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336화 (336/388)

◈ 108. 재회 (3)

‘모자라고, 부족하고, 그로 인해 고통받고 괴로워하면서도 끝끝내 일어서서 나아가는…… 그 녀석들을 본다면, 어둠에 물든 네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지.’

쿤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다. 이 말로 인해 칼은 용사의 제전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아이른 파레이라를 비롯한 4인방을 주시하게 되었다.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자신과 같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손에 꼽히는 재능을 타고났으나, 그보다 우월한 존재로 인해 상처받고, 좌절하고, 아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씩씩하게 일어서 다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느냐고?

‘나 역시 그렇다.’

천재이기에 더욱 명료하게 느껴졌던 상대와의 격차. 좁혀지기는커녕 계속해서 벌어질 수밖에 없는, 불합리한 재능의 차이.

허나 자신은 포기하지 않았다. 가문을 포기하고, 빛을 외면하고, 어둠 속에 발을 들이면서까지 검을 놓지 않았고, 이렇게 다시 원수의 앞에 마주 섰다.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을 거로 생각했던 하늘 위의 존재,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앞에서 당당히 고개를 치켜들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그렇게 생각했건만.

“네 검을 보거라.”

“잠시 머리를 식히고 검을, 그대의 검날을 바라보거라.”

“그대는 더는 칼도, 칼 린제이도 아니니라.”

……서늘하게 내리꽂히는 상대의 말에, 칼이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였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들과 자신의 차이점을.

브랫 로이드.

주디스.

일리아 린제이.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

그들은 누군가의 손을 잡고 일어났을지언정, 당당한 자신으로서 서 있었다.

가끔 힘들고, 괴롭고, 울적하여 누군가에게 기댔을지언정 자기를 잃지 않았다. 용사의 제전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웃는 이유였다.

칼 린제이.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부족하고 모자란 자신을 경멸했고, 부정했다.

힘들 때 잠시 기대어 쉬고 스스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마(魔)에 끌려왔다. 어둠에 업히고, 어둠의 뒤에 숨어 이 자리에 나타났다.

칠흑의 가면을 쓴 채로.

당당히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못한 상태로.

자기 자신이 아닌, 마인(魔人)으로서 서 있는 본인을 자각한 순간, 칼은 비로소 쿤의 메시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

“…….”

침묵이 내려앉았다.

여전히 검날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깊은 생각에 잠긴 칼. 아니, 한낱 저주받은 존재.

신성왕국의 흑기사단장으로서 당장 토벌해야 마땅한 대상이지만, 이그넷 크레센시아는 잠시 기다렸다. 상대에게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을 주었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변화가 그녀를 자비로 이끌었고, 칼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제공했다.

어둠에서 벗어나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될 희망을 주었다.

시간이 흘렀다.

하염없이 흘렀다.

인내심이 강한 이라도 좀이 쑤실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이그넷은 기다렸다. 기다려 줬다.

자신의 좁은 시야를 넓혀 주었던 4명의 후배처럼, 눈앞의 존재 역시 껍데기를 깨고 나오기를 바랐다.

어두운 세상에서 벗어나 다시금 빛을 마주할 용기를 피워 내기를 원했다.

철컥

그녀의 마음은, 닿지 않았다.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디며 재차 전투 자세를 취하는 그의 몸에서, 역겨운 마기가 흘러나왔다.

즈즈즈즈즈즈……

검은 아지랑이가 어깨를 타고 피어오른다. 가늘고, 몇 가닥 없던 그것들은 이내 징그러울 정도로 빠르게 수를 불리며 얽히고설키며 새로운 형태로 거듭난다.

어깨를 타고 내려가는, 몸 구석구석에 휘감기는 마기가 단단한 금속의 성질을 띠었고, 등 뒤로는 날개와도 같은 망토가 돋아나 칼을 하늘로 이끌었다.

펄럭-

인간의 살갗따위, 이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확인할 수 없었다.

흑색의 갑주로 무장한 마인.

아니 그 어떤 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존재가, 이그넷 크레센시아보다 더욱 높은 위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짓밟겠다.”

악마가 말했다.

“부수고, 으깨어 굴복시키겠다.”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렇다. 애초에 이게 맞았다.

모든 이의 정점에 오를 것이 분명했던, 자신보다 밑의 존재 따위에게는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오만하고 무례한 존재.

그런 그녀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이 더 강한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더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봐야만 한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상대를 찍어 누른다면, 제아무리 이그넷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시의 눈빛이 아니라, 격렬하고 진한 감정을 품고서!

“나를 돌아보게 만들겠다. 아니, 올려다보게 만들겠다.”

“…….”

“그때도 내가 아닌 이 공간에 대해 물을 수 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지.”

“후우.”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한숨을 쉬었다.

암흑의 갑주 속에, 어두운 가면 뒤에 숨어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는 악마.

안타까웠다.

그리고 한심했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대단한 기세긴 했다. 마인조차 초월하여 진정한 마(魔)의 경지에 들어선 칼의 힘은 그야말로 재앙.

아무리 현재 그녀의 실력이 대륙의 10대 검사에 비견된다 해도 넘을 수 없는 상대였다. 이대로는 필패였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았다.

두려워하지도,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다만, 짜증이 일긴 하는구나.”

“……지금 이 순간까지 허세를!”

칼이 외쳤다.

여유 따위 없었다. 강력한 힘을 거머쥔 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였으나, 마음만큼은 여전히 15년 전과 같았다.

비루하고, 보잘것없었다. 거기에 어둠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그 어둠이, 지금의 국면에서 가장 중요했다.

‘인간인 상태였다면, 어찌 됐을지 모르지.’

이그넷이 생각했다.

