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악연의 고리 (3)
대륙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지역을 묻는다면, 대부분은 남부를 꼽는다. 평화 조약을 방패 삼아 각국이 끊이지 않고 내전을 벌이고, 살육이 피어난다.
무너진 치안 속에서 수많은 도적이 양산되어 전역으로 퍼지는데, 귀족들은 자기 보신에만 힘쓸 뿐이니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이에 비하면 대륙 동부는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편이다.
허나 남부의 악착같은 환경에서 칼밥을 먹어 온 이들조차 꺼리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암흑도시 고다라였다.
아무리 흉악한 짓을 벌인 범죄자라 할지라도 고다라로 들어가면 쫓지 않는다.
강렬한 복수심에 눈이 먼 이조차 원수를 따라 고다라로 들어가진 않는다.
대륙 동부를 지나오는 동안 아이른이 수없이 많이 들었던 이야기이며, 그밖에도 흉험한 소문이 많았다.
이중 반의반만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곳은 인세의 지옥일 터였다.
“…….”
허나 직접 확인한 고다라 내부의 풍경은, 다른 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평범하게 자신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행인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호객꾼들.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할 토박이 상인들, 그런 그들과 흥정에 여념이 없는 손님들.
오히려 꽤 깨끗한 거리를 보고 있자니 웬만한 곳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아이른 파레이라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왼쪽, 오른쪽, 뒤, 정면.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건장한 체격의 사내도, 삶에 찌든 듯한 아주머니도.
골목길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도, 그런 그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노인도.
마치 도시 전체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듯했다. 어디서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기묘한 감각이었다.
퍽
와르르르-
“허, 헉! 죄송, 죄송합니다! 아, 이런…….”
“이 바보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던 사내 중 하나가 아이른과 부딪혔다.
바구니 잔뜩 들어 있던 과일이 바닥을 구르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둘 다 송구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 그리고 빠르게 상황을 수습하고 떠나갔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를 것 없었다.
“이런 곳이구나.”
기대도, 실망감도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아이른이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더는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다. 이그넷의 행방은 아직 명확하지 않았으나, 그는 목적지가 정해진 것처럼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계속해서 움직였다.
잠시 후, 공터가 나왔다.
그 중앙에 멈춰 서서 물을 한 모금 마시는데, 일단의 무리가 다가왔다.
지금까지 동부를 이동하며 만나왔던 이들과는 수준이 다른 존재들.
그중 가장 앞에 있는 40대 초반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건 알고 있소. 걸음걸이로 보나, 시선 처리로 보나. 우리들의 미행을 순식간에 알아챈 것으로 보나. 범상한 인물은 아니겠군. 웬만하면 이런 이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지.”
“…….”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자네를 맛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시거든. 내가 봐도…… 확실히 그분의 취향이야. 그쪽에게 안타까운 일이야.”
“…….”
“그래, 말이 길어 미안했네. 참고로 지금 자네는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을 걸세. 가루를 좀 썼거든. 겁이 많아서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기 바라네.”
설명을 마친 사내가 검을 빼 들었다. 명검이었다. 넘버링 소드만큼은 아니나, 그 어떤 검사라도 탐을 낼 만큼 훌륭한 자태였다.
허나 더 대단한 것은 그의 기도였다. 평범한 뒷골목 양아치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농도 짙은 살기가 훅 밀려 왔다. 피부가 저릿저릿한 느낌이었다.
스윽
스르릉-
다른 이들 역시 범상치 않았다.
둔중한 해머를 치켜든 거한도, 날카로운 단도를 역수로 쥐고 있는 마른 남자도. 그 밖의 모든 이들이 저마다의 기세를 뿜으며 아이른을 압박했다.
조금씩, 그들과의 간격이 줄어들었다. 좁혀져 왔다.
아이른은 검을 뽑지 않았다.
대신, 무리의 뒤에서 불쑥 솟아난 괴인이 보스를 공격했다.
퍼억
후두둑
“…….”
“…….”
“…….”
“아이른 파레이라 님 맞으십니까?”
아이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허나 이것이 긍정의 의미라는 것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무리가 겁에 질렸다.
