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상생(相生) (3)
무언가를 시작할 때, 처음부터 그에 대한 능력이 출중한 사람은 없다.
이것은 재능의 유무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둔재와 범인과 천재는 노하우를 쌓아 가는 속도에서 차이가 날지언정, 0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아이른 파레이라는 달랐다. 15살의 봄, 요술처럼 찾아온 전생의 꿈을 통해 검을 들기도 전부터 감당할 수 없는 기운을 품게 되었다.
‘커다란 행운이었지.’
물론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전생의 자신이 수십 년간 쌓아 왔던 ‘철’의 기운은 아이른에게 검에 대한 의지를 불어넣었다.
그로 인해 남들보다 훨씬 빠르게 몸을 키울 수 있었고, 검술을 익힐 수 있었다.
오러 역시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쌓아 나갔다.
허나 그것을 주도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닌, 카렌 윈커의 의지였다.
쇠말뚝처럼 묵직하고, 투박하고, 거대하기까지 한 기운을 다루기 위해 그는 긴 여정을 떠나야만 했다.
금속을 자신이 다룰 수 있는 형태로 가다듬기 위한 ‘불꽃’을 찾기 위한 여정 말이다.
‘그런데, 불을 찾은 다음에도 끝이 아니었어.’
그랬다. 불은 끝이 아닌 통과점이었다.
일리아 린제이로부터 잉태하여 이그넷 크레센시아로 인해 더욱 크게 지펴진 불꽃은, 이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져 갔다.
마음을 불태우는 화마를 다스리기 위해 아이른은 ‘물’의 검을 익혀야만 했다.
고여서 썩어 가는 물이 아닌 흐르는 물을 얻은 후에도 멈출 수 없었다.
아이른은 더는 혼자가 아니었고, 수많은 사람과 교류해 나갔다. 많고도 넓은 물줄기를 감당할 수 있는 넓은 ‘땅’이, 단단하고 안정된 대지가 필요했다.
쇠(金), 불(火), 물(水), 땅(土).
그리고 마지막으로 솟아난, ‘나무(木)’와 같은 곧고도 높은 신념.
파레이라 영지에서 비롯되어 두르칼리 부족에서 개념을 쌓았던, 그 후에도 계속해서 정진해 왔던 ‘오행신공(五行神功)’은 10년이라는 세월 끝에 비로소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이그넷 크레센시아와 재회한 아이른 파레이라는 이를 느꼈고.
지금까지의 방식과는 다른 흐름으로 기운을 운용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후우.”
‘할 수 있어!’
금발의 검사가 전방을 바라봤다.
불꽃이 날아온다. 엄청난 물리력과 열기를 품은, 재앙과도 같은 오러의 폭격이 쏟아지려 한다.
겁먹지 않았다.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성장의 기회로 삼았다. 4년 전, 처음으로 그녀를 만나 받았던 충격을 떠올렸다.
2년 전 광대 악마의 던전에서 느꼈던 투쟁심도, 1년 전의 패배로부터 느꼈던 분함도 되새겼다.
그러한 마음이 쏟아지는 적색 폭격과 맞닿는 순간,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아이른의 내면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아아앙-!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강하게 피어난 불꽃이 아이른의 심상 세계를 거칠게 휘몰아쳤다. 사납게 뻗어 나가는 불길이 혀를 낼름거리며 이곳저곳을 달구어 댔다.
아프지 않았다.
괴롭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감당할 수 없는 열기에 몸과 마음이 상했겠지만, 지금의 아이른은 달랐다.
이미 넓고도 안정된 대지를 일구어낸 그에게, 지금의 불꽃은 축복과도 같았다.
우우우웅, 화기(火氣)를 받은 토기(土氣)는 단단해져 멋들어진 그릇이 되었다. 그 어떠한 것이라도 능히 품어 낼 수 있을 만큼 든든한 기운이었다.
즈으으응-!
땅 다음은 쇠였다. 넓고도 깊은 대지의 틈에서 금속이 피어났다.
너무나도 거대해서 들고 있을 힘조차 부족했던,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마음이 휘청거렸던 아이른은 이제 없었다.
오히려 더 원한다는 듯,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당당했다.
