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상생(相生) (5)
“사과를…… 하고 싶어서…….”
“…….”
“미안하외다. 대회가 시작되기 전, 나는 그대의 실력을 의심했소. 초대장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뒤에서 힐난하던 이들 중 한 명이었고…… 이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하고 싶었소. 이런 내 행동이 또다시 그대를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 으음.”
용기 내 사죄의 말을 전하던 1회전 탈락자 드와이트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주디스 때문이 아니었다. 브랫 로이드의 기세 때문이었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상당한 압박으로 다가왔다.
‘왜, 왜 그러지?’
다행히 계속 그러지는 않았다. 이내 기세를 거둔 브랫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기 주변과 대화를 이어 갔다.
허나 그 짧은 시간만으로도 드와이트는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이게, 8강 진출자의 위엄…….’
이번 대회 다크호스의 실력을 재확인한 그가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다시금 부끄러움이 피어났다.
16강에서 떨어지긴 했지만,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는 브랫 로이드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알려진 존재다.
그런 이를 대상으로 기껏해야 1회전 탈락자인 자신이 나불나불 헛소리를 지껄였으니, 민망함과 미안함에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음, 어, 그러니까…….”
드와이트가 말을 더듬었다.
이미 사과는 끝냈다. 하지만 깔끔하게 말을 맺을 기회를 놓쳐 버린 탓에 어정쩡한 상황에 놓였다.
그런 와중에 주디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견디기 힘든 중압감이 피어났다.
그의 뒤에 있던 몇몇 참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드와이트와 마찬가지로 주디스를 무시했던, 그렇기에 그녀의 진짜 실력이 드러난 지금에서는 송구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던 와중이었다.
가장 먼저 용기를 내진 못했지만, 분위기에 편승해서나마 지난날의 잘못을 사과하려던 상태였다.
주디스가 그들 모두에게 시선을 보냈다.
오러도 뿜어내지 않고, 불 같은 성질을 드러내지도 않고.
오히려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상대를 훑어보던 그녀가 입을 연 것은, 30초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됐고.”
“…….”
“검술 얘기나 하죠.”
“……?”
“……?”
“시, 싫으면, 말고.”
주디스가 됐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난감했다. 조금 부끄럽기도 했고,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생각이 안 났다.
물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을 흉봤던 이들이 짜증 났던 게 사실이지만, 이렇듯 먼저 찾아와 사과를 건네고, 그것도 모자라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자니 마음속에 묘한 간질거림이 느껴졌다.
그러나 마냥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하하 호호 하기는 힘들었다.
그렇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꺼지라고 면박을 줄 마음도 사라졌다.
결국, 지금의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할 수 있는 화제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녀가 평생토록 노력해 왔고, 사랑해 왔던 것. 검술.
물론 저쪽에서 별 관심이 없다면야, 그냥 이대로 각자의 갈 길을 가도 상관없지만…….
“시, 싫지 않소!”
“그, 그렇소! 싫지 않소! 절대, 절대 싫지 않아! 오히려 환영이야!”
“그렇고말고! 나는 세상에서 검술 이야기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야!”
“나, 나도…… 그, 그리고 아직 말을 못 했는데, 나 역시 미안하오. 아! 나는 2회전에서 그대와 겨루고 패배한 콜트 스미스라는 사람인데…….”
“아 그렇지! 나, 내 이름은 드와이트고…… 아무튼 좋소. 너무 좋소! 부디 나와 함께 검술에 대한 심도 깊은 이야기를…….”
“……그, 그래요.”
주디스가 반 걸음 뒤로 물러서며 대답했다.
생각보다 훨씬 흥분한 아저씨 검사들의 모습이 약간 부담스러웠지만, 직전의 분위기보다는 훨씬 나았다.
무엇보다 저들 역시 자신만큼이나 검술에 푹 빠진 자들이었다.
첫인상은 서로 좋지 못했을지언정, 그러한 불편함을 뛰어넘을 정도로 비슷한 점이 많은 족속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으음, 그때 내가 어떻게 했더라? 아, 맞네. 이건 이렇게…….”
“그렇군, 그렇군!”
“아아, 이거 알 것 같으면서도 아리송한데.”
“허어, 본능에 더 치중된 타입이라 생각했건만, 이론적으로도 굉장하시군.”
“이거 참, 지금까지 너무 낡은 방식에 치우쳐 있었던 건가…….”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꽃이 피어났다. 거기에 더해 웃음꽃도 피어났다.
자신들보다 훨씬 대단한 강자와 검에 관한 토론을 나누다니. 마스터를 제외하고는 상대가 없는 참가자들로서는 천금을 줘도 얻기 힘든 경험이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빨라졌고, 감정도 고양되었다.
어느덧 대화는 쌍방향이 아니라 일방향으로, 토론이 아니라 가르침의 형태로 바뀌었다.
그간 벽에 막혀 있었던 검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질문을 쏟아 냈고, 주디스는 성심성의껏 이를 받았다.
크로노 검술관에서 브랫과 함께해 왔던 논검(論劍)이 도움이 되었다.
생각보다 이해하기 쉽게 자신의 노하우를 전하는 그녀를 보며, 중년인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물론 한계는 있었다.
논검 역시 그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기연이지만, 아무래도 직접 검을 나누는 것보다는 부족하다.
모두가 일반 상식과는 궤를 달리하는 주디스의 검술을 당장이라도 펼치고 싶어 했다.
보여 주고 싶어 했고, 그 과정에서 있을 미숙함을 이 붉은 머리 검사가 봐 주길 원했다.
“으음, 너무나도 아쉽군.”
“그러니까. 이곳이 연회장이 아니라 연무장이었다면…… 헙.”
그런 마음이 너무 강했음인가.