칼 린제이였다면. 혹은 칼이었다면 모르겠다. 질 수도 있다. 자신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항상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이른으로부터 배웠다.

그러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갈 용기 역시, 4인방을 보고 품었다.

허나 지금의 싸움은 그런 것과는 관계 없었다.

이긴다. 자신이 무조건.

‘이런 곳에서 낭비하고 싶진 않았지만…….’

쯧, 혀를 찬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검을 들었다. 화들짝 놀란 악마가 움찔했으나, 막지 못했다.

콱, 순식간에 땅에 박힌 검으로부터 신비로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우우우우웅-

그것은 오러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성력도 아니었다.

그녀가 오랜 시간 품어 왔던, 자신의 왕국을 만들겠다는 꿈.

자신의 울타리에 들어온 이들을 어둠으로부터 지켜 내겠다는 염원이, 의지가 만들어 낸 또 하나의 기적.

“요술, 영토 선언.”

“……!”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 직후.

15년 전의 린제이 가문을 보여 주었던 정교한 환상이, 산산이 깨어졌다.

* * *

용사의 제전이 개최되기 2년 전,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발전시킨 능력은 비단 검술만이 아니었다.

언제고 왕이 되어 누구나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뜻.

거기에 악마라는 존재에 대한 경계가 덧씌워진 순간, 내면의 의지가 능력으로써 실체화되었다.

영토 선언.

일생에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요술로, 자신이 원하는 공간을 왕의 영토로 지정한다.

지정된 장소에서는 왕인 본인을 포함한 휘하 신하들의 능력이 소폭 상승하며…….

결정적으로, 마(魔)를 상대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그것이 이그넷이 승리를 확신하는 이유였다.

칼 린제이가 인간인 채로, 자신을 잃지 않은 채로 이곳에 나타났다면, 영토 선언을 꺼내 들었다 하더라도 별 차이가 없었을 터였다.

아니, 애초에 쓰지도 않았을 터다. 이 능력은 언젠가 자신이 진짜로 왕이 되었을 때, 자신의 왕국 중심에서 사용할 예정이었으니까.

하지만 거대한 악을 마주한 이상, 아낄 필요가 없었다.

거대한 악으로서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이상, 녀석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아쉽겠구나, 악마여.”

“…….”

태양처럼 밝게 물든 공간에서,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재차 입을 열었다.

악마가 된 칼이 움찔했다.

그리고 바라보았다. 두둥실, 어느새 자기보다 더욱 높은 곳으로 떠오른 상대를 보며, 15년 전의 패배가 또다시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되새기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형편없었던 자신에게서 벗어나, 당당히 이그넷을 마주하고 싶었다.

똑바로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검을 들고 싶었다. 과거와 달리 멋들어지게 싸우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다.

악마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거칠고 사나운 기운을 뿌려대던 날개도 힘을 잃었고, 강건하게 육신을 감싸던 묵색의 갑주도 단단함을 잃었다.

주르륵, 밑으로 흘러내린 어둠과 함께 칼 역시 바닥으로 추락하였다.

철퍼덕

크읏, 그의 잇새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팠다. 괴로웠다. 고통스럽고 무서웠다. 어둠의 갑주 없이는, 감히 이그넷을 상대로 고개를 치켜들 수 없었다.

악마가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간신히 붙어 있는 가면을 확인한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맨얼굴로는 주변 가득 퍼지는 햇살을, 왕의 위엄을 받아 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망, 도망가야 해.”

“숨어야 해.”

“어두운 곳으로. 빛을 피할 곳으로…….”

“……참으로 한심하구나.”

빛을 피하고자 그림자를 찾아다니는 악마를 보며, 이그넷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4인방이 기대치를 워낙 높여 놓긴 했지만, 이것이 일반적일 터였다. 자신의 인생을 봐도 그랬다.

끝까지 처음의 꿈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는, 튕겨 나가지 않고 주변을 지켜 주는 존재는 몇 없었다.

‘게오르그와 아냐에게 감사해야겠어.’

새삼 둘에 대한 고마움을 느낀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악마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여기에 왔는지도 잊은 채,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바닥을 기어 다니는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아무리 요술의 보조를 받았다고 한들, 이렇게까지 쉬운 상대가 절대 아니었다.

악마가 제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기만 했다면 그녀 역시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을 터였다.

“허무하구나.”

이그넷이 검을 들었다.

최선의 결과는 아니었다. 환상을 만든 존재에 대해서도 알아내지 못했고, 영토 선언도 낭비해 버렸다.

하지만 칼 린제이를 타락시킨, 아빌리우스에서 파악하지 못한 또 다른 악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만으로도 성과가 있었다.

자신이 무사히 살아남은 것 역시 호재였다. 건방진 생각이 아니었다.

원래도 사실이지만, 용사의 제전 이후 대륙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녀가 검을 내리그으려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

“오, 안녕? 하하하. 오랜만이야? 아앗, 칼 린제이 군! 이게 무슨 꼴이야! 내가 간호해 줄게!”

굉음과 함께 박살이 난 결계.

그 소란을 뚫고 광대 악마의 경박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신에게 찡긋 눈인사를 건넨 뒤, 촐랑거리는 움직임으로 칼에게 달려가는 녀석이 보였다.

이그넷은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광대의 뒤에서 걸어오던, 사제 복장의 악마.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이그넷은 전력으로 기운을 끌어 올렸고, 돌격했다.

사제, 아니 심마(心魔)도 마찬가지였다.

쾅!

콰앙-!

왕.

그리고 마왕.

주변을 압도하는 두 거물이 격돌하는 순간.

───────────!

귀청을 찢는 굉음이, 주변 가득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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