왠지 날 보고 웃어 주는 것 같아.
카렌 윈커의 모습을 떠올린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씨익 웃은 금발의 검사가, 이제는 다음 기운인 물을 끌어오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행운이 나타났다.
금속의 기운으로 인해 알알이 맺히는 물방울.
그것이 자신의 내면에서만이 아니라 외부에서, 관객석에서.
그보다 멀리서, 마법 화면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로부터 세차게 흘러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콸콸콸콸콸
아이른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허나 나쁜 의미는 아니었다. 그 안에는 민망함도 담겨 있었고, 뿌듯함도 담겨 있었다.
자신을 응원하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별한 인연으로 엮인, 그렇기에 조금 더 진한 마음을 쏟아 주는 사람들.
자신과 함께 고된 1년을 보냈던 크로노 검술관의 사람들과.
알하드 산채를 함께 통과했던 상인들과.
오크의 영역에서 도적떼와 함께 싸웠던 인연들과.
신성왕국까지 오는 와중에 함께했던 에단, 쟈린을 비롯한 4인의 모험가들.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사건으로 얽힌 이들이 보내는 진심을 느낀 그가 더 진한 미소를 지었고, 더욱 강하게 기운을 운용했다.
놓칠 생각은 없었다. 이그넷의 불꽃을 품었을 때처럼, 아이른은 한 방울의 마음도 흘리지 않고 모조리 품어 냈다.
물줄기는 점점 깊어지고 넓어져 거대한 강물이 되었고, 그 중심에 우뚝 선 나무가.
금발의 용사가 찬찬히 키워 왔던 거목이, 그러한 마음을 담뿍 머금고 또 한 번의 성장을 이루었다.
“……!”
직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렬한 기운이 날아들었다. 오러 구체가 아니었다.
세상을 쪼개 버릴 듯 날카롭고 흉험한 힘이 반월의 형태로 짓쳐들어 왔다. 자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공간을 찢고 달려들었다.
겁나지 않았다.
주눅 들지 않으려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알 수 있었다. 저 정도로는 자신을 무너뜨릴 수 없다.
확신에 찬 아이른의 눈에서 금빛 기운이 흘러나왔다.
대검의 오러 역시 찬란함을 더해 갔고, 그러는 와중에도 다섯 가지 기운은 끊임없이 순환하며 상생(相生)했다. 계속해서 기운을 불려 갔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검을, 휘둘렀다.
꽈과과과과과광-!
“…….”
“…….”
“…….”
투두둑
투둑
휘이이잉-
정적이 찾아왔다.
활화산처럼 오러의 구체를 쏘아 내던 이그넷도, 충격적인 광경에 할 말을 잃은 평범한 관객들도, 그들보다도 더욱 놀란 5대 검술가주를 비롯한 마스터 급 검사들도. 모두 넋이 나간 모습으로 황폐해진 무대를 지켜봤다.
쓰러지지 않았다.
자욱하던 흙먼지 사이로 황금의 빛줄기가 하나둘씩 새어 나왔다.
보는 이의 마음을 뭉클하게 할 정도로 따스하면서도, 강인함 역시 느껴지는 힘이 기운을 더했다.
이윽고, 완전하게 드러난 시야 속에서 자세를 갖춘 아이른 파레이라가 입을 열었다.
“이제부…….”
퍼벙!
퍼퍼퍼펑-!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다시금 기운을 끌어올린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몸에서 더 많은 오러의 구체가 쏟아졌다.
그냥 날아든 것도 아니었다. 목표지점에 도착할 즈음 알아서 터져 버리는, 그리하여 더욱 치명적인 파편이 되어 쏘아지는 정교한 컨트롤을 보며 몇몇 관주들이 혀를 내둘렀다. 나이 지긋한 그들조차도 저것을 막아 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허나 아이른은 가능했다.
그가 거대한 검을 부드럽게 회전시켰다.
오러 방패(Aura Shield)가 아니었다. 이나시오 카라한 때와 비슷한 형태지만, 그보다 훨씬 위력적인 공격이다.
정면으로 맞부딪혔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 있었다.
흐름에 집중했다.
