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상생(相生) (4)
“이그넷…….”
“오, 오오!”
“이겼다! 이그넷 크레센시아 경이 이겼어!”
“괜찮은가? 상대는 괜찮은거야?”
“별 탈 없는 것 같은데? 정신을 잃은 것 같기는 한데…….”
“허어, 무대가 흔적도 없네. 아니 그냥 지면 자체가 날아갔잖아?”
“괴물 같군, 둘 다…….”
제트 프로스트의 탄식 섞인 중얼거림을 필두로, 관객석에서 조금씩 결과에 대한 반응이 새어 나왔다.
누군가는 기뻐했고, 누군가는 안타까워했다. 허나 결승 무대에 선 두 검사가 대단하다는 점에서는 모두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박살 난 무대가 증명했다. 지아 룬텔을 비롯한 이들의 보호가 없었더라면, 아마 경기장이 통째로 날아갔을 터였다.
그런 무지막지한 경기 내용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패자인 아이른 파레이라가 정신을 잃은 채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품에 안겨 있긴 했으나,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키릴 파레이라의 반응이 이를 증명했다.
아쉬운 와중에도 수고했다고, 최고였다고 박수를 쳐 주는 그녀를 따라 다른 이들의 입에서도 환호가 쏟아졌다.
“아이른, 고생했다!”
“아이른 파레이라! 아이른 파레이라!”
“이그넷 크레센시아! 신성왕국의 자랑!”
“둘 다 최고야! 대륙은 안전하다!”
“꺼져라, 악마 새끼들아!”
“맞아, 마계로 썩 꺼져! 대륙의 미래는 밝다고!”
열광적이다.
희망적이다.
단순히 훌륭한 검사들 사이의 멋진 경기를 본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의 검투로부터 관객들은 미래를 봤고, 희망을 봤다.
대회의 취지에 정확히 부합하는 분위기를 보고 성왕이 기꺼운 듯 웃었고, 지아 룬텔도 썩 나쁘지 않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였다. 다른 신성왕국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다.
경기장의 중앙, 가장 가까이서 이그넷과 아이른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율리우스 휼이 생각했다.
‘……굉장히 위험했다.’
정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누가 이길지가 궁금하여 손에 땀을 쥐었겠지만, 율리우스 휼은 아니었다.
승리는 이그넷의 것이 분명했고, 아이른이 이를 얼마나 잘 받아 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솔직히…… 받아 내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 이그넷의 오러에 휩쓸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그렇기에 움직이려 했다.
자신이 한 달쯤 전에 확인했던 것보다도 훨씬 강한 이그넷의 최후 일격에 소름이 돋았기에, 경기가 중지되더라도 난입하려 했다.
대륙의 미래는 많을수록 좋다. 아무리 좋은 취지의 대회라고 한들 이런 리스크를 떠안으면서까지 강행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달려나가려는 그를 크로노의 주인인 이안이 막았다.
결과적으로는 옳은 판단이었다.
후우우우우욱-!
오행신공은커녕 정령에 대한 지식조차 많지 않은 율리우스 휼이다.
허나 그런 그조차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다섯 가지 기운이 명료히 느껴졌다. 허나 그것은 제각기 분리되어 날뛰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때로는 상생하고, 때로는 상극하며 외부의 거대한 힘을 해소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풍경이었다.
태양이 지면에 떨어지듯 막대한 충격량을 모조리 흩어 버리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해냈다는 미소를 지은 뒤, 힘이 다해 앞으로 쓰러졌다. 이그넷이 빠르게 움직여 바닥에 부딪히려는 그를 살포시 받아냈다.
율리우스 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환호와 함성 속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침묵으로 보냈던 그가 이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막았소?”
이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로서도 당시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한 가지가 아니었다.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얽히고설켜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허나 굳이 그것을 단어로 내뱉자면…….
“믿음이지.”
“…….”
“제자에 대한 믿음. 그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구만.”
“그런 무책임한…….”
