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재회
“그럼 다음에 보세.”
“그러세. 종종 봤으면 좋겠군.”
용사의 제전 뒤풀이가 끝나고 며칠 후, 참가자들은 신성왕국을 떠나 각자의 길을 떠났다.
4인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동생의 앵두에 탄 파레이라 가족이 가장 먼저 출발했고, 일리아 린제이 역시 가문과 함께 돌아갔다.
하지만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는 곧바로 헤어지지 않았다.
비교적 자주 볼 수 있는 다른 이들과 달리, 주디스는 또다시 긴 수련에 들어갈 터.
이대로 연인을 떠나보내기 아쉬웠던 브랫은 쿤의 거처까지 주디스와 동행하기로 했고, 그런 그를 로이드 가족은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다녀오거라.”
“다녀오렴.”
“갔다 와, 형.”
“…….”
“왜 안 가?”
“아니, 어머니 아버지야 그렇다 쳐도 너는…….”
제라드 로이드의 덤덤한 표정을 본 브랫이 한숨을 쉬었다.
경제학 공부를 위해 왕국 아카데미에 기숙 중인 동생이었기에,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꽤 오랜만이다.
조금 더 살가운 태도를 보여야 정상이라는 뜻이다.
물론 먼저 동생을 내팽개치고 연인과 함께하기로 한 건 자신이지만, 저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배웅하는 걸 보니 입맛이 썼다.
“돌아와서 형으로서의 위엄을 보여야겠군.”
“돌아오면 나 없어.”
“수도로 찾아가면 된다.”
“외부인 출입금지야.”
“나를 외부인 취급하다니…….”
“브랫, 적당히 하고 출발하렴. 주디스 양, 못난 아들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
“벼, 별말씀을…….”
주디스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치 어머니의 그것처럼 포근한 눈빛. 고아 출신인 그녀로서는 쉬이 적응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물론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로이드 가족의 따뜻한 배웅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둘 역시 아빌리우스를 떠나 여정을 시작했다.
“아쉽네. 참가자들도 참가자들이지만, 늙은 양반들도 많이 배웠다고들 하던데. 스승님도 왔으면 좋았을걸.”
“제자가 활약하는 모습도 보고, 어? 그러면 좋잖아! 맨날 하는 똑같은 수련 계속해서 뭐 얼마나 나아진다고. 이럴 때 좀 바깥에도 나와서 후배들 크는 모습도 보고, 그러다 보면 자기도 느끼는 것도 있을 거고…….”
“후, 물론 이게 스승님 방식인 건 알긴 하지만…….”
“아, 모르겠다. 가서 오랜만에 지도 대련이나 해 달라고 해야지.”
“아마 엄청 놀라지 않을까? 나, 확실히 대회 전보다 강해진 것 같은 느낌이야.”
“흠. 그렇지.”
‘생각했던 분위기가 아닌데.’
브랫 로이드가 짧게 대꾸하며 생각했다.
얼마 만에 둘만의 데이트인가. 그는 평소보다 조금 더 달콤한 시간을, 말랑말랑한 분위기를, 은밀한 연인 간의 대화를 원했다.
허나 주디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대부분이 스승에 관한 이야기였다.
물론 이해할 수 있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거친 세상에서 처음으로 지붕이 된 것이 크로노 검술관이라면,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은 쿤일 터였다.
그런 소중한 존재에게 자신의 성장을 보여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제 곧 보여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꽤 많이 서운했구나.’
그리고 그보다 더 그리웠구나.
고개를 끄덕인 브랫은 계속해서 주디스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주디스의 생각에 동의하기도 하고, 다른 의견을 표하기도 하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사랑스러워 보일 때면 때때로 연인으로서의 밀어를 속삭이기도 하고.
그러는 와중에 걸음은 조금씩 빨라졌다. 목적지에 가까워졌다.
어느새 눈에 들어온 메마른 겨울의 들판을 보며, 둘은 너나 할 것 없이 전력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움.
