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상생(相生) (7)
“단기간 내에 너희들이 나를 따라잡는 건 무리다. 하지만…….”
5년 후라면, 10년 후라면.
혹은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세월이 흐른 뒤라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목소리에, 4인방이 깜짝 놀랐다.
특히 일리아 린제이의 표정 변화가 컸다.
그녀가 아는 흑기사단장은 절대로 약한 소리를 하지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동시대는 물론이고, 이른 시일 내에 전설적인 업적을 써 내려갔던 선배 검사들조차 추월할 것으로 예상되는 존재.
아니, 벌써 10대 검사의 경지에 다다랐으며, 10년 안에 3대 검사와 어깨를 나란히 할지도 모른다고 평가받는 존재.
그런 존재가, 자신을 부정하고 있다.
정확히는 자기보다 늦게 달리기 시작한 이들을 인정하고 있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발언에 모두가 조용해졌고, 한동안 적막이 이어졌다.
그 무거운 분위기를 깰 수 있는 건 오로지 한 명밖에 없었다. 한 차례 더 웃어 보인 이그넷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솔직히 말해 이해할 수 없었노라. 1년 전, 대륙의 강자들과 맞붙으며 이미 그대들을 본 바이다. 놀랐고, 재밌었다. 나보다 뒤에 있는 이들에게 고개를 돌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건만, 자꾸만 눈길이 가더군. 오히려 나를 무참히 패배시켰던 3대 검사보다, 10대 검사보다 더.”
“…….”
“…….”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대들이 속도를 높이는 이상으로 나의 발걸음 또한 빨랐으니, 긴장감 따위는 없었다. 그저 흥밋거리에 지나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 것 같구나. 그런데…….”
예상을 초월했다.
1년이 지난 뒤에 만난 그들은, 용사의 제전에서 마주한 브랫 로이드, 주디스, 일리아 린제이……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는, 그녀가 생각했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한 채로 자신을 바라봤다.
마스터의 초입을 겨우 넘어가던 푸른 머리의 애송이는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 냈고.
통제하지 못할 불꽃을 품었던 이 역시 이를 다스리는 데 성공했다.
여전히 거칠고 야만적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어울릴 수 없을 정도로 자신에게 잘 맞는 방식을 찾아내어 태양에 닿는 것에 성공했다.
은발의 검사도 마찬가지였고, 금발의 영웅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거리를 좁혀왔다. 모두가 하늘 위의 태양에 닿을 정도로 드높은 성장을 이루며 자신의 아성을 위협했다.
그 때문이었다.
연회에 곧바로 나타나지 못한 것은, 어찌하여 4인방과 자신 사이의 격차가 좁혀졌는지를 명확하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이제는 이해했다는 뜻이겠군요.”
“그렇노라.”
브랫이 물었고, 이그넷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은 깊은 눈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전과 달리 적막은 없었다. 뜸 들이는 것 없이, 흑기사단장의 입이 곧바로 열렸다.
“상생(相生).”
“…….”
“…….”
“그대들은, 그대들의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고, 뛰어난 부분은 더욱 북돋우며 함께 날아오르고 있었더구나.”
이그넷이 가장 이해할 수 없던 부분이 바로 그 점이었다.
결승에서 아이른 파레이라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허나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승리였다. 아슬아슬했다. 1년 전의 대련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결과였고, 믿을 수 없는 차이였다.
어째서 그런 걸까?
노력의 격차?
아니었다.
자신이 더 치열하게 수련했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알고 있었으니까. 아이른 역시 끈기와 열정으로는 둘째가면 서러울 정도라는 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자신 역시 신성왕국의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고 자부하기에, 유의미한 차이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능의 격차?
이 또한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높았으면 높았지, 모자랄 것 하나 없는 부분이 바로 재능이다.
아니, 애초에 어떠한 요소를 놓고 봐도 모자란 점이 없다. 육체로 봐도, 정신력으로 봐도, 그 밖에 어떤 것을 비교하더라도 자신은 최고였다.
