 노리고 아이른이 검을 휘둘렀다. 체크메이트였다. 채 균형을 잡지 못한 망치 악마의 눈이 휘둥그레 떠지는 것이 보였다.
그때, 아주 옅은 소리가 들렸다.
촤악-
콰앙!
“…….”
망치 녀석만 있는 게 아니었다.
흐물흐물, 기분 나쁜 점액질의 흔적을 남기며 문어를 닮은 악마가 나타났다. 저것이었다. 저 촉수를 닮은 무언가가 완벽한 기회를 무로 돌렸다.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까다롭네.’
콰드득
휘익-!
호시탐탐 틈을 노리는 바닥 밑의 존재는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지금까지 등 뒤의 상대를 의식한 적은 있었으나, 발 밑의 적과 싸워 본 경험은 없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심력이 소모되었다.
콰드드득! 쾅!
파팟
“아깝네.”
“그러게. 아까워.”
“다시 해 보자. 우리가 유리해.”
“맞아. 우리가 유리해.”
멍청해 보이는 망치 악마와 역겨운 문어 악마 콤비도 쉽지 않았다.
전자는 빈틈투성이였지만 힘이 강했고, 그러한 강점을 십분 살리는 전법을 사용했다. 부족한 부분은 후자가 채워 주었다.
동료를 보호해 줄 생각 없이, 오로지 공격에만 치중된 행동. 아마 망치 녀석의 목숨을 대가로 자신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럴 터였다.
허나 그러한 스타일이 오히려 아이른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푸슉
퓽
퓨퓻, 퓻-!
더 큰 문제는, 악마 셋과 자기 주변을 둘러싼 열여섯의 마인들이었다.
이프레인 슬릭의 제자였던 것으로 보이는 그들은, 여기에서 전투가 벌어질 것을 미리 예상했는지 마법진과 마법 도구 따위의 도움을 한껏 받은 상태였다.
시도 때도 없이 날아오는 투사체는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보였는데, 심지어 세 악마는 여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다.
퓩
휘익-
까앙-!
“하하, 놀랐나? 우리는 아무리 맞아도 타격이 없다고!”
“거뜬! 거뜬!”
문어 녀석의 등 뒤를 뚫고 나온 투사체가 아이른의 목을 노렸다.
그는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아 내야 했지만, 악마는 무사했다. 흑마법이 닿는 순간만큼은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몸이 흐릿해진 덕분이었다.
마법의 효과인지 마기의 영향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상황이 처음보다 훨씬 나빠졌다는 점이었다.
나쁘지 않은 합을 보여 주는 콤비.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위에서 틈을 노리는 존재.
마지막으로, 아군에 대한 걱정 없이 무지막지한 엄호 사격을 할 수 있는, 이곳에서만큼은 악마에 버금가는 강함을 선보이는 열여섯의 마인들.
“후우.”
숨을 골랐다.
온통 어둠이 가득 찬 가운데 아이른의 숨결만이 빛과 같았다. 맑고 부드러운 기운은 아니었다.
이곳에 오기까지 참아 왔고 눌러 왔던 열기가 거칠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순, 악마들의 몸이 움찔했다.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상처 입은 영웅의 분노와 집념.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 망치 악마의 몸에 힘이 들어갔고, 아이른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움직였다.
콰아아아앙!
강하게 발을 구른다. 지진처럼 둔중한 충격이 땅속 악마의 살의를 억누른다. 격의 차이를 보여 준다.
그와 동시에 무지막지한 빠르기로 망치 악마에게 접근한 아이른이 아래에서 위로, 사선으로 풀스윙을 하며 적을 압박한다.
후우우우웅
촤악-!
“크와악!”
망치 악마가 가까스로 이를 피했다. 정확히는 적지 않은 피해를 본 채 뒤로 물러났다. 허나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갈라진 대흉근에서 울컥울컥 마기가 쏟아져 나옴에도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거센 돌진과 급정거, 때문에 여전히 관성의 지배를 받는 몸뚱이.
여기에 더해 양쪽 겨드랑이가 다 보일 정도로 높이 검을 치켜든 자세!
확실한 빈틈이었다. 자신은 몰라도, 다른 녀석들이 공격을 쏟아 내기에 절호의 타이밍이었다. 악마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문어 녀석과 마인들에 의해 벌집이 될 영웅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콰직
크허어어-
“어?”
