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335화 (335/388)

◈ 108. 재회 (2)

“…….”

고급스럽지만 화려하지는 않은 실내.

따뜻한 차가 올려진 테이블의 앞에서 깨어난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주변을 살폈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분명 자신은 아빌리우스 수도 근처의 한적한 산에서 명상 중이었다. 헌데 정신을 차려 보니 이곳이다.

낌새조차 느끼지 못한 사이에 공간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지금의 장소가 그녀에게 있어서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눈에 들어오는 낯익은 가구들.

코끝을 스치는 독특한 차의 향기.

이곳은 린제이 가문의 응접실이었다. 그것도 현재가 아니라, 16살의 자신이 대련을 위해 찾았던 때와 한 치의 다름도 없는 모습이었다.

상식을 파괴한 일.

있어서는 안 되는 일.

이그넷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놓고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자 오히려 생각이 차분해졌다.

“요술이로구나.”

다만, 자신이 발현한 요술은 아니다.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 자리한 모든 사물이, 방 밖을 가득 채운 공기와 햇살이, 그 밖에 이 장소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시하고 있었다.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존재.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이 이그넷 크레센시아와의 재회를 바라는 사내.

‘재미있겠구나.’

그녀가 미소 짓는 순간이었다.

덜컥, 문이 열렸다. 눈코입이 없는 존재가 들어와 정중히 고개를 숙인 뒤 안내를 시작한다.

이그넷은 망설이지 않았다. 눈앞의 차를 후루룩 마신 뒤, 얌전히 안내인의 뒤를 따랐다. 건물을 나섰다.

흐드러지게 핀 복수초의 향기가, 예전과 달리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나는, 확실히 달라졌구나.’

주변의 정취를 느끼며, 이그넷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랬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지금의 재회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을 터였다.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최근의 그녀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아이른 파레이라의 성장을 지켜봤다.

일리아 린제이의 성장을 지켜봤으며.

주디스의 활약을, 브랫 로이드의 분전을 확인했다.

그들 모두가 이렇게까지 높이 날아오를 거라고 예상치 못했던 존재들이다.

아이른은 마음속의 쇳덩이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얼간이였으며, 일리아는 라바트에서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다른 둘은 말할 것도 없다. 언급할 가치조차 없었다.

오만이었다.

오판이었다.

부족한 것은 그들이 아닌 자신이었다. 자신의 안목이었다.

이를 깨달은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머릿속에, 옛 인연의 10년 전 실망스러웠던 모습이 떠올랐다.

‘다를 것이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를 것이다. 자신은 누군가의 가능성을 재단할 정도로 완벽한 존재가 아니었다.

완벽하기는커녕, 자신을 쫓아오는 후배들의 속도에 겁을 냈던 연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보여 봐라.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과거의 자신이 내렸던 판단이 말도 안 되는 무례이자 오판이었다는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증명해 보아라.

이그넷 크레센시아는 그러한 생각을 품은 채 연무장에 발을 내디뎠고.

“…….”

원했던 이와 재회하였다.

……아니었다.

원했던 이가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후우.”

그녀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들끓었던 투쟁심이 순식간에 식어 버렸고, 들썩였던 마음도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히 가라앉았다. 싸늘한 시선이 상대의 전신을 훑다가, 이내 떠나갔다.

주변 풍경을 둘러본 이그넷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무척 신기하구나. 그럼 이 공간이 요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뜻인데. 으음…….”

그녀가 인상을 찡그린 채 연무장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두드리고, 소리를 듣고, 그 밖의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여 자신이 있는 장소를 파악하려는 모습.

허나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었다.

푸화아악-!

온전히 갈무리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기운이 뿜어지고.

우우우우우웅-!

사납기 그지없는 오러가 검을 타고 흘러나왔다. 이내 형태를 이룬 흑색의 검날에 소름 끼치는 살기가 맺혔다.

“……나를.”

콰앙!

거대한 균열을 남기고 사라져 버린 흑색 오러의 주인, 칼이 입을 열었다. 길게 늘어지는 음성과 함께 짓쳐 든 그가 검을 휘둘렀고, 이그넷이 이를 받았다.