……그러한 자부심 속에서, 그 누구와도 제대로 교감하지 못했던 것.
자신의 모자라고 약한 모습을 인정하지 않고, 숨기려 하고, 뛰어난 부분만을 내세워 타인의 앞에 서려 했던 것.
바로 그것이, 눈앞에 있는 네 명과 자신의 차이였다는 것을, 이그넷 크레센시아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지금 그대들에게 느끼는 바는, 단순히 후배들의 성장을 기꺼워하는 수준이 아니다. 두려움 또한 섞여 있다. 언제고 나를 뛰어넘을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 본인이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무서움.”
“…….”
“…….”
“이 부끄럽고 나약한 마음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이유는, 그대들 덕분이다.”
눈을 감은 이그넷이 4인방의 모습을 떠올렸다.
서로 격려하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아껴 주며 한 계단, 한 계단씩 올라서려 노력하던 대기실에서의 모습.
경기가 끝난 후, 허세 따위 없이 솔직하게 못난 모습도 보이고, 그것을 위로해 주기도 하던 모습, 잠시 주저앉더라도 곁의 누군가가 손을 내밀며 함께 나아가던 모습.
몇몇 광경만 단편적으로 봤을 뿐이건만, 신기하게도 네 검사가 지금껏 걸어왔던 모습이 연상되었다.
정겹게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강해져 온 그들의 역사가 선명하게 눈앞을 스쳐 갔다. 요술 같은 순간이었다.
비로소 눈을 뜬 그녀가 앞을 바라봤다.
깊고도 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4명의 후배.
그들에게 고개를 숙인 신성왕국 흑기사단의 장이, 입을 열었다.
“독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름대로 많이 노력했다 자부했다. 하지만 쉽지 않더구나.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도, 그렇다고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도…… 이런 말을 털어놓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의 나로서는 그대들밖에 없노라.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을 내보일 수 있는 것은.”
“부디.”
“그대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이 자리에 같이 있을 수 있도록.”
“솔직하고 기탄없이 타인과 교감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허락해 줄 수 있겠는가?”
“…….”
“…….”
“…….”
“…….”
생각지도 못한 광경 앞에서 모두가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아이른 파레이라가 2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조슈아 린제이와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대결이 있고 난 뒤의 일이었다.
당시엔 몰랐었다. 그녀가 어째서 자신의 말로 인해 깨달음을 얻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때보다도 더욱 자유로운 마음으로. 겸허한 마음으로.
홀로 완벽해야 한다는, 유일한 단점을 진정으로 극복할 준비를 마친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위해, 아이른 파레이라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열다섯 살 때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면 되려나…….”
이미 친구들 앞에서 수 차례 꺼냈던 이야기. 심지어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앞에서도 한 차례 꺼냈던 이야기.
허나 누구도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
이그넷은 장인도시 데린쿠에서와도, 광대 악마가 숨어 있던 라바트에서와도 다른 표정으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긴 이야기가 끝이 났다.
허나 자리는 끝나지 않았다. 다음으로 입을 연 것은 브랫 로이드였다.
“으음, 겹치는 내용이 많겠지만, 그래도 예비 수련생 시절부터 이야기해 볼까.”
날 때부터 존귀했던 고위 귀족, 브랫 로이드.
그의 이야기 역시 아이른 파레이라와 다를 것 없었다.
저열한 질투심이, 쓸데없는 분노가, 허무한 좌절감이 목소리 곳곳에서 배어 나왔다. 전체적으로 잘난 부분보다는 모자란 부분이 더 도드라졌다.
그러나 이야기의 끝에 와서 느껴지는 것은,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도움을 청하고, 때로는 도움을 주기도 하면서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점이다.
“흠.”
이그넷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이 일리아 린제이 쪽으로 돌아갔다.
픽 하고 웃은 그녀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일곱 살 때…….”
자신을 불태우던 아픈 이야기를, 자신을 불태웠던 악연의 앞에서 꺼낸다.
이전에 꺼냈을 때보다도 더욱 자세하게, 자신의 가장 저열하고 어두웠던 면까지 숨김없이, 남김없이.
