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332화 (332/388)

◈ 107. 상생(相生) (6)

‘젠장.’

남부의 호랑이이자 용사의 제전의 우승 후보 중 하나였던 사내, 쟈롯은 연회장의 구석에서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유야 명확했다. 주디스를 비롯한 젊은 4인방 때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의형제인 자쿠앙은 1회전에 나타나지조차 않아 기권패 처리되었고, 자신 역시 8강까지 올라가긴 했지만 일리아 린제이를 상대로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줬다.

그에 반해 주디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굉장한 활약을 펼쳤다. 무려 대회의 우승자인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무대 끝까지 밀어붙인 것이다.

‘……운이 아니었지.’

연회장을 서성이는 주디스를 바라보며, 쟈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강하다. 엑스퍼트임에도 불구하고 신성왕국 측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자신과 자쿠앙이 함께 상대한다 한들, 저 붉은 머리 검사가 16강전에서 보여 줬던 일격을 막아 낼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이다.

아니, 확실히 불가능하다.

대회가 진행되는 와중에야 오기라도 부려 봤지만, 다 끝난 마당인 지금은 더 냉철한 비교가 가능했다.

주디스는 자신보다 훨씬 강하고.

그녀와 함께하는 브랫 로이드, 일리아 린제이,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자신보다 훨씬 강하다.

그 사실이, 자신보다 30살이나 어린 후배들이 벌써 자신을 뛰어넘었다는 쓰라린 현실이, 그에게 견딜 수 없는 좌절감과 분노를 일으켰다.

말도 없이 자리를 뜬 자쿠앙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먼저 시비를 건 쪽은 자신들임에도 불구하고, 쟈롯은 주디스를 볼 때마다 머리가 익어 버릴 정도의 분노를 느꼈다.

그런데도 연회장에 자리한 것은, 자신마저 도망치듯 신성왕국을 떠날 시에 대중들에게서 들을 조롱과 비아냥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렇듯 흉험한 시선으로, 원수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붉은 머리 검사를 바라보던 남부의 호랑이.

그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주디스와 1회전 탈락자들 사이의 대화로 인해 바뀐 분위기 때문이었다.

“뭐야. 저쪽 사람들, 어디 가는 거야?”

“연무장에 간다는데?”

“뭐? 연무장?”

“나도 들었어. 한창 검술 토론…… 아니지. 일방적인 검술 지도라고 보는 게 맞겠지.”

“그래? 염치도 좋군. 저 양반들, 전부 뒤에서 욕하던 사람들이잖아.”

“그렇긴 하지.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말로 설명하는 것도 성에 안 차서 연무장까지 가는 걸 보면, 아마 제대로 지도하려는 것 같은데?”

“으음, 그래 봤자 별거 있겠어? 주디스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저 치들이 자기 깔봤다는 걸 알 텐데, 대단한 걸 알려 주려고 할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3회전 탈락자인 사내는 흥미로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밑져야 본전 아닌가. 자기 말대로 별거 아닌 것들을 보여 주고 생색을 낼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몹시 구미가 당기는 일이다.

혹시라도 엑스퍼트로서 마스터를 몰아붙였던 그 일격에 대해 알 수 있다면, 이번 대회에서 얻었던 모든 걸 합친 것보다도 큰 선물을 받는 셈이 된다.

“……크흠, 여기 공기가 좀 답답한데. 나도 산책이나 하고 올까.”

“그럴까? 나도 마침 그런 생각이었는데…….”

결국,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연무장으로 몰려가는 검사들.

그들의 틈에는 데반 케네디도 있었고, 랄프 펜도 있었고, 이나시오 카라한도 있었다. 아이른을 비롯한 젊은 녀석들도 함께였다.

그리고, 그 모두가 진심으로 자신들의 노하우를 전수해 주었다.

아낌없이. 숨기는 것 없이.

비웃음을 머금고 그들을 따라갔던 쟈롯은, 한참이나 멍한 표정으로 연무장의 구석에서 그들을 바라보다가.

바라보다가.

계속해서 바라보다가…….

“미안하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디스의 앞에 다가가 정중히 말했다.

부끄러웠다.

무려 2배 이상의 세월을 산 자신이다.

