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337화 (337/388)

◈ 109. 악마와의 내기 (1)

“오, 아이야. 가엾고 딱한 아이야.”

칼을 품에 안은 어둠이 그를 품은 채로 다독였다. 비로소 빛에서 벗어난 악마는 잔뜩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귓가에는 끊임없이 광대의 노랫소리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쓸 만해졌군.’

인간 검사의 상태를 확인한 광대 악마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었다. 이 녀석 따위가 이그넷을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애초에 심마가 원하는 바였다.

깊고도 짙은 좌절감을 흡수하며, 광대는 그간의 상처가 순식간에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하아…… 좋군. 아주 좋아. 오, 이런. 떨지 말거라. 계속해서 노래를 들려 주마.”

칼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광대가 히죽 웃었다.

강건한 육신, 그리고 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하찮은 정신.

갖고 놀기에 이보다 더 훌륭한 재료도 없었다. 인간 검사는 자신의 걸작품이 되어 대륙을 누빌 것이다.

새로이 태어난 마왕의 곁에서. 악마가 아니라 인간이 키워 낸 존재의 옆에서.

콰아아앙!

“오우, 오우!”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오러의 파편에 광대가 과장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재차 재료감을 다독인 그가 멀찌감치 거리를 벌렸다. 사투를 벌이는 두 존재로부터.

물론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다.

심마도 심마지만, 이그넷 크레센시아도 대단했다.

태양처럼 빛나는 검을 들고 어둠을 찢어발기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악마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인간계를 혼란케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결코 멸망케 할 수는 없을지니. 그것이 이곳에서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다.’

커다란 위기가 다가올 때면 꼭 그것을 막아 낼 영웅이 탄생한다는, 인간 사이에 구전되는 신화나 영웅 설화와 상통하는 메시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틀렸다.

지금의 마왕은, 악마임에도 불구하고 마계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니까.

“잘 가시게, 성기사 양반.”

여기저기 금이 갔던 가면이 수복되는 것을 느끼며, 광대 악마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 * *

쩌엉! 쩡-!

퍼어엉!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천지를 울렸다. 요술에 의해 강해진 이그넷이 사납게 검을 휘둘렀다.

한 번의 검격에서 일곱 개의 반월형 오러가 쏘아져 나갔다. 유효하지 않았다.

네 개를 몸을 움직여 피하고, 두 개는 양팔로 쳐 낸다. 마지막 것은 쩌억 벌어진 입으로 콰작, 씹은 뒤.

퉤엣-!

거칠게 뱉어 낸다. 파편화된 오러가 이그넷을 향해 매섭게 쏘아졌다.

허나 이 역시 닿지 않았다. 잔상을 남기고 사라진 그녀가 뒤에서 나타났다.

악마는 재빨리 신형을 반전시켰고, 들어 올린 팔의 위로 유성처럼 붉은 검날이 떨어져 내렸다.

콰직-!

베어 내지 못했다.

하지만 깊게 박혔다. 득의의 미소를 지은 이그넷이 추가 타를 넣기 위해 검을 회수했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상처 부위에서 순식간에 자라난 촉수들이 오러를 감쌌다.

끊임없이 피를 흘리면서도, 끊어지면서도 계속해서 끌어안았다. 검을 봉인하려는 의도. 심마가 히죽 웃었다.

퍼억-!

이그넷은 곧바로 검을 포기했다. 왼손으로 상대의 죽통을 후려친 그녀가 오른손으로 무언가를 끄집어 올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던 땅에서 빛의 검이 솟아났고.

푸욱!

이를 냅다 상대의 몸통에 처박았다.

“끄윽!”

푸욱!

“크으윽?”

푸욱!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끊임없이, 쉴 새 없이 박아 넣었다.

고슴도치처럼 변한 악마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렀다. 히죽, 비웃음을 머금은 이그넷이 자신의 검 쪽을 쳐다봤다.

빛으로 인해 잔뜩 약해진 지금이라면 회수할 수 있으리라.

“…….”

뻐어엉!

생각을 멈춘 그녀가 심마를 강하게 걷어찬 뒤, 반탄력을 이용하여 저 멀리 물러났다.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심마는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찌직!