다섯 가지 기운을 상생의 묘로 순환시키듯, 그저 흐름에 집중했다. 상대의 세계가 아닌 자신의 세계에 집중했다.
그러자 매섭고도 날카롭게 짓쳐들던 오러의 파편들이 힘을 잃었다.
기세등등하게 상대를 쓰러뜨리려던 의지가 무력화되고, 아이른이 펼쳐내는 원의 흐름속에 편입되었다.
강해진 불꽃은 또다시 대지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금속을 피워 냈다. 그로 인해 물방울이 맺혔으며, 나무가 자라났고, 또다시 불꽃이 세를 더했다.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아이른 파레이라는, 전야까지 그녀가 생각했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그런 존재가 되어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집중하자.’
이그넷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오행신공을 익힌 적은 없다. 하지만 그 원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불꽃, 대지, 금속, 물, 나무. 오크족의 관점으로 해석한 세상의 다섯 기운을 다루는 것.
때로는 과도한 기운을 억제하여 균형을 되찾기도 하고, 반대로 미약한 기운을 북돋아 줘서 성장을 꾀하기도 하는. 조화와 순환을 중심으로 하는 오러의 운용 방식.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구나. 이것이 오행신공의 진면목인가.’
갑자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1년 전, 대륙의 수많은 강자와 대련하며 경험을 쌓아 갔을 때, 대전사 카라쿰에게 도전하지 않았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물론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믿었다.
여전히 자신이 훨씬 강하다 생각했고, 열기를 품은 오러 구체와 파편을 모조리 흡수하는 아이른의 괴물 같은 모습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파훼할 방법을 생각해냈다.
‘흐름을 깨 버릴 정도로 강력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기운.’
즉, 상생의 원(Circle)이 깨져 버릴 정도로 거대한 힘을 쏟아부으면 그만이다.
그녀가 생각을 마쳤다. 짧게 호흡을 가다듬은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몸에서 또 한 번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화르르르륵-!
“어, 어어?”
“떠오른다!”
관객들이 웅성거렸다. 하늘 위로 스르륵 떠오르는 흑기사단장 때문이었다.
지금껏 이런 모습을 보여 준 이는 바람의 힘을 다루는 일리아 린제이밖에 없었다.
허나 놀람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태양이 하늘에 떠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듯, 당연하다는 듯이 솟구치는 이그넷의 모습에 사람들은 침묵했다. 그리고 아이른 쪽을 바라봤다.
“후우.”
이번에는 그 역시 긴장한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견뎌 냈다. 상생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봤다. 그의 몸에서도 상대만큼이나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붉은색과 황금색의 빛무리에 관객들 모두가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고, 마법사와 사제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보호막을 펼칠 준비를 갖췄다.
그 와중에 신성왕국 측의 성기사 한 명과, 검술관주들 측의 검사 한 명이 빠르게 몸을 움직여 무대 밑으로까지 내려왔다.
서로를 바라본 율리우스 휼과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만약의 경우에는…….”
“음, 나서도록 합세.”
그러는 와중에도 두 검사의 기운은 계속해서 강해졌다.
홀로 완벽한 듯 고고하게 떠 있는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모습도, 여럿의 손을 붙잡고 여기까지 성장해 온 아이른 파레이라의 모습도 모두 눈이 부셨다.
노인들은 괜히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후.
격돌이 벌어졌다.
───────────!
엄청난 충격파와 소음이 경기장에 휘몰아쳤다.
다행히 피해를 입은 이는 없었다. 마법사와 사제들, 거기에 룬텔의 왕까지 힘을 더한 이상 그런 불미스러운 일은 벌어질 수 없었다.
굉음 역시 보호막에 가로막혀 반감되었다. 여전히 귀가 얼얼하긴 했지만, 상해를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허나 폭발하듯 퍼져 나간 빛만은 어쩔 수 없었다. 관객들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중요한 순간으로부터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
“…….”
“…….”
더는 금속음도, 폭발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천천히 잦아드는 빛줄기와 흙먼지 속에서, 두 사람의 신형이 드러났다. 한 명은 우뚝 서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상대의 품 안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 있었다.
제트 프로스트가 꿀꺽 침을 삼킨 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용사의 제전 우승자의 이름이 낮은 목소리로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