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악마와의 내기 (2)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과거 위기에 빠졌을 때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광대 악마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세 치 혀로 모면하려는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모습이 그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해할 수 있었다.
관심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죽고 죽이면 끝맺음이 나는 인간의 갈등과는 달리, 악마는 더한 것을 원한다.
좌절감, 공허감, 두려움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들. 특히 고민과 번뇌에서 나오는 진한 것들.
이것이야말로 마계의 주민들을 살아가게 만드는 동력이다.
천 년 전의 자신도 그러했다. 평범한 시골 영지 따위 단신으로 멸망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영주에게 제안을 건넸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것이 무분별한 살육보다 더욱 가치 있기 때문이다.
‘무슨 내용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저 성기사 녀석이 제안하는 내기에서마저 이겨 버린다면 꽤 얻는 것이 클 거야.’
하지만, 광대 악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심마에게 말했다.
“심마여,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악마와의 거래.
악마와의 계약.
악마와의 내기.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멸이라고, 인간은 절대로 악마를 이길 수 없다고 세상에 알려졌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저 사실에 한없이 가까울 뿐이다.
주체적으로 자기 인생을 살아갈 자신이 없어 악마의 등에 업혀 가고자 하는 족속들이 제대로 된 녀석들일 리 없지 않은가.
그런 이들을 상대로 이득을 보는 건 앉아서 식은 수프를 먹는 것보다도 쉬운 일이다.
허나 지금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광대가 이그넷을 주시했다.
오러가 바닥나고, 근육과 관절 곳곳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지쳐 있는 모습이지만, 정신만은 또렷하게 빛나고 있다.
눈빛이 이를 증명했다. 왕의 위엄을 두른 채 똑바로 심마를 응시하는 그녀의 태도는, 악마가 지금껏 상대해 왔던 쓰레기 인간들과는 그 격이 달랐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함께 보시지 않았습니까. 이 인간은 대륙의 희망이자, 미래입니다. 죽이면 끝입니다. 사지를 찢고 머리를 뽑아 신성왕국 아빌리우스의 수도에 던져 주기만 해도, 세상은 혼란으로 가득 찰 것입…….”
“병신 같은 새끼.”
“뭣?”
광대가 홱 하고 고개를 돌려 말을 끊은 이를 바라봤다.
이죽거리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그넷이 보였다. 인상을 찌푸린 그가 입을 열었다.
“히히. 악마를 상대로 입을 놀리는 배포는 칭찬해 주마. 하지만 너무 만만하게 본 거 아니야? 악마라고.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고, 사람의 마음을 마음껏 가지고 노는 악마. 그런 존재와 내기해서 이길 자신이 있을 리가. 너는 그냥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 발악하…….”
“참으로 웃기는 놈이구나 내가 그쪽과 내기하자고 했던가?”
“…….”
“겁이 나면 너 혼자 빠질 것이지, 어찌하여 그대보다 위의 존재에게까지 추잡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냐?”
“겁이라니, 누가? 내가? 하!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 되지.”
씨익 웃은 이그넷이, 광대를 똑똑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이른 파레이라에게 들었노라. 지난 천 년 간 한 번도 인간을 상대로 이겨 보지 못했으니, 겁이 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충분히 이해하노라.”
“…….”
광대는 할 말이 없어졌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천 년 전, 평생을 가지고 놀던 인간 검사, 카렌 윈커의 손에 가면의 반이 날아가는 피해를 당하고 도주했다. 치욕의 세월이었고, 인고의 세월이었다.
허나 그 후에도 즐거운 일은 없었다.
이그넷과 아이른, 일리아를 비롯한 토벌대에 또다시 패배하고.
저주를 동원했음에도 그 어떤 피해도 입히지 못한 채 성기사단에 쫓겨 도망갔다.
이후 아이른 파레이라의 앞에 나타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기를 제안했고, 졌다.
