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328화 (328/388)

◈ 107. 상생(相生) (2)

“아으으…… 어제 너무 많이 마셨나.”

턱수염이 덥수룩한 용병 하나가 여관에서 나오며 중얼거렸다.

원래는 그렇게까지 마실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있을 용사의 제전 결승전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빌리우스 토박이인 그는 아이른 파레이라에게도 가능성이 있다는 옆 테이블의 말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고, 이에 대한 언쟁을 벌이다가 새벽 늦게까지 과음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잘했어. 그냥 넘어갈 순 없었지. 암, 그렇고말고.’

뻐근한 어깨를 풀어 주며, 그가 생각했다.

물론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대단한 검사라는 것은 알고 있다.

어느 정도 양보를 했다고는 하나 캄린 레이를 상대로도 승리를 얻었고, 이나시오 카라한과 맞서서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아직은 안 된다.

이미 완성의 경지에 다다른 채, 대륙을 위해 실제로 악마들과 싸워 왔던 흑기사단장, 이그넷 크레센시아와 검을 맞대기에는 경험도, 실력도, 그 밖의 다른 면들도 모두 부족하다.

“하여튼, 크레센시아 님이 얼마나 대단한 줄도 모르는 외지인들이 이렇게 많아서야…… 응?”

다시금 어젯밤의 대화를 떠올리며 혼잣말을 내뱉는 턱수염 용병.

그런 그의 눈에,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들어왔다.

아이른 파레이라였다.

오늘의 주인공 중 한 명인 금발의 검사가 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대로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뭐지? 어째서 도보로…….’

지금까지의 모든 대회 참가자들은 경기장으로 이동할 시 마차를 이용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놓고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 수많은 관객이 달라붙을 것이 뻔한 일이기에.

이를 생각하면, 지금 아이른 파레이라가 보이는 행동은 그리 좋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컨디션이 저하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의외로 그에게 몰려가는 이들은 없었다.

아이른을 응원하는 이들도.

아이른의 반대편인 이그넷을 응원하는 이들도.

누가 우승하든 관심이 없어진 남부와 동부 출신 참가자들을 응원하던 이들도.

그저 바라봤다.

턱수염 용병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지?’

자연스레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깎아 준 목검을 들고 신이 나서 숲에 들어갔고, 몬스터를 만났던 적이 있다.

쩍 벌어진 입에 톱날처럼 솟아 있는 이빨, 이를 타고 뚝뚝 떨어지는 악취 나는 타액. 어릴 적의 용병은 발이 굳어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고.

촤아아악-!

‘괜찮니, 꼬마야?’

그런 그를 지켜 주었던 방랑기사의 모습이, 따스함이, 몬스터가 선사한 두려움과 공포보다도 더욱 진하게 마음속에 남아 있다.

턱수염 용병이 저렴한 가격으로, 가끔은 무료로 어린아이들의 의뢰를 맡아 주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상념을 끝낸 그가 재차 금발의 검사를 바라봤다.

기억 속의 방랑기사와는 전혀 다르다. 나이도, 키도, 얼굴도 아예 다른, 그저 마법 화면으로 몇 번 마주했을 뿐인 청년일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 느꼈던 따스함과 비슷한 정서가 마음을 통해 전해졌다.

“따라갈까?”

“그래도 되나? 방해 아니야?”

“에이, 옆에서 귀찮게 말 거는 것도 아니고, 그냥 조용히 지켜보는 건데. 그 정도는 되지 않겠어? 애초에 컨디션에 영향이 없다고 생각했으니 이렇게 걸어가는 거겠지.”

“그건 그래. 뭣보다…….”

“응. 계속 지켜보고 싶게 만드네.”

“그러니까. 조금 낯뜨거운 말이긴 한데…… 그 표현이 제일 정확한 거 같다.”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턱수염 용병이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어제 침이 튀기도록 설전을 벌였던, 아이른 파레이라를 응원하던 사람들.

그들이 조심스레 금발 검사의 뒤를 따랐다.

따스함을 품고, 편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그들을 보며 잠시 멍하니 있던 사내가.

“……나도, 따라가야지.”

마찬가지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턱수염 용병만의 행동이 아니었다.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 비슷한 따스함을 느끼고, 포근함을 품은 채 금발 검사의 뒤를 쫓았다.

멈추지 않았다. 인파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어져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이들이 아이른 파레이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느낀 뒤, 앞선 사람들처럼 행렬에 참여했다.

경기장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깜짝 놀랐다.

“우왓! 이, 이게 무슨…….”

“설마, 여기까지 걸어오셨습니까? 괜찮으신가요?”

“혹시라도 시비 걸거나, 무례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소란을 일으킨 것 같네요.”

아이른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나 지금의 행동에 후회는 없었다.

미소 지은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잊지 말자. 내가 우승하려 했던 건, 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야.’

잠시 착각했다. 우승은 어디까지나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생의 자신 덕에 이를 재차 깨달았고, 또 한 번 다짐하기 위해 거리를 걸었다. 사람들의 눈빛과 표정을 직접 마주하고 싶었다.

잊지 말자.

내가 세상에 나온 이유를, 내가 검을 든 이유를 말이다.

조그맣게 중얼거린 아이른 파레이라가 곁에 있는 연인과 친구들을 보며 말했다.

“고마워.”

“뭐가?”