그런데도 괜찮았다. 숨기고 감출수록 타들어 갔던 마음이, 더는 그렇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일리아도 느꼈고, 이그넷도 느꼈다.
전의 둘보다도 더욱 진한 교감이 둘 사이에서 이루어졌고, 이어지는 주디스의 이야기에서도 그러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아, 씨. 나는 이런 거 잘 못 하는데…….”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최대한 자세히, 열심히 말을 이어가는 그녀를 보며, 모든 이야기를 듣고, 되새기고, 가슴에 품으며.
한동안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나 역시 빈민가의 이름 없는 골목에서 시작했노라.”
“…….”
아이른 파레이라의 눈빛이 변했다.
이그넷의 과거에 대해서는 이미 한 차례 들은 바 있다. 라바트의 연무장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녀의 마음은 그때부터 변화가 시작되어, 지금에 와서 꽃을 피웠는지도 모른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는 걸까?
내용이 달라졌다.
행동의 나열이라 할 만큼 건조했던 과거의 이야기와는 달리, 자기 생각이 들어갔다.
당시에 어떻게 생각했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그것을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후회하는 것은 무엇이고,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인지. 상처받은 부분은 무엇이며 나약했던 점은 무엇인지.
이전보다 훨씬 더 솔직하고, 꾸며내지 않은, 그렇기에 더욱 꺼내기 힘들었을 이야기.
그것을 비로소 숨김없이 드러내는 이그넷을 바라보며, 아이른이 조용히 생각했다.
‘……내려왔다.’
내려온다.
태양이 내려온다. 저 높은 곳에 고고하게 떠 있던 그녀가 아래로 내려온다.
누군가는 그것을 퇴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고독하지만 강인했던 그녀의 과거가 더욱 왕의 자리에 어울린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지금의 모습이 썩 괜찮아 보였다.
‘하늘 높이 떠 있을 때보다…… 지금이 더 거대해 보여.’
그리고, 더 따스해 보였다. 더욱 가까이서 내리쬐는 햇살이 아이른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대단해지겠어.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 4인방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에 겁을 먹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남의 성장으로 인해 주눅 들고, 타인의 성취로 인해 질투하고.
그랬던 시절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쩌면 여전히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에 자신을 잃을 정도로 약한 인물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다섯 명의 젊은이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자기 생각을 말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두웠던 밤이 지나 아침이 찾아올 무렵.
이별의 때가 다가왔다.
“고마웠다. 오늘의 도움을 절대 잊지 않겠노라.”
“저 역시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흠, 앞으로도 종종 교류합시다. 여유가 된다면.”
“……대련이나 자주 해요.”
아이른, 브랫, 주디스가 차례대로 말했다. 일리아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그넷이 말했다.
“너는 할 말 없느냐?”
“없는데. 이미 다 했어요.”
“그렇군. 아, 참.”
이그넷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아이른 쪽으로 걸어가 귀를 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뭐지, 갑자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이른은 순순히 귀를 갖다 댔고, 다른 이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둘을 쳐다봤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말 다 해 놓고 갑자기 비밀 이야기를 한다고 하니, 절로 흥미가 돋았던 것이다.
헌데, 이야기가 아니었다.
쪽
“……?”
“……!”
“어?”
“엥?”
볼에 기습 뽀뽀를 한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저 멀리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아이른이 아닌 일리아 쪽을 바라봤다.
사악한 미소를 지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이른하고 포옹도 하고, 뽀뽀도 하면서 기운을 차린다고 하기에…… 나도 한번 해 봤다.”
“…….”
“과연, 효과가 나쁘지 않구나.”
타앗-!
그 말을 끝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흑기사단장을 보며, 브랫 로이드가 중얼거렸다.
“과연, 역대 최고의 재능. 누구보다 빨리 교감하는 법을 배우다니.”
“닥쳐.”
“네.”
일리아 린제이가 으르렁거리는 와중에, 죄 없는 아이른만 연인의 눈치를 볼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