자신의 치부를 들킨 광대는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심마여, 이런 쓰레기를 왜 데리고 다니는지 모르겠지만, 이야기는 귀담아듣지 않는 게 좋아 보이는구나. 이 광대 녀석은 싸울 때는 무능하고, 도망칠 때만 자신의 재주를 온전히 발휘하는 믿을 수 없는 녀석이다. 언젠가 그대의 안위에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보다 빨리 그대를 버릴 존재이니 중용하지 말도록.”
“알고 있다.”
“어어?”
“하지만 상관없다. 나에게 위기란 없을 것이니, 광대는 영원히 내 밑에서 수발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 대신 가장 가까이서 대륙의 멸망을 지켜보겠지.”
“…….”
“왜, 마음에 들지 않나?”
“……마음에 듭니다.”
지금껏 잠자코 있던 심마가 입을 열었고, 광대는 당황했다. 저렇듯 순순히 인정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그저 비굴한 모습으로 고개를 조아릴 뿐.
이를 확인한 심마의 시선이 다시금 이그넷 쪽으로 돌아갔다.
그가 물었다.
“그래서, 내기의 내용은 무엇이냐?”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했다.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있긴 하지만, 심마는 상대의 내기에 무조건 응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충분히 구미가 당길 만한 내기여야 하고.
만족스러운 이득을 얻을 만한 내기여야 한다.
둘 중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거기서 끝이다. 대륙의 미래는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인간계는 더욱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심마의 귀에, 이그넷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가 나의 정신을, 마음을 타락시킬 수 있는가.”
“…….”
“즉, 나의 존재를 걸고 벌이는 내기다.”
으음, 광대 악마가 신음을 흘렸다.
악마라면 그 누가 됐든 좋아할 수밖에 없는 내기였다. 인간을 타락시키는 것은 그들이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유흥거리였으니까.
‘더군다나 사람의 마음에서 태어난 심마라면 훨씬 더하겠지.’
하지만 불리하기 짝이 없는 내기다. 광대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모른다.
아니, 맑고 단단한 정신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빈틈을 잘 노리기만 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당장 몇 년 전의 일만 해도 그랬다.
자신감과 자존감이 가득 들어찬 룬텔의 대마법사, 이프레인 슬릭마저 마인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지금 이렇게 벌벌 떨고 있는 칼 린제이 역시, 처음에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겠지.’
어쩌면, 심마는 악마들 중 가장 인간의 타락에 자신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그넷 크레센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기사의 정신력.
영웅의 심장.
왕의 위엄.
그야말로 악마가 공략하기 힘든 요소는 모두 가지고 있다.
죽음에 직면한 순간조차 그녀의 마음은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으니, 이 내기는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 좋다. 뭔가를 얻을 수 있는 장사가 아니었다.
물론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아까처럼 나섰다가 망신을 당할 생각도 없었을뿐더러.
심마 역시 내기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그때, 이그넷 크레센시아에게서 변화가 일어났다.
화아아아악-!
오러를 발현한 것도, 육체적인 무언가를 한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지금의 그녀는 전과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허나 광대는, 심마는 알 수 있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세워 놓을 수밖에 없는 마음의 벽.
미지의 것과 마주할 때.
불쾌한 무언가와 마주할 때.
그 밖에 정신을 흔들려는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 내는, 생명체라면 본능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경계심.
이그넷은 그것을 허물었다.
“…….”
“…….”
도발이었다.
비아냥이었다.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망설이는 악마들에 대한 비웃음이었고, 조롱이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심마(心魔)라니,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데 매우 자신이 있는 이름이로구나.”
“…….”
“나 역시 나의 마음을 온전히 다스리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인데, 어떠한가.”
서로가 가장 자신 있는 부분에서, 한번 겨뤄 보는 것이.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
씨익, 쿤의 얼굴로 비틀린 입매를 보인 악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하겠다.”