콰각-!

검이 꽂혀 있던 상처에서, 우악스럽게 손 하나가 솟아난다. 오러가 사라진 검이 그에 의해 처참하게 박살 난다. 이그넷의 표정이 언짢아졌다.

찌지직-!

다른 쪽의 균열에서도 흉험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촉수인 것 같기도 하고, 늑대의 갈기인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의 혈관 다발을 확대해 놓은 것 같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전체적으로 역겹기 그지없었다.

쩌저저적, 마침내 사제의 가죽과 의복이 완전히 찢어졌다.

귀찮다는 듯이 허물을 던져 버린 악마가 허리를 폈다. 이전보다 훨씬 커진, 건장한 남성의 체격이었다.

그런데, 아는 얼굴이었다.

상대의 외모를 확인한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쿤?”

“심마라고 부르도록.”

터엉

꽈아아앙-!

“끄윽……!”

거대한 크레이터. 공격에 의해 생긴 구덩이가 아니었다. 몸을 잔뜩 웅크린 심마가 도약하면서 생긴 흔적이었고, 그 폭발력은 어마어마했다.

엄청난 돌격의 끝에 더 무지막지한 공격이 이어졌다. 단순히 주먹질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그넷은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크게 뽑아낸 빛의 검으로 방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충격이 전해졌다.

우웅

우웅 우웅 우우웅-!

타격에 멀리 날아가던 그녀가 왼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빛의 영토에서 찬란한 구체들이 피어나 심마를 향해 쏘아졌다.

효과가 있었다. 허나 크지 않았다. 곧바로 달라붙으려던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휘둘렀고, 빛의 구체들이 계란처럼 퍽퍽 터져 나갔다.

이그넷이 황당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뭔.”

인간을 상대로는 별다른 효과가 없지만, 악마에게라면 자신이 직접 만든 오러 구체만큼이나 커다란 위력을 보이는 빛의 구체다.

그런 것을 10개나 쏘아 냈는데도 별다른 타격이 없다. 그야말로 괴물, 아니 마왕이었다.

물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그넷이 재차 손바닥을 들어 올리자, 아까보다 세배는 많은 오러의 구체들이 솟아났다.

오른손으로는 열심히 검을 휘저었다. 그러자 직전에 선보였던 빛의 검들이 햇살처럼 허공에 맺혔다.

그 모든 것들이 쏘아졌다.

그 모든 것들을 무시했다. 심마는 더는 멈춰선 채로 방어하지 않았고, 적당한 피해를 감수하며 성난 늑대처럼 이그넷을 향해 짓쳐들었다.

그 모습이 투박하고 야만적이면서도 사나운 맛이 있어, 세련되고 정교한 움직임으로도 회피하는 데 애를 먹었다.

벗어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빛의 공격을 쏟아 내야만 했다.

퍼퍼퍼퍼퍼퍼퍼펑-!

쫓고, 쫓기고. 그 사이를 검과 구체가 어지러이 돌아다니고.

마치 신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아니, 실제로 그랬다. 수천 년을 산 광대 악마조차도 지금처럼 대단한 광경은 본 적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자신의 가면을 쪼갠 카렌 윈커가 더 대단했지만, 그것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흐흐히, 흐히. 하지만 안 된다구.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니까?”

물론 걱정은 없었다. 히죽 웃어 보인 광대가 주변 풍경을 살폈다.

요술, 영토 선언으로 인해 빛으로 가득하던 공간이 점차 어둠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확인했다.

심마의 능력이었다. 상대를 쫓아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공간을 타락시킨다.

그가 걷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어둠을 몰고 왔고, 그가 휘두르는 주먹질 한 번 한 번이 밤안개를 피워 냈다.

어느새, 주변은 왕의 영토가 아니라 마왕의 영토라고 해도 될 만큼 어둡고 음습한 기운으로 가득 들어찬 상태였다.

꽈아악-!

그러던 차에, 이변이 발생했다.

정신없이 후퇴하던 나머지 빛이 아닌 어둠의 영역을 밟았고, 그런 이그넷의 발목을 무언가가 꽉 잡아챘다.

