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악연의 고리 (1)
“조금만 기다리렴, 아빠가 간다. 빨리 갈게, 빨리…….”
중년인이 걸음을 재촉했다.
갑작스러운 열병에 괴로워하는 딸을 위해 신전을 찾았고, 사제님의 자비 덕에 부족한 형편으로도 성수를 구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내의 얼굴에 조급함이 가득했다.
그런 그의 눈에 몰려 있는 인파가 보였다.
폐광산의 갱도를 확장하여 만든 이동통로.
그리고 그 입구를 막고 있는 거대한 바윗덩이.
깜짝 놀란 중년인이 헐레벌떡 달려가 물었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몰라. 며칠 전 태풍 때문인지, 아니면 대형 몬스터라도 나타나 깽판을 친 건지…….”
“몬스터라고요? 이곳에 몬스터가 있을 리가…….”
“요즘같이 세상이 흉흉한 시대에, 뭔 일인들 없겠나? 마물이고 마인이고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마당인데 말이야.”
“그건 그렇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한동안은 이곳을 이용할 수 없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죄다 헛걸음을 했다는 게 문제야. 에휴, 돌아서 가려면 얼마나 더 시간이 지체되는 건지…….”
“…….”
노인의 대답에, 중년인이 고개를 돌려 입구를 바라봤다.
보기만 해도 숨이 콱 막힌다. 장정 서른 명이 모여도 절대로 치울 수 없을 듯한 크기에 그의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시름시름 앓고 있을 딸의 얼굴이 떠올랐다.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여유로운 이들은 인상 한 번 쓰고서 발걸음을 돌릴 따름이었지만, 사정이 급한 이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뿐이었다.
“또 한 명 오는군…… 쯧, 저 청년도 표정이 어두운 걸 보니, 일이 급한 모양이야.”
노인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푹 뒤집어쓴 로브의 밑으로 드러난 표정이 정말로 안 좋았다.
보는 이의 마음이 무거워질 정도. 중년인 역시 청년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비슷한 처지인 사람을 보니 입 안이 더욱 텁텁해졌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서걱-
……쩌어어억!
“……!”
“……!”
“이, 어……!”
언제 꺼냈는지도 모를 커다란 검이 휘둘러졌다. 아니, 그조차도 몰랐다.
검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소리조차 제대로 나지 않았다.
허나 반으로 갈라진 바윗덩이가 대신 말해 주었다. 청년이 무언가 했다는 것을 말이다.
매끄럽게 쪼개져 틈이 벌어진 방해물을 보며,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가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크게 벌렸다.
터업!
지지지지직-!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쪼개진 바위에 양손을 집어넣은 청년이 팔을 벌렸다.
그러자 지지지직, 지면이 밀리는 소리와 함께 틈이 벌어졌다. 마차 한 대는 여유롭게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이 넓어졌다.
“그럼, 먼저 지나가겠습니다.”
“…….”
“…….”
“…….”
담담한 말 한마디를 건넨 뒤 빠르게 통로 안으로 사라지는 로브 청년.
성수를 품고 있던 중년인을 시작으로 하나둘씩 사람들이 움직였다. 초조하기 그지없던 이들의 표정에 화색이 돋았다.
“……마물이 많아진 만큼, 숨어 있던 영웅들도 늘어난 모양이구만.”
여전히 멍하니 서 있던 노인이 중얼거렸다.
확실히, 세상은 지금까지와 다르게 격변하고 있었다.
* * *
이그넷 크레센시아로부터 요술의 힘을 느꼈을 때, 아이른 파레이라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신성왕국에 합류해야겠다는 생각도, 동생인 키릴 파레이라의 그리핀을 빌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곧바로 영지를 떠났다.
그리고 정신없이 요술대검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물론 언제까지고 패닉에 빠져 있던 건 아니었다.
여전히 조급하고 초조했지만, 처음 불길한 소식을 들었을 때만큼은 아니다. 어느 정도 이성을 찾을 정도는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왕국이 아닌 대륙 동부로 향하고 있는 것은, 요술대검이 보내는 신호가 계속해서 끊겼기 때문이다.
‘광대를 비롯한 악마 녀석들이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어. 그게 아니라면, 추적을 뿌리치기 위해 수를 쓰는 걸 수도 있고.’