섭섭함.
반가움.
여러 가지 감정을 동력 삼아 달려가던 주디스의 표정이 변한 것은, 익숙지 않은 풍경을 마주했을 시점이었다.
“…….”
“…….”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브랫이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이곳저곳을 살폈다.
우지끈 부러진 나무들.
파편이 되어 흩어진 바윗덩이들.
곳곳에 거대하게 파인 크레이터와…….
완전히 박살이 난, 쿤의 거처.
그의 시선이 연인의 얼굴에 꽂혔다.
주디스는, 놀람과 슬픔과 절망과 분노가 뒤섞인 눈빛으로,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때였다.
파아아앗-!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쳐, 요술처럼 둘의 정신을 일깨웠다.
상투적인 표현 따위가 아니었다. 정말로, 실제로 설명하기 힘든 신비로운 무언가가 날아와 머리에 꽂혔다. 그리고 강제로 정보를 주입했다.
가면을 쓴 채 낄낄대는 악마와 칠흑의 검에 의지하여 서 있는 검사.
그리고 윤곽조차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 두 존재.
‘…….’
‘저들이구나!’
곧바로 깨달았다.
논리의 비약이니, 이성적인 추론이니 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저들이다. 저들이야말로 쿤의 거처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원흉이다.
거대한 직관이 둘을 진실로 이끌었고, 주디스의 입에서 분노에 찬 외침이 흘러나왔다.
죽인다. 죽여 버린다. 어떻게든 찾아내어 찢고, 베어 내고, 명줄을 끊어 주겠다.
브랫은 침묵했다.
그조차도 다가갈 수 없을 만큼 뜨겁고 격렬해진, 위태로워진 주디스를 바라보며 그가 한 생각은…….
‘……돌아가자!’
바로 신성왕국 아빌리우스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낸 세 악마, 그리고 그 사이에서 희미한 빛과 함께 대치하던 존재.
짐작 가는 이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다.
아마도 이그넷 크레센시아, 광대 악마.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둘.
그들이 문제였다.
아이른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광대 악마만 하더라도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거악(巨惡)이다. 헌데 그런 존재가 둘이나 더 있었다.
자신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주디스는 반대할지도 모르지만, 어떻게든 말려야 했다.
어떻게든 직접 찾아가려는 것을 제지하고 신성왕국의 힘을 빌려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의 소굴이 어디인지는 지금의 요술 같은 현상으로도 알 수 없다는 점.
생각을 마친 브랫 로이드의 시야가, 다시금 주디스 쪽으로 맞춰졌다.
울고 있었다.
가라앉고 있었다.
불꽃이 꺼지고 자리한 한없이 깊은 물웅덩이.
슬픔과 후회를 가득 채워 만든 것 같은 우물 속으로 잠겨 가는 연인을, 그가 강하게 끌어안았다.
“신성왕국으로 돌아가자.”
생각은, 행동은, 그 다음에 하자.
사랑하는 이의 말에도 불구하고, 주디스는 한참이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 *
“이그넷 크레센시아 경이 실종됐다.”
“상대는 광대 악마, 그리고 그보다도 거대한 악이다. 우리는 놈의 전력을 마룡왕 이상이라 생각하고 있고.”
“마지막으로…… 칠흑의 검을 들고 있던 존재는…….”
“…….”
백기사단장 율리우스 휼에게서 간략한 설명을 들은 브랫 로이드가, 굳은 얼굴로 일리아 린제이를 쳐다봤다.
감히 고개를 돌리지는 못했다. 힐끗 곁눈질한 것이 전부였다.
칼 린제이.
린제이 가문을 빛낼 희대의 천재였으나, 불미스러운 사고로 인해 날개가 꺾인. 그것도 모자라 세상에 자취를 감춰 완전히 대중의 기억 속에 잊힌 존재.
……하지만 일리아 린제이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남아 있을 존재.