어둠의 손길이었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심마 역시 자신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씨익

쿤의 얼굴이 더없이 잔혹하게 물들었다. 그가 또다시 몸을 웅크렸다. 부풀어 오르는 하체의 근육이 말해 주었다. 끝이라고.

광대는 곧 있을 영웅의 최후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머리를 헤집는 희열과 기대가 그를 격동시켰다. 가면 밑으로 알 수 없는 액체가 주르르 흘렀다.

하지만, 이변은 하나가 아니었다.

심마의 수작으로 인해 하늘을 가득 뒤덮었던 먹구름.

그 위에 여전히 고고하게 떠 있는 태양이, 암흑의 결계에 균열을 만들어 냈다.

푸슝

덜컥-!

“……!”

심마의 고개가 아래로 푹 꺼졌다. 고통을 느낀 그가 위를 올려다보려 했으나.

푸슉!

콰각!

“크윽!”

그러기 무섭게 또 한 줄기의 빛이 내리꽂혔다.

끝이 아니었다. 시작이었다.

후퇴하던 내내 힘겹게 만들어 낸 태양의 품에서, 성스럽고 찬란한 빛의 검이 계속해서 쏟아져 내렸다.

콰앙! 콰아앙! 꽈아앙!

콰콰콰콰콰콰쾅!

무차별적인 폭격이 쏟아졌다. 쉴 틈 없이, 계속해서 어둠의 결계를 뚫고 내려왔다. 심마의 육신을 파괴하기 위해 쏘아져 갔다.

이그넷 크레센시아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서걱-

즈으으으응-!

발목을 붙잡던 어둠을 잘라 낸 그녀가, 그 어느 때보다 거대한 빛을 뽑아내었다.

검.

아니, 던지기에 그보다 더욱 적합한, 투창의 형태를 한 태양의 창.

악마를 태워 버리기 위한 성스러운 공격이 공간을 가르며 짓쳐들었고.

───────────!

거대한 섬광이, 주변에 켜켜이 쌓인 어둠을 모조리 지워 버릴 듯한 기세로 퍼져 나갔다.

“으아악! 으악! 아악!”

광대 악마가 호들갑을 떨면서 더욱 멀리 물러났다. 그 와중에도 칼은 챙겼다. 자기 생에 최고의 걸작으로 화할 수 있는 재료를 버릴 수는 없었다.

다행히 피해가 크지 않았다. 꽤 먼 곳에서 구경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자칫 잘못했다가는 회복한 게 무색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을 뻔했다.

물론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광대가 침을 꿀꺽 삼키며, 실눈을 뜨고 격전의 장소를 바라봤다.

여전히 남아 있는 빛줄기 때문에 눈이 아팠다. 진물이 흘러나와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웃을 수 있었다.

상처 입은 몸뚱어리.

지친 듯 헉헉대는 숨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서 있는 심마를 보며, 그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을 터뜨렸다.

“히히, 히히히히! 좋아, 너무 좋아! 끝났어. 드디어 끝이 났구나. 아이 좋아라, 아이 좋아라!”

섣부른 기대가 아니었다. 심마로부터 시선을 거둔 광대가 반대쪽을 쳐다봤다.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모습이 보였다. 모든 힘을 소진하여,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지쳐 있는 그녀의 육신이, 그녀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더 볼 것도 없었다. 지금의 녀석이라면 자기 발치에 웅크리고 있는 칼이라고 해도 충분히 찍어 누를 수 있었다.

‘물론, 마음이 부서진 녀석에게 그런 게 가능할 리는 없지만.’

뭐, 상관없다.

광대가 웃음을 거두었다.

허나 기대는 그대로였다. 아니, 전보다 더욱 음습한 시선으로, 정체불명의 액체를 흘리며 신성왕국의 기사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끝을 감상하기 위해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움직이기 싫어하는 칼의 손을 꼭 붙잡고서. 질질 끌고서.

그런 그의 귀에,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내기 하나 하지 않겠느냐?”

“…….”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마왕의 앞에서.

인간이 먼저 내기를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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