거리가 멀어지면 다시 뒤쫓지 못할 지도 모른다.
잠시 한눈을 팔아도 안 된다. 계속해서 움직이면서 검이 신호를 보낼 때마다 방향을 재조정해야 한다.
그것이 아이른이 여전히 혼자서 움직이는 이유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처음과 달리 조금씩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할 수 있다, 없다는 중요한 게 아니다. 무조건 해야만 하는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강대한 악마들을 상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한다.
아니, 더 나아가서 지금 이상의 실력을 쌓아야 한다. 길지 않은 시간 내에 깨달음을 얻어 더욱 높은 경지에 올라서야 한다.
헌데 지금 자신의 상태는 어떤가.
초조하다.
불안하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타오르는 분노를, 솟아오르는 적개심을 주체할 수 없어 다섯 기운의 순환이 끊어진 상태였다.
‘이것부터 해결해야 해. 완성된 오행신공의 기운 없이는…… 광대 악마조차도 상대할 수 없어.’
아이른이 틈나는 대로 선행을 펼치는 이유는 바로 그때문이었다.
끝을 모르고 치솟은 화염을 다스리기 위해 물의 기운을 운용한다.
그러는 한편, 자신이 쌓아온 오행신공의 의미를 다시금 되짚는다.
상생(相生)이었다.
순환(循環)이었다.
하나의 선의가 다른 선의를 불러오고, 그 선의가 또 다른 선의를 불러온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대륙 전체를 행복과 희망이 넘치는 밝은 세상으로 만든다. 이것은 악마의 성향인 ‘파괴 욕구’와 대비되는, ‘수호 의지’와도 연관이 있었다.
‘기본을 잊지 말자. 지금껏 쌓아 왔던 뜻과 신념, 포부를 내팽개치지 말자.’
자신이 검을 든 이유.
자신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자꾸만 자신을 괴롭히는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이른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침잠하였다.
지금의 명상은 요술대검이 재차 신호를 보내기 전까지 계속해서 이어질 예정이었다.
터업
그리고 지금, 그 계획이 깨졌다.
아이른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위를 올려다봤다.
자기 손에 붙잡힌 꼬마의 얼굴이 보였다. 빈민가의 아이일 터였다.
자신이 명상에 빠진 곳이 어두운 골목길의 구석이었으니. 갑작스레 끓어오르는 번민을 가라앉히려다 보니 영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자리잡게 되었다.
생각을 마친 그가 입을 열었다.
“이건 안 돼.”
“으윽, 이익……!”
“소중한 물건이야. 아니, 그 전에 도둑질은 옳지 못한 일이란다.”
아이른이 억지로 소년의 손가락을 풀어냈다. 그리고 도난당할 뻔했던 오행 목걸이를 품속 깊이 집어넣었다.
여전히 제 능력의 십 분의 일도 알아내지 못한 기물 중의 기물. 웬만한 물건이라면 그냥 가져가게 두었을 테지만, 이것은 베풀 수 없었다.
물론 아이를 잡은 이유는 목걸이 때문만이 아니었다.
손을 빼내고 도망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꼬마를 바라보며, 그가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해서 소매치기를 하게 됐니?”
“…….”
“조금 바보 같은 질문일 수도 있지만, 이런 일 말고는 방법이 없는 걸까?”
“……진짜 병신 같은 말이네. 그럼 여기 같은 개 똥통 동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데?”
“으음.”
“잘 생각 안 나지? 됐어, 시발. 죽일 생각 없으면…… 그냥 곱게 풀어…… 이익, 줘!”
여전히 도망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꼬마.
그의 말을 들은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어릴 적에 불우한 일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자신은 굉장히 유복한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귀족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니, 농촌에서 잡일을 하니, 물건 배달 같은 잔심부름을 하니. 이런 것들은 너무 순진한 생각일 수 있었다. 그럴 수 없는 이유가 분명 있을 터였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 아이의 잘못은 크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것이 이런 일뿐이라면. 주변에 옳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들만 가득하다면…….’
아이른이 자신의 삶을 떠올렸다.
정말로 운이 좋았다. 그렇게 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자애로운 어머니와 든든한 아버지, 사랑스러운 키릴.