“뭐, 100년을 검사로 살아온, 50년을 검술 스승으로 살아온 자의 감이라고 해 두지. 아이른과 나 사이의 유대감도 한몫했을 것이고. 자네야 잘 이해 안 가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편이 나을 거로 생각했네. 제자가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승의 노파심 때문에 날려 버리는 건, 너무한 일이지 않나.”
“…….”
“아이른 이야기는 이제 됐고, 흑기사단장에 대해 말해 보지. 어떤가, 괜찮은 것 같은가?”
검술관주 이안이 목소리를 낮춘 채 물었다.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분위기가 평소와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질문을 받은 율리우스 휼 역시 그녀를 쳐다봤다.
확실히 그랬다. 원래라면 싸움 상대에게 한없이 냉정하기만 했을 그녀가 먼저 다가가 아이른을 부축한 것도 그렇고,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찡그린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그렇고. 확실히 이번 대결이 많은 혼란을 불러온 모양이다.
그러나…….
“걱정할 거 없습니다.”
씨익 웃은 율리우스 휼이 대답했다.
이제 알 것 같았다. 왜 이안이 자신을 막았는지.
그가 제자인 아이른 파레이라를 믿은 것처럼.
자신 역시 부하이자 제자인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신뢰했다. 지금의 혼란이 슬럼프가 아니라 더 큰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작용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안의 제지는 꽤 의미가 컸다.
늙수그레한 대머리 검사 쪽으로 신형을 돌린 아빌리우스 최고의 기사가 정중히 예를 표했다.
“고맙소. 흑기사단장의 성장을 막을 뻔했던 날 멈춰 줘서.”
“……허허. 검술은 몰라도, 제자 가르치는 건 아무래도 내가 더 경험이 많지 않은가. 뭐 신세 졌다고 생각하면,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세.”
“원래는 술을 하지 않지만, 관주와 함께라면 기꺼이 마시리다. 물론…….”
율리우스 휼이 어딘가를 바라봤다.
경기장 밖의, 그보다도 훨씬 멀리 떨어진 곳에 음험하게 숨어 있을 어두운 존재들.
그들을 머릿속에 떠올린 늙은 성기사가, 씹어 뱉듯이 말했다.
“……더러운 악의 무리를 전부 쓸어버린 후에 말이오.”
“옳은 말이오.”
이안 검술관주가 근엄한 목소리로 이를 받았다.
그랬다. 대륙의 미래는 밝으나,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어둠이 사라진 것은 절대 아니었다.
현시대를 이끌어 가는 두 거인이 새로이 마음을 다졌다.
밝은 얼굴로 환호를 보내는 관객들을 보며, 더욱 열심히 각자의 검을 갈고닦을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일리아는,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을까?’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품에 폭 안겨 있는 자신의 친구이자 친구의 연인, 아이른 파레이라를 바라보며.
브랫 로이드가 이런저런 망상을 떠올렸다.
그렇게 모두의 기대 속에 시작했던 용사의 제전이 성대히 막을 내렸다.
* * *
마침내, 한 달가량 이어졌던 대륙 최고 규모의 검투 대회, 용사의 제전이 마무리되었다.
허나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신성왕국은 여전히 떠들썩했다. 여운이 가시지 않았던 탓이다.
신성왕국의 당초 뜻대로 대륙의 희망을 보러 왔던 사람들도,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그저 강한 검사들을 구경하러 왔던 사람들도, 그저 화제가 되니까 휩쓸려서 따라온 사람들도.
하나같이 멋들어진 모습을 보여 줬던 참가자들 이야기로 매일같이 이야기꽃을 피웠다.
식당과 여관은 여전히 꽉꽉 들어찼고, 주점들 역시 밤늦게까지 영업을 이어 갔다.
마치 악마라고는 나타났던 적도 없는 것처럼 활기차게 변한 사람들의 마음과, 이를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는 수도의 경비병들.
대회는 끝났지만, 축제는 여전히 이어져 대륙에 따스함을 전파하고 있었다.
비단 관객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참가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혹시라도 있을 사소한 부상마저 완벽하게 치료했다는 확신을 가진 뒤, 아빌리우스의 주최로 성대하게 벌어진 뒤풀이 연회.