무지막지한 충격파가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검을 맞댄 상태로, 두 검사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돌아보게 만들어 주마.”

“관심 없노라.”

뜨겁기 그지없는 칼의 목소리.

이와 대비되는, 무심하기 그지없는 이그넷의 목소리.

참을 수 없었다.

견딜 수 없었다.

괴성을 내지른 잿빛 머리칼의 검사로부터, 무지막지한 위력의 오러가 쏟아졌다.

* * *

콰앙!

콰아앙!

콰아아앙-!

천둥 번개가 치는 듯한 굉음이 연무장을 가득 뒤덮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검은 오러가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신형을 폭력적으로 휩쓸어 갔다.

머리통을 날려 버릴 듯 휘둘러지는 강격.

콰앙!

가로막힌 직후 곧바로 회전하여 날아드는 좌하단 베기와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타, 연타, 연타!

대부분은 가로막혔고, 몇 번의 검격은 허공을 갈랐다. 허나 헛치는 순간마저도 헛수고가 아니었다.

칼의 검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검은 와류가 스산하게 맺혀갔다.

후웅-

후우웅-!

하늘검.

전투 개시 1분 만에 대기를 가득 채운 거센 바람을 느끼며, 이그넷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상대를 향한 의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신기하구나. 성기사단장인 내가 눈치도 못 챌 정도의 능력이라니. 요술도 아니건만 어찌 이게 가능하…….”

퍼엉

퍼퍼퍼퍼펑-!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늘검이 내리꽂혔다. 연무장의 바닥을 소멸시키며 날아드는 연속적인 폭풍이 이그넷을 찢어발길 듯 굉음을 내질렀다.

닿지 않았다.

그녀가 바닥에 검을 꽂았고,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어둠을 몰아내는 빛의 일격이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들었다.

“후우.”

칼은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의 상대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그보다 잘 아는 이는 없었다. 용사의 제전 때의 그녀도 대단했지만, 지금의 그녀는 또 달랐다.

여전히 자신보다 주변 관찰에 힘쓰는 이그넷을 보며, 그가 번쩍 검을 치켜들었다.

콰아아아아아.

빛에 밀려 하염없이 흩어지던 어둠이 끼익하고 제자리에 멈췄다. 거기에 또 하나의 기운이 더해졌다.

이그넷이 도착하기 전부터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던 오러가, 거대한 해일이 되어 중앙을 향해 밀고 들어갔다.

사방에서 덮쳐 오는 파도를 흑기사단장은 침착하게 응시하다가, 바짝 자세를 낮췄다.

부우욱, 대퇴근이 고양잇과 맹수의 것처럼 부풀어 오르고.

콰아앙! 어마어마한 속도의 돌파가 이루어졌다.

퍼어어어어엉-!

무채색의 금속벽보다도 더 잔인하게 느껴졌던 해일이 굉음과 함께 터져 나갔다.

오러의 파편이 또다시 주변 풍경을 박살 냈고, 이그넷에게도 적지 않은 타격을 전했다.

허나 거뜬했다.

정면 힘 싸움의 여파를 여유로이 흘려보내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신화 속에 등장하는 영웅과 같아 보였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칼은 브랫이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오러의 파도를 쏟아 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힘이 넘쳤고, 분노가 가득했다. 열기로 가득했다.

15년간 꺼지지 않던 증오가 흑염으로 화해 그의 몸을 헤집었다. 크으윽, 절로 신음이 흘렀으나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화르르르륵-!

지옥에서 피어난 유성처럼 끔찍한 모습이 된 칼이 이그넷을 노려보며 힘을 키워 갔다. 감정을 더 해갔다.

켜켜이 쌓여 있던 어두운 불길을 터뜨리기 위해 날카로운 눈으로 상대를 노려봤다.

……이그넷은 아니었다.

“칼 린제이.”

첫 대면 이후 두 번째로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그녀가.

“그대 말고, 이 공간을 만든 이를 데려오도록.”

“…….”

“몹시 흥미롭구나. 신성왕국에 몸담은 본인이 온 정신을 집중해야만 간파할 수 있는 마기라니.”