* * *
‘무조건 이득 보는 장사야.’
앞서가는 심마와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바라보며, 광대 악마가 생각했다.
분명히 남는 장사였다. 단단히 방비된 성기사의 정신과 마음을 뚫고 들어가는 거라면 몰라도, 모든 경계가 허물어진 상태라면 무조건 이길 수밖에 없다.
대상에 따라 시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타락은 확정이다. 무조건 어둠으로 물들일 수 있다.
‘쿤을 소화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시체에 불과했다. 지금과는 이야기가 달라. 과거의 영웅들과 비견될 만큼 숭고한 성기사의 마음과 정신, 육체를 온전히 소화해 낸다면…….’
그 순간, 대륙의 명운은 정해진다. 악마의 승리로.
“미친 자식.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히히, 히히히.”
광대가 경박한 웃음과 함께 이그넷을 모욕했다.
허나 반응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자신을 향한 조롱과 비웃음이 쏟아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확실하게 자신의 마음을 잡아채려는 심마의 정신 공격을 관조했다.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지금 향하는 곳은 아마도 놈의 소굴일 터였고, 그곳에 도착하면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번뇌가 몰아칠 터.
벌써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광대가 한 말을 떠올렸다.
‘오만하다고? 내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이그넷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았으니까. 혼자서 마왕과 겨루려는 생각이 아니었으니까.
지금의 내기는, 일대일의 승부가 아니라…….
‘……내가 믿는 사람들 전부와 심마 간의 싸움이다.’
그 순간, 한참이나 멀어진 격전지에서 여섯 줄기의 빛이 쏘아져 나갔다.
희미하게 남아 있던 요술의 기운을 품고, 소식을 전하기 위한 파발마처럼 어둠을 피해 은밀히, 빠르게 움직였다.
끝까지 자신의 곁에 있어 준 아냐 마르타와 게오르그 포이베.
자신에게 커다란 깨달음을 안겨준 브랫 로이드, 주디스, 일리아 린제이.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
‘지금 대륙의 전력으로, 이 녀석을 처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것이 율리우스 휼과 이안을 비롯한 최강자들에게 요술의 힘을 쏟지 않은 이유였다. 그들로는 부족하다. 그들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
……4인방이라면 가능할 터였다.
미래의 4인방을 믿고 최대한 오래 버텨 낸다면, 어떻게든 심마의 어둠을 버텨 내서 시간을 벌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희망이 있다.
심마 녀석 역시 자신을 쟁취하는 데 정신이 팔리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터였고.
자신은 악마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그 누구보다 매력적인 존재였…….
욱신
“크윽.”
“후, 흐흐, 흐흐흐. 어때? 벌써 후회되지 않아? 어렵지, 어려워. 악마와의 내기는 몹시 어렵단 말이야. 잘 생각하고 말해야 해. 말하기 전에 생각했나요?”
“후우, 후우.”
이그넷 크레센시아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
그리고 얼마 후, 그녀의 마음은 여섯 갈래로 나뉘어 하늘을 부유한 뒤.
파앗-!
파아아-!
파아앗-!
여섯의 인물에게, 소식을 전달하였다.
애석하게도 온전한 정보는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일리아 린제이를 비롯한 이들이 곧바로 그들을 추적하지 못한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물론 이그넷 역시 이를 원했다. 지금의 그들로는 역부족일 테니까. 더 힘을 쌓고 와야 했다.
“…….”
하지만, 아이른 파레이라의 경우는 달랐다.
1,000년 전의 세월부터 이어져 온 진하고 질긴 광대 악마와의 악연.
그리고 그보다 더욱 위험한, 세계를 파멸로 이끌 마왕의 출현.
우우우우우웅
카렌 윈커의 신념이 녹아든 대검의 끝이, 나아가야 할 곳을 가리켰다.
신성왕국으로 향한 셋과 달리, 아이른 파레이라는 대륙 동부로 몸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