비록 우승자인 이그넷 크레센시아는 개인적인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러한 아쉬움을 달래 줄 이들이 여전히 많았다.
“아이른 파레이라 경! 정말 굉장한 검이었소!”
“듣기로는 오크족의, 그것도 대전사 카라쿰께서 이끄는 두르칼리 부족의 오행신공을 익히셨다고…….”
“카라쿰께서는 부족장 자리를 내려놓으신 지 오래입니다. 현 족장은 타라칸 님입니다. 오행신공 부분은 맞습니다. 이안 관주님의 가르침과 지인들의 조언 역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말 많은 분들의 은혜로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허어, 어찌 이리 겸손할 수가…….”
모두의 예상을 뚫고 용사의 제전 준우승의 영예를 안은 헤일의 자랑, 아이른 파레이라의 주변에 참가자들이 몰려들었다.
주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고난 분위기와 성정이 온화한 그에게 많은 이들이 몰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일리아 린제이 경! 이그넷 크레센시아 경과의 시합에서 보여 주었던, 그 마지막 기술…… 혹시 초대 가주의 그 기술이 맞는…….”
“맞습니다. 아직 미완성이긴 하지만요.”
“허어, 이럴 수가. 진짜였다니…… 이봐! 제런! 여기 와 보게. 아, 이런! 너무 흥분했다 보니 실례를…… 시끄러운 것이 싫다면 내 물러나리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 그렇다면 조금 더 이야기를…….”
‘음, 일리아도 낯 가리는 모습은 아니네. 하긴, 요즘은 예전 같은 모습은 아니긴 하지.’
주디스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대인기피증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사람을 피했던 일리아였지만, 이제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아이른과 너무 심한 애정행각을 벌일 것이 걱정이었지, 이런 쪽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피식 웃은 그녀가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자신의 연인, 브랫 로이드의 모습이 보였다.
강대국인 거베라 왕국의 고위 귀족답게 부드럽고 예의 바른 태도로 여럿과 어울리는 중이었는데, 그것이 좋으면서도 왠지 조금 그랬다.
문득 쓸쓸한 기분을 느낀 그녀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런 곳은 나와는 어울리지 않지.’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사교성 좋은 브랫 로이드.
누구라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선한 인상의 아이른 파레이라.
그들 둘에 비해서는 차가워 보이지만, 린제이 가문이라는 훌륭한 배경을 등에 업은 일리아 린제이.
그런 그들과 자신은 다르다.
성격은 개판이고, 가문도 없다. 태생도 천하다.
물론 셋의 지인이다 보니 누구도 자신을 무시하지는 않겠지만, 마치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연회장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대회 전의 연회 때가 더 좋았는데.’
주디스가 자쿠앙과 시비가 붙었을 때를 떠올렸다. 무척 기분이 더러웠지만, 차라리 그때가 좋았다.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크로노 검술관의 동기들, 혹은 스승인 쿤과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한창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그녀가 빠르게 신형을 돌렸다.
“뭐죠?”
“헉!”
“왜요? 혹시 나한테 말 걸려고?”
“어, 어…….”
주디스가 무뚝뚝한 말투로 물었다.
설마 나에게 말을 걸겠어? 하는, 순수한 의문을 품은 말이었으나, 좋지 않은 기분 탓에 겉으로는 사나운 표정이 드러났다.
대회 1회전 탈락자였던 드와이트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이겨 냈다. 버텨 냈다.
그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검사로서. 인간으로서.
30대 초반의 나이로 대륙 10대 검사에 버금갈 정도의 강함을 손에 넣은, 대륙 최고의 천재 이그넷 크레센시아!
그런 그녀를 순간이나마 몰아붙였던, 대륙 최강의 엑스퍼트!
그녀의 독기 가득했던 모습을 떠올리자, 어느새 그의 가슴에도 뜨거운 불꽃이 피어올랐다.
존경의 눈빛을 보낸 드와이트가 침을 꿀꺽 삼킨 뒤, 주디스에게 말했다.
“사, 사, 사…….”
순간, 브랫 로이드의 시선이 홱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