15년 만에 나타난 오빠의 타락한 모습을 전해 들은 그녀의 마음은, 주디스와 비교해도 될 만큼 뜨거운 열기를 품고 있었다.
“외람된 말이지만, 사망이 아닌 실종이라 함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브랫이 물었다.
그들 역시 정황을 전부 파악하고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신비로운 요술의 힘이 적용된 것은 전부 다섯 명. 자신과 주디스, 일리아, 신성왕국 측의 게오르그 포이베와 아냐 마르타까지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냐 마르타가 요술 금화를 사용해서 조금의 정보를 더 알아냈다는 점이다.
이그넷이 생존 중이라는 사실도.
그녀와 마주한 악마가 광대 악마보다도 더욱 강력하다는 사실도, 그로 인해 알 수 있었다.
“그것뿐이라는 게 문제지만…….”
“…….”
2년 치의 요술 금화, 아냐의 전재산을 털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다.
아빌리우스와 룬텔 왕국의 합동 작전으로도 무리였다.
일이 터진 장소는 어찌어찌 찾아낼 수 있었으나, 추적은 무리였다. 자욱하게 흩뿌려진 마기와 도처에서 터져 나오는 방해 공작 때문이었다.
무리하다가 더 큰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브랫이 아랫입술을 씹었다.
이해는 가는 행동이지만, 너무 몸을 사리는 것 아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그런 그를 가까스로 진정시킨 것은, 마지막으로 흘러나온 정보.
아냐 마르타의 요술 금화로 인해 얻어 낸 가장 중요한 조언이었다.
“이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열쇠는…… 금발의 영웅이 쥐고 있다.”
“…….”
“가진 금화로 얻을 수 있는 조언은 이게 최선이었어요. 우리가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이유기도 하고요.”
“……아이른.”
“아이른 파레이라.”
주디스와 브랫의 입에서 동시에 흘러나온 이름.
그밖에 없었다. 누구도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허나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더욱더 찌푸려지는 인상 속에서, 브랫 로이드가 생각했다.
‘어째서…… 어째서 오지 않은 거냐. 아이른 파레이라.’
자신과 주디스가 요술로 인해 정황을 파악하자마자 이곳으로 찾아왔듯, 일리아 린제이 역시 같은 판단을 내렸다.
아마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의문스러운 거대한 악에 맞설 구심점은 신성왕국 아빌리우스밖에 없을 테니까.
헌데, 요술에 노출되었을 확률이 가장 높으며.
심지어 거리상으로도 가장 가까웠을 아이른이 아직까지 오지 않았다고?
심지어 여동생인 키릴 파레이라는 이곳에 있었다. 브랫이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자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던 젊은 요술사가,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나도 몰라요. 어디 있는지. 잠시…… 진짜 잠시, 그리핀을 타고 세자르 공국에 다녀온 며칠 사이에 사라졌어요. 말도 없이, 말도 없이 영지를 떠났어요…….”
“…….”
요술사의 직감으로 알아낼 수 없냐는 질문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그게 가능했다면 여기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어쩌면 여기 모인 이들 중 가장 답답한 것은 주디스도, 일리아 린제이도, 아냐 마르타와 게오르그 포이베도 아닌 키릴 파레이라일지도 모른다.
“…….”
“…….”
“…….”
죽음처럼 무거운 침묵이 장내를 뒤덮었다.
성왕도, 백기사단장도, 성기사와 사제 전력도, 이안과 조슈아 린제이를 비롯한 대륙의 강자들도.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슬픔, 분노, 좌절, 증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희망이 넘쳤던 아빌리우스의 수도에, 어둡기 그지없는 감정이 밤안개처럼 내려앉았다.
* * *
“……여기는, 어디지?”
일리아 린제이, 주디스, 브랫 로이드.
그 밖에 이번 일과 관련된 인물들이 신성왕국으로 모인 시점으로부터 얼마 전.
낯익으면서도 어색한 공간에서 정신을 차린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의문 가득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