허나 전황은 그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아이른은 망치 악마만을 노리고 검을 휘두른 게 아니었다. 쒜에에엑, 손을 떠나 저 멀리 날아간 요술대검이 하늘 위의 마인 하나를 소멸시켰다.
열여섯이 필사적으로 방어 마법을 사용했으나, 무리였다. 오러만을 쏘아 냈다면 모를까, 대검 자체를 집어던져 무지막지한 물리력을 더한 이상 막아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미친 건가?’
상대의 공격은 분명 효과적이었지만, 그 결과 검을 잃었다. 죽어 버린 녀석이 아무리 마인들의 수장이었다고는 하나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었다.
물론 상관없었다. 히죽 웃은 문어 악마가 전력을 다해 영웅을 공격했다. 방어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무장 해제 상태의 적이 반격할 것을 겁내느니, 달아날 것을 신경 쓰는 게 나았다. 쫘악 펴진 촉수들이 아이른의 퇴로를 원천 차단했다.
실수였다.
검을 놓아 버려 운신이 자유로워진 그가 빠르게 자세를 갖췄다. 손을 뻗었고, 악마의 품으로 투웅 쏘아졌다.
슈슉-
“어?”
푸욱
그러자 저 멀리 날아갔던 검이 재소환되어 문어를 푹 찔렀다.
당황한 악마가 사방으로 펼쳐진 촉수를 회수해 아이른의 등을 노렸다. 위협적이지 않았다.
촤아악, 수직 위로 상대를 찢어 버린 그가 돌진의 관성을 이용해 앞으로 달려나갔고, 쓰러지는 문어 악마 사이로 뒤늦게 지면 밑의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에서도 수십 수백 개의 투사체가 쏟아졌다.
휘익
콰앙!
콰아앙!
콰아아앙!
다급하게 솟구친 땅속 악마의 공격을 피하며, 아이른이 발을 굴렀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강하게 짓눌렀다. 악마의 머리통이 깨졌다.
형체도 없이 사라진 녀석을 중심으로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해일처럼 일어난 땅거죽이 거대한 장벽을 만들었고, 마법사들의 공격을 받아 냈다. 시야 역시 차단했다.
당황한 그들이 감지 마법을 사용했다. 자연스레 공격의 빈도가 줄어들었다.
직후, 장벽을 뚫고 날아든 반월형 오러 다발이 15인의 마법사를 모조리 참살했다.
후둑
후두둑, 후둑
털푸덕! 털푸덕!
추락하여 검붉은 꽃잎이 되는 마인들.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른의 관심은 이미 하늘이 아닌 지면을 향해 있었다.
전보다 더욱 흉험한 기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잔혹성!
그것을 느낀 아이른이 높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바닥을 찧었다. 마치 땅바닥이 불구대천의 원수인 것처럼 계속해서 찧고 찧고 또 찧었다.
쩌엉!
쩌어어엉!
쩌어어어어어엉-!
잠시 후, 응답이 왔다.
마탑의 지하에 숨어 기회를 노리고 있던 거체가, 산악처럼 솟아올랐다.
크와아아아아아아아앍!
굉음!
가까스로 형체를 지키고 있던 마탑 주변의 건축물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가까이 있던 이들의 눈코입에서 피가 터졌고, 멀리 있는 이들 몇몇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두려움에 떨며 도망가던 고다라 주민들이 걸음을 멈추고 소지품을 훔쳤다. 불안 속에 웃으며 뛰어가는 그들을 또 다른 이들이 습격하고, 살해했다.
그러한 혼란이 괴물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괴물의 거체를 더욱 커다랗게 만들었다.
전설 속의 드래곤보다도 더욱 거대한, 체고 100미터짜리 악마!
녀석은 아이른에 의해 머리가 깨진 지면 땅속 악마의 잔해와 조금씩 신체를 회복하던 문어 악마, 그리고 망치 악마까지 호로록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에 따라 기운이 더욱 강해졌다. 이를 바라보던 아이른이, 거칠게 숨을 마시고 내뱉었다.
“하아, 하아.”
쉽지 않았다.
귀머거리에 장님이라 해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적은 강력했다. 그보다 훨씬 강한 광대 악마와 두 차례 싸워 봤다고는 하나, 사정이 달랐다.
첫 번째는 함께 싸웠고, 요술의 도움도 받았다. 두 번째는 힘 대 힘의 대결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가능성이 있었다.
휘익
악마를 향해 검을 겨눈 아이른 파레이라가, 붉은색의 오러 소드를 피워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