“……!”

여전히, 여전히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 잔인한 현실에 직면했을 때.

칼의 임계점이 폭발하였다. 엉망진창으로 터져 버렸다.

커다란 고함을 내지른 그가, 이그넷이 아닌 자신의 주변을 부숴 버리며 물었다.

“왜 나를 보지 않는 것이냐!”

“…….”

“어째서! 어째서, 이 칼 린제이를…… 나를 보지 않는 것이냐!”

격앙되어 소리치던 그가 흠칫 몸을 떨었다.

실수였다. 자신은 칼 린제이가 아니었다. 가문의 이름을 벗어던지고 새로이 태어난 복수의 화신, 칼이었다.

물론 그리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10년만의 재회에도 불구하고 이그넷이 아무런 감흥 없는 표정으로 이 자리에 서 있다는 점이었다.

속세와의 모든 인연을 끊고, 자신을 무너뜨린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꺾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왔다. 고통과 괴로움, 슬픔과 좌절을 견디고 이 자리에 섰다.

그런데.

상대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어째서……!’

이상한 일이었다.

대륙 최속의 검사, 쿤의 말을 가슴에 품고 신성왕국의 수도를 찾았던 칼이었다.

이 때문에 대회 전에 일을 벌이자는 심마(心魔)의 제안조차 무시했다.

직접 확인하기 위해. 이그넷 크레센시아라는, 태생부터 완벽한 재능을 타고난 괴물에 대항하기 위해 다른 참가자들이 어떠한 모습을 보이는지. 어떠한 검술을 펼치는지.

칼이 오랫동안 봉인했던 하늘검을 보여 준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그넷이 연무장에 도착하기 전부터 오러를 채우고, 해일을 쏟아 낸 것도 그 때문이었고.

타오르는 분노를 집약하여 불꽃을 일으킨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였다.

그들이 그랬으니까.

일리아, 브랫, 주디스.

이그넷이 관심을 가진, 자신과 달리 무시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본 그들의 검술이 그러했으니까.

그런데도.

그런데도!

저 빌어먹을 흑발의 검사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제대로 상대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화르륵, 또다시 강렬한 어둠의 불꽃을 피워 낸 칼이 재차 고함을 지르려는 순간이었다.

“웃긴 녀석.”

“뭐?”

갑자기 날아든 비웃음에, 칼이 발끈했다. 별거 아닌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살기가 자욱하기 퍼졌다.

그것이 더 우스웠던 이그넷이 큭큭, 소리 내어 웃음을 흘렸다.

“말해라! 어째서! 왜 웃는…….”

“가문에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진 지 10년이 넘은 주제에, 자신을 칼 린제이라고 소개하는 그대가 어찌 우습지 않을까?”

“…….”

“물론 그것만 우스운 것은 아니니라. 네가 가문의 이름을 버리지 않고 칼 린제이로 살아가고 싶든, 가문의 이름을 버린 채, 성을 버린 채 ‘칼’로서 살아가고 싶든…… 이제는 아무 의미 없다. 모자란 것.”

“지금, 뭐라고 했…….”

“네 검을 보거라.”

“뭐?”

“잠시 머리를 식히고 검을, 그대의 검날을 바라보거라.”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몹시 경건했다. 또 엄숙했다.

빛나는 위엄을 망토처럼 두른 듯한 존재가 그리 말하자, 칼로서도 무시할 수 없었다.

원수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으나, 결국 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흑요석처럼 빛나는 자신의 검날을 바라보았다.

“…….”

거기에, 자신이 있었다.

거울처럼 매끄러운 검날의 표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 자신의 눈빛.

그러나 표정만큼은 볼 수 없었다.

어느새 얼굴에 자리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돋아난 가면.

당황하는 그를 향해,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말했다.

“그대는 더는 칼도, 칼 린제이도 아니니라. 한낱 마인일 뿐.”

“…….”

“명색이 아빌리우스의 성기사단장인 내가, 자기 자신을 잃은 타락한 존재에게까지 호승심을 느껴서야 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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