손에 쥔 무기를 갈무리하지도 못한 채, 모두는 석상처럼 굳어 숨조차 쉬지 못했다.
목표물의 이름도.
보스의 머리통을 일격에 터뜨린 이도.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뵙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
“아마 파레이라 님께서 원하는 정보도, 가지고 계실 겁니다.”
그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흐릿한 인상의 사내가 움직였다. 은밀했고, 신속했다. 어둠에 녹아드는 듯한 그의 걸음걸이를 아이른이 쫓았다. 괴인도, 영웅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잠시 후, 괴물들이 떠난 공터에서 억눌려 있던 숨소리가 하나둘씩 터져 나왔다.
“후우!”
“후우, 후우, 하아…….”
“하…… 미친, 아이른 파레이라라고? 진짜 그 파레이라야?”
“미친……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어처구니가 없구만.”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행이었다. 미친 요리사 녀석이 주는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목숨보다 중요하진 않다.
잘못된 선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숨이 붙어 있는 상황이니, 천운이 따랐다고 보는 게 맞았다.
“한동안은 조용히 있자. 굳이 다 안 죽인 거 보면, 우린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거 같다.”
“예.”
“예.”
“그런데, 이건 어떻게 할까요?”
“음.”
2인자가 고개를 돌려 바닥을 확인했다. 머리만 곱게 사라진 시체가 눈에 들어왔고, 잊고 있던 정보가 떠올랐다.
보스 역시 요리사의 취향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입을 열었다.
“팔 건 팔아야지. 가자.”
* * *
“괜찮으십니까? 냄새?”
“…….”
“일반인들은 몰라도, 감각이 예민한 마스터라면 악취가 느껴질 텐데…….”
“…….”
“…….”
말을 걸던 안내인이 입을 다물었다.
행인과 부딪혔을 때 아이른의 몸에 퍼진 가루는 무취라고 알려졌지만, 엘프나 마스터의 후각까지 속일 수는 없다. 이대로라면 어르신께서 싫어하실 게 분명했다.
허나 가장 불쾌할 것이 분명한 손님이 아무 반응도 없으니,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조용히 안내에 집중했다.
평범한 여관으로 들어가 음어를 말하고, 비밀 통로 내의 함정과 결계를 하나씩 해제하고.
그 밖에도 몇 가지 절차를 더 처리하자, 낡은 나무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를 확인한 안내인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시길.”
“…….”
아이른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처음 고다라에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 지하실의 방으로 들어섰다.
끼이익
탁
“본론부터 말하지요. 영웅께서는 지금부터 24시간 동안, 밖으로 나가실 수 없습니다.”
“…….”
“보시는 바와 같이, 즐길거리는 전부 준비되어 있습니다. 맛 좋은 음식, 훌륭한 술, 아름다운 여인,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골동품과 세계의 명화…… 그밖에도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만 하시지요. 30분 내로 구해 오겠습니다.”
“…….”
“그러니, 저와 함께 만 하루만 즐기다 나가시면 됩니다. 그 이후에는 무엇을 하셔도 제지하지 않겠습니다.”
기름칠이 되지 않아 듣기 싫은 소리가 날 정도로 볼품없던 문과 다르게, 내부는 무척 넓었다.
단순히 넓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마법 도구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조명은 자연광보다 아름다웠고, 공기의 질 역시 지하실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좋았다.
그 안을 채우는 것은, 그야말로 강대국의 왕궁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다. 노인의 표현은 과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름기를 싹 걷어 낸 담담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식도락과 여색을 즐기는 자쿠앙과 같은 이였다면 24시간이 아니라 평생을 살아도 불만이 없을 만한 장소였다.
하지만 아이른은 동요하지 않았다.
내내 침묵하던 그가 짧게 말했다.
“냄새가 힘들어.”
“예? 그게 무슨. 이곳에는 거베라 왕국에서 수입한 고급 방향제가 곳곳에 놓여 있습니…….”
“어디에 있지?”
“예?”
“어디에 있냐고.”
“…….”
이번에는 노인이 침묵했다.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허나 순순히 대답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을 발설하지 않고 24시간 동안 영웅을 묶어 놓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어려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며칠 전에 마법 도구로 확인했던 그의 영웅적인 모습.