그런 자신은 어린 후배에게 먼저 시비를 건 것도 모자라, 오해가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존심 때문에 구석에서 조용히 분노를 불태우고 있었다.

자쿠앙과 재회하여 어떻게든 녀석에게 복수할 생각만을 품고 있었다.

헌데, 주디스는 아니었다.

자신을 조롱했던 이들에게 용서를 베풀었고, 선의를 보였다.

그러한 선의가 120명이 넘는 검사들 사이로 번져 나갔고, 그들의 마음속에 있던 두꺼운 벽을 허물어뜨렸다.

모두가 웃고 있었다.

모두가 즐거워 보였고,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주디스 덕분이었다. 대회 최연소 참가자, 22세에 불과한 꼬맹이가 보인 아량이 만든 기적이었고, 선물이었다.

‘쓰레기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구나.’

그러한 선의가 돌고 돌아 자신의 마음에까지 도달한 순간, 쟈롯은 견딜 수가 없었다.

남부의 호랑이라고 거들먹거리던 주제에 길거리 양아치보다 못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한심했다.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쿠앙과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비겁한 겁쟁이가 되지 않기 위해, 그가 고개를 숙이며 재차 말했다.

“자쿠앙과 내가 자네에게 했던 무례한 말, 행동. 지금이라도 사과하지.”

“…….”

그 순간, 주디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대회 내내 으르렁거렸던 녀석의 사과였지만,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것이 자신의 호의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서 나온 선의가 돌고 돌아 악연의 고리를 끊고, 선순환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른이 자신을 보며 웃고 있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받은 마음을 그에게만 갚을 필요는 없었다. 타인에게 건네도 좋았다. 세상에 베풀어도 괜찮았다.

그것이 돌고 돌아, 언젠가 아이른에게도 흘러갈 테니까.

그 순간, 주디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파아앗-!

갑자기 넓어진 시야 속에 사람들이 들어왔다.

누군가는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누군가는 진지하게 조언한다. 그것을 웃는 얼굴로 지켜보는 이도 있으며,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 이도 있다.

이쪽을 쳐다보는 이도 있다. 몇몇이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쟈롯과 자신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 모든 이들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며칠이 지나면 달라질 수도 있는 마음이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온기가, 불꽃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놓지 마라.’

‘예?’

‘인연을 놓지 마라.’

‘…….’

‘나와는 다른 길을 걸어라. 친구도 놓지 말고, 연인도 놓지 마라. 크로노 검술관과의 끈도 놓지 말고, 검을 위해 앞으로 있을 모든 인연을 희생하지 마라. 욕심 부려라. 무엇 하나 손에서 놓지 말고, 다 끌어안고 가라.’

욕심 그득한 영감탱이의 말이라고 생각했던 스승의 마음이 새삼 떠올랐다. 그의 말이, 지금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맑았던 시야가 흐려졌다. 조금 더, 조금 더 진하게 쏟아지는 눈물과 함께 주디스가 미소를 지었다.

“어? 어어…….”

“뭐야? 당신, 무슨 말 했는데 애 상태가 이래?”

“아니, 나는 그저 사과만 했을 뿐인데…… 정말, 정말 애먼 짓 안 했다고.”

“그러면 우는 이유가…… 아니, 웃고 있잖아?”

“…….”

“…….”

“그렇게 쳐다봐도 모른다고. 이해하기 힘든 건 나도 마찬가지야.”

쟈롯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헐레벌떡 뛰어왔던 브랫 로이드가 그의 멱살을 쥐려다, 애매하기 그지없는 주디스의 표정을 보고 일단 질문을 던졌다.

연인의 상태가 미묘해서 제대로 된 판단이 안 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디스는 계속해서 웃었다. 입꼬리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모습에 검술에 푹 빠져 있던 검사 대부분이 그녀를 쳐다봤다.

부끄럽지 않았다.

소매로 눈물을 스윽 닦아 낸 불꽃의 검사가, 쟈롯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악수나 합시다.”

“…….”

“나도 말이 조금 셌어요. 미안해요.”

“……나야말로 미안하네. 자쿠앙을 만난다면, 그쪽에도 잘 말해 두겠네. 둘이서도 잘 풀었으면 좋겠군.”

“그랬으면 좋겠네요.”