연인인 일리아와 소중한 친구인 주디스, 브랫, 쿠바르, 루루.
그리고 자신의 스승 역할을 해주었던 수많은 인연들.
주변이 온통 선의와 호의로 가득했다. 지금의 자신이 있는 건 스스로 노력한 부분도 있으나, 타인의 도움을 붙잡고 올라온 덕이기도 했다.
반면 이 아이의 경우는 어떠한가.
태어날 때부터 좋지 않은 환경에 노출되었을 터였다. 악의가 적의를 낳고, 그것이 또다른 부정적인 기운을 낳는 것을 보며 빠르게 물들어 갔을 것이다.
이런 일이 잘못이라는 자각조차 못 한 채. 자신을 되돌아볼 여유조차 갖지 못한 채.
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어째서 이그넷의 요술에 이토록 분노했는지.
자신이 어째서 악마들을 향해 이처럼 뜨거운 적개심을 쏟아 내고 있는지.
‘악연의 고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존재들.’
상생의 묘를, 선순환의 묘를 깨달은 아이른에게 있어서, 그들은 절대로 한 하늘 아래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아! 제발! 쫌! 그만, 제발 그만…….”
“…….”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진짜, 진짜로…… 그러니까, 한 번만, 한 번만 용서를…….”
퍼뜩 정신을 차린 아이른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되뇌는 꼬마의 얼굴이 보였다. 눈이 보였다.
거짓이었다. 잘못이라고 여기지도 않았으며, 소매치기를 관둘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미워할 수 없었다. 분노할 수 없었다.
진짜로 증오할 이는, 검을 겨눠야 할 존재는 따로 있었기에.
후우, 코로 깊은 한숨을 내쉰 그가 로브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으악! 으…… 어?”
찰랑
비명을 지르며 눈을 찔끔 감았던 아이가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품에서 몽둥이나 단검이 나올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 대신 작은 주머니가 눈앞에 나타났다.
너무나도 달콤한 소리.
돈끼리 찰랑찰랑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꼬마가 꿀꺽 침을 삼켰다.
“오늘밤은 배부르게 먹으렴.”
“…….”
“다만, 이것 하나만 약속해 줄 수 있겠니?”
“……뭐, 요?”
아이가 경계심 강한 눈빛을 보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 기억이 있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던 좌우명이다.
돈주머니를 손에 쥔 꼬마가 꿀꺽 침을 삼켰다. 위험한 일이라면, 차라리 거절하는 것이 나았다. 죄송하다고, 제힘으로는 역부족이라고 싹싹 비는 편이 나았다.
그런 게 아니었다.
로브를 뒤집어쓴 청년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처음보다 훨씬 따스했다.
“네가 아는 배곯는 아이가 있다면, 베푸려무나.”
“…….”
“그래 줄 수 있겠니?”
아이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받아 본 선의.
어둡고 메마른 마음에 깃든 한 줄기 빛을 경계하고, 의심하고, 당황하고…….
“……그럴게요.”
하지만 아직 때가 덜 묻었기에, 결국에는 순수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에 웃어 보인 아이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꼬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무언가 더 말을 해 주지도 못했다. 신호가 왔기 때문이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검을 꺼내 방향을 살피고 이동하자.’
머리로는 악마를 쫓으려는 생각에 여념이 없었지만, 마음만은 평소보다 훨씬 포근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신호에 집중하며, 허나 기분 좋은 미소를 숨기지 않으며.
아이른 파레이라가 걸음을 재촉하는 와중이었다.
퍼억
우뚝
“…….”
걸음을 멈췄다.
꽤 떨어진 곳에서 들려온 타격음, 그리고 억눌린 비명 소리.
평범한 사람이라면 결코 듣지 못했을 작은 소리다. 하지만 소드마스터의 감각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숨이 불안하게 떨렸다.
저벅저벅
걸었다.
빠르게 걷지 못했다.
좋지 않은 예감이 현실이 되는 것이 무서워서.
열이 오르기 시작한 분노가 어디까지 치솟을지 두려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었다. 걸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힘겹게 도달한 곳에는.
“…….”
아이의 시체를 둘러싼 장한들 여럿이, 악의에 가득 찬 눈으로 아이른을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