자신이 걸어온 길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을 청년을 응시하며,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팟
팟, 팟, 파앗-
그러자 널따란 벽면 한쪽에 마법 화면이 떠올랐다.
백 개가 넘는 화면에는 고다라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이 담겨 있었는데, 앵글에서 왠지 모를 집요함과 살기가 느껴졌다.
“영웅께서 24시간 내에 이곳을 떠나시면, 무고한 시민이 죽습니다.”
“저를 해하려고 해도 마찬가지고.”
“강제로 정보를 알아내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가 죽습니다. 당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이번 일에 전혀 관련도 없는 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습니다. 끔찍한 고문과 희롱을 당한 채 길바닥에 버려질 겁니다.”
“그것을 원하신다면, 마음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는 청년을 마주하며, 노인이 히죽 웃었다.
그렇다. 그는 선인(善人)이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재미를 위해.
자신의 이득을 위해, 행복을 위해, 즐거움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암흑도시 고다라의 누구보다 강한 존재였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다루기 쉽지.’
노인이 미소 지었다.
오래 버틸 필요도 없다. 하루, 고작 24시간이면 모든 것이 끝난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빨리 끝날지도 모른다. 지금의 작업은 그저 보험일 뿐이다.
그렇듯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는데, 갑자기 그의 눈이 커졌다.
츠츳, 마스터의 감각으로도 느끼기 힘든 움직임과 함께.
콰아앙!
“……쿨럭!”
굉음, 그리고 피가 섞인 기침 소리가 들려 왔다.
두 눈을 둥그렇게 뜬 노인이 대경해 소리쳤다.
“무, 무슨!”
“말해라.”
“내, 내 말을 듣지 못했습니까? 죽습니다. 당신, 여기서 더 움직이면…….”
콰아아앙!
“…….”
추욱, 또 한 명의 수하가 목숨을 잃었다. 안내인이었다. 대검에 꿰인 그의 표정은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상과 다르다. 제 생각대로라면, 영웅은 아무것도 하지 못해야 했다. 방 밖으로 나가지도, 곳곳에 대기하고 있는 아랫것들에 손을 쓰지도 못했어야 했다.
그가 재차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마법 화면 속의 인물 중 다섯이 목숨을 잃었다.
노인에게는 허무할 정도로 가벼운 죽음이었지만, 영웅에게는 아닐 터였다. 그래야만 했다.
“…….”
하지만, 황금의 대검을 들고 있는 청년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가 말했다.
“참기 힘들어.”
“뭐, 뭣?”
“냄새 말이야.”
아이른이 눈을 감았다. 그러자 코를 찌르는 악취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과일 장수와 부딪혔을 때 묻었던 가루가 아니었다.
인간의 악의.
길고도 깊은 악연의 굴레에서 짧게는 10년, 길게는 100년 가까이 살아온 고다라 시민들의 몸에서 풍기는, 악마와도 비견될 만한 괴로운 냄새.
그것이 말해 주었다.
똑같았다.
노인도.
노인의 하수인도.
죽이려는 사람도, 죽을 사람도.
소매치기 소년을 때려죽였던 이들보다 추악했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눈에, 그들은 지켜야 할 존재가 아니었다.
콰아앙!
콰앙!
콰아아앙!
“으, 이……!”
굉음이 계속되었다. 아이른의 신형이 흐릿해질 때마다 지하에 숨어 있던 수하들이 하나씩 목숨을 잃었다.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였다.
노인 역시 처지가 같았다. 소드마스터이자 고다라를 뒤에서 좌지우지하는 흑막인 그였으나, 불타오르는 영웅의 분노를 막기에는 부족했다.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지원이 필요했다.
도움이 필요했다.
눈을 질끈 감은 그는 자신의 위에 존재하는 위대한 마법사를 떠올렸고, 그것이 결정적이었다.
서걱-
“거기 있구나.”
노인의 마음에서 비롯된 신호.
그것이 뻗어 나가 도달한 장소.
이를 확인한 아이른 파레이라가 강하게 발을 굴렀다.
콰콰콰콰콰콰쾅!
지면을 뚫고 나온 거대한 불길이, 유성처럼 어둠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