맞잡은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홀로 괴로워하며 키워 냈던 열기보다 더욱 커다란, 추워지는 날씨를 잊게 만드는 연무장의 불꽃.

그 중심에 서 있는 주디스를 보며, 아이른 파레이라가 다시금 상생(相生)에 대해 생각했다.

* * *

연회가 끝났다. 언제부턴가 연무장으로 장소가 바뀌긴 했지만, 아무튼 끝이 났다.

용사의 제전 참가자들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각자의 갈 길을 갔다.

물론 지금의 인연이 이대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진짜 오려고?”

“그럼 가짜인 줄 알았소? 나는 애초에 적을 둔 곳이 없소. 이참에 동부 구경이나 몇 년 할까 생각 중이오.”

“뭐, 그러시게.”

“하하, 좋아. 참한 아가씨 소개시켜 준다는 말, 잊지 마시오.”

“아니, 내가 언제 그런 말을…… 게다가 자네 나이에 아가씨는 너무한 것 아닌가?”

“큼흠, 혹시 나는…….”

“…….”

이나시오 카라한과 랄프 펜, 데반 케네디는 대회 이후에도 연을 이어 갈 생각인지, 나름 화기애애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자기들끼리 사라졌다.

따로 술이라도 더 마시려는 듯한 모양이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각자 친해진 이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자기들만의 뒤풀이를 이어 가는 모습이었다.

유일하게 쟈롯만이 곧바로 숙소로 돌아갔는데, 내일 아침 바로 아빌리우스를 떠날 생각인 듯했다.

자쿠앙을 찾아 나설 모양이었는데, 그의 분위기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좋아 보였다. 후련해 보인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역시, 우리끼리 있는 게 제일 편하긴 하네.”

“음. 맞다.”

아이른 파레이라, 일리아 린제이, 주디스, 브랫 로이드.

이번 대회의 흥행에 크게 이바지한 4인방 역시 따로 모였다. 장소는 그대로였다.

참가자들이 모두 떠나간 연무장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무언가 대회 마무리에 대한 감상이라도 읊조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음에도 이런 자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또 대회가 열린다면, 이번에는 더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잠깐의 정적을 뚫고, 주디스가 입을 열었다.

평소의 거친 말투가 아니었다. 자신의 포부를 당당히 말하면서도, 따스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오늘의 주디스는 뭔가 달랐다. 먼저 나서서 타인과 어울리던 것도 그렇고, 자기 생각을 이렇듯 솔직히 표현하는 것도 그렇고…….

“뭔가 반쯤 깨달음을 붙잡은 느낌이야. 아마 스승님을 만나고 나면 확실히 성취가 있을 것 같은데, 나 어떡하냐?”

“뭐가?”

“여기서 더 강해지면, 이렇게 빨리 강해지면…… 세상이 나를 감당할 수 있을까?”

“…….”

“아쉽네. 대회가 1년만 뒤에 치러졌으면, 우승자가 바뀌었을 텐데.”

“연인끼리 닮아 가네.”

“그러게. 브랫, 네가 주디스 물들였어?”

“아니…….”

자신감 넘치는 주디스의 말에 아이른, 일리아가 브랫을 나무랐다.

브랫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말을 꺼낸 건 주디스인데, 공격받는 것은 자신이라니. 너무 황당해서 뭐라고 반박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났다.

허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반박은 어느새 그들 곁으로 다가온 흑발의 검사로부터 나왔다.

“그건 불가능하노라.”

“음?”

“이그넷…….”

“…….”

“불가능하다고?”

“그래. 1년으로는 턱도 없지. 그리고 브랫 로이드, 이 건방진 것. 성왕께 하사받은 성을 떼놓고 부르다니. 죽고 싶은 것이냐?”

“아니요.”

“아님 말거라.”

브랫과 말을 주고받은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털썩 자리에 앉았다.

다가올 때까지만 해도 거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건만, 막상 눈에 들어오자 공기가 무거워진 듯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허나 이에 부담을 느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브랫 로이드도.

주디스도.

일리아 린제이도.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도.

모두가 주눅 든 모습 없이 신성왕국의 흑기사단장을 바라보았고.

피식

슬쩍 웃음을 지어 보인 그녀가, 그녀답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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