넷 중 가장 신나서 말을 쏟아내던 드와이트가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입을 닫았다.
실례였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말로 가르침을 받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은혜였으며, 동시에 민폐였다.
이 정도로 수준 높은 검술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공유하는 것은, 사실 검술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검술관에 입관하거나 정식으로 사제의 연을 맺은 것도 아니건만, 여기에서 더 많은 것을 바라는 말을 하다니. 그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가죠.”
“……?”
“……!”
헌데, 주디스의 입에서 예상외의 발언이 튀어나왔다.
모두가 놀랐다.
드와이트의 발언에 오랫동안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던 그녀였기에 더욱 그랬다.
다른 참가자들은 안절부절못한 모습으로, 혹시나 지금의 인연이 좋지 못한 형태로 끝날까 봐 걱정하던 상황이었다.
헌데, 쫓겨나기는커녕 진짜로 연무장으로 이동하자니. 직접 검을 섞자고 하다니.
귀가 입에 걸린 그들이 한마음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장 가시죠!”
말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혹여나 생각이 바뀔까, 굽신굽신한 모습으로 주디스를 앞세워 연무장으로 이동하는 참가자들.
그 중심에 있는 주디스를 지켜보며, 아이른과 일리아, 브랫이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 * *
후우웅-!
‘많이 변하긴 했구나, 내가.’
연회장에서 연무장으로 이동한 주디스가, 용사의 제전 참가자들에게 검을 가르치며 생각했다.
원래의 자신은 이렇지 않았다. 성격이 더러웠고, 이기적이었다.
어렸을 적 빈민가에서부터 그랬다. 어쩌다가 빵 한 덩이라도 생기면 배가 터지더라도 혼자 다 먹어야 했다.
정 못 먹겠으면 숨겨 놨고, 그조차 여의치 않으면 버리는 게 마음이 편했다.
타인은 모두 적이었던 그녀에게 있어서, 이타심이란 쓸데없는 것에 불과했다.
그랬던 자신이, 크로노 검술관에 입관하고부터 달라졌다.
중간 평가 때, 입상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구해 냈던 아이른 파레이라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식 수련생이 된 이후, 먼저 다가와 논검을 제안했던 브랫 로이드의 얼굴도 떠올랐다.
일리아 린제이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무시했던 아이른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민 것이 그녀였다.
셋과 친해진 건 그래서였다. 자신이 잘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먼저 다가와 줬기에 마음을 열었다. 그들이 먼저 베풀었기에 함께일 수 있었다.
‘언젠가, 이 쓸데없이 착해빠진 녀석들에게 나도 무언가를 건넬 수 있기를.’
말은 안 했지만, 주디스가 항상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러한 마음이 더 넓은 이들을 향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후웅-
후우웅-!
“허어, 그렇군. 세련된 정제도 좋지만, 오히려 거기에 너무 얽매여서 보는 손해도 적지 않았어. 오러 소드를 발현하려는 이유는 결국 강해지기 위함인데, 어느 순간부터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야.”
“그 말이 맞소. 너무 좁은 시야에 갇혀 있었어. 허어, 주디스, 그대 덕분에 생각이 넓어지는 기분이오.”
“감사하오, 감사하오!”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빚을 갚아야 할 이들은 브랫과 아이른, 일리아다.
이안과 케이라 핀, 쿤, 쿠바르, 루루, 그밖에도 자신에게 먼저 마음을 쏟았던 검술관의 동기들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중년 검사들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건넨 것이 없다.
그런데도 자신은 베풀었다. 먼저 베풀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상하게도 기분 좋았다.
“흐음, 답답하던 차에 잘 됐네.”
“역시 검사에게는 연회장보다 연무장이 어울리지.”
“맞는 말이다.”
주디스 파티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연무장은 용사의 제전 참가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데반 케네디와 랄프 펜이 가장 먼저 그녀를 따랐고, 그들의 추종자인 동부 검사들이 뒤를 이었다. 이윽고 연무장 곳곳에서 검을 교류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니,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이봐, 거기! 그래! 그렇지! 아니…… 하, 답답하네!”
“잘 보고 따라 하라고. 여기서는 이렇게…….”
이나시오 카라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낌없이 각자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분위기에 처음에는 불편함을 토로하던 그였으나, 지금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주변인들을 가르쳤다.
말은 거칠면서도 행동은 따스한 그의 모습에 랄프 펜이 웃음을 흘렸다.
몰아치는 칼바람에도 불구하고 연무장의 분위기가 점점 더 따스해졌고, 그 사이에 브랫과 아이른, 일리아 역시 녹아들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용사의 제전 참가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숨기는 것 하나 없이 서로의 지식과 기술을 나누고 있었다.
“…….”
주디스는 조용히 지금의 풍경을 바라봤다.
여전히, 잘 이해가지 않았다.
어째서 자신은 연인이 아닌, 친구가 아닌 이들에게 호의를 베푼 것일까.
어째서 다른 이들이 그런 자신의 행동을 따라 한 걸까. 어째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른의 미소가 저처럼 맑고, 밝아 보이는 걸까. 그를 위한 행동이 아니었는데. 그에게 베푼 선의가 아니었는데.
……그렇듯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자신이 만든 흐름을 구경하는데,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녀가 신형을 돌렸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남부의 호랑이, 쟈롯.
자쿠앙의 의형제이자, 자신과는 악연으로 엮인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분이 나쁘진 주디스의 표정이 자연스레 구겨지려는 순간이었다.
“미안하네.”
“…….”
“자쿠앙과 내가 자네에게 했던 무례한 말, 행동. 지금이라도 사과하지.”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쟈롯.
그러한 태도에서,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진심.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붉은 머리 검사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