“여기까지 같이 와 줘서. 이것저것 도와주고, 이끌어 줘서. 함께해 줘서.”

주디스가 물었고, 아이른이 답했다. 브랫은 잘난 듯이 웃었고, 일리아는 슬며시 연인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녀가 말했다.

“뽀뽀해 줄까?”

순간,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금발의 잘생긴 청년이 뒤를 돌아보았다.

일리아의 말을 들은 이들 중 몇몇이 날카로운 눈으로, 분한 눈으로, 서러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뜨끔해진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이기고 오면, 그때 해 줘.”

* * *

“시작한다.”

남부의 신성, 이나시오 카라한이 낮게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긴장과 흥분이 가득했다. 무대 위로 천천히 올라오는 아이른 파레이라를 보며, 그가 한 번 더 중얼거렸다.

“이긴다. 이길 수 있어. 나랑 싸웠을 때와 다르고, 캄린 레이 경과 싸웠을 때랑도 또 달라. 보고 있소, 선배들? 이거, 진짜로 가능성이 있다고.”

“……자네, 점점 말이 빨라지는 거 인지하고 있나?”

동부의 엘리트 검사 데반 케네디가 점잖게 지적했다.

처음에는 이 뱀을 닮은 사내를 음흉하고 음침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첫인상과 달리 꽤 솔직하고, 호불호가 확실한 사람이었다.

아이른 파레이라에게 꽂힌 이후로, 이나시오 카라한은 언제나 그를 응원했다.

대부분이 이그넷의 손을 들어 줬을 때도 열정적으로 그러한 의견들에 반박했고, 경기 당일인 오늘까지도 유명 배우를 사모하는 여인네 같은 모습으로 안절부절못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를 생각하면, 지금의 호들갑은 나름대로 자제한 모습이라는 생각도 조금은 들었다.

‘게다가, 아예 허무맹랑한 소리도 아닌 것 같다.’

데반 케네디가 무대 위의 아이른 파레이라를 주시했다.

확실히 뭔가 달랐다. 오늘의 그는 평소보다 더욱 여유 있어 보였고, 부드러워 보였다.

그런데도 절대 약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었다.

“……관객들의 분위기부터가 다르군.”

동부의 또다른 참가자, 랄프 펜이 조용히 읊조렸다.

정말이었다. 지금의 기묘한 분위기를 그들만 느낀 것이 아니었는지, 가장 시끌벅적해야 할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경기장이 차분했다.

이그넷을 지지하는 이들도, 아이른을 응원하는 이들도 알 수 없는 긴장감에 말을 아끼는 중이었다.

“어쩌면.”

랄프 펜이 다시 중얼거리다가, 입을 닫았다.

뒷말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나시오 카라한과 데반 케네디는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어쩌면, 대회의 마지막 이변이 결승전에서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렇듯 고조되는 긴장감 속에, 맞은편에서 흑기사단의 기사정복을 갖춰 입은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무게를 담아 계단을 오르는 흑발의 검사, 이그넷 크레센시아.

하지만 기세만큼은 이전 시합들과 판이하게 달랐다.

파아아앗-!

“…….”

“…….”

“……!”

상대와 눈을 마주친 상태로, 그녀가 자신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자 이나시오 카라한을 비롯한 세 참가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표정이 기괴했다.

너무 많은 감정이 담겨 있어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지만, 대체로 경악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비단 그들만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건…….”

“…….”

“많이, 많이 잘못 알고 있었군.”

서부 검술도시 라티온의 유명한 검술관주들.

그들조차 한 수 접어주는 5대 검술명가의 현 가주들.

무려 대륙 10대 검사의 칭호에 빛나는 그들조차도 눈을 부릅뜬 채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쳐다봤다.

거의 노려보는 수준에 가까운 진한 눈빛이었다.

그렇듯 또다시 바뀐 분위기 속에서, 잔뜩 주눅 들어 있던 결승전의 심판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시합…… 개시!”

화르륵-!

즈응

즈으으응-!

직후, 흑기사단장의 몸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작열하는 태양만큼이나 뜨거운, 마치 16강전에서 활약했던 주디스를 보는 듯한 시뻘건 오러.

허나 그와는 달랐다. 가다듬어지지 않고 야만적으로, 제멋대로 쏟아졌던 그녀의 불길과는 달리, 이그넷의 불꽃은 고도로 정제되어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열, 스물.

그녀의 몸에 피어난 화염 속에 오러의 구슬이 맺혔다.

하나하나가 마스터급의 검사조차 막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품고 있는 그것들의 뒤편에 또 다른 불꽃이 잉태했고, 터졌다. 강렬히 폭발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지는 오러 구체의 폭격을 보며 관객들이 비명을 질렀다.

콰콰콰콰콰콰콰쾅!

허나 들리지 않았다. 그 소리는 이그넷이 만들어 낸 거대한 힘에, 굉음에 허무하게 파묻혔다.

그저 질린 듯한 사람들의 표정과 눈빛만이 지금의 참사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우우우우우우웅-!

허나 이그넷 크레센시아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오러 구체를 쏟아 내는 와중에도, 검에는 끊임없이 힘이 집중되고 있었다.

그녀가 31년을 살아오며 깨달은 자신만의 검술과, 신성왕국의 가르침이 한데 녹아 위대한 검을 만들어 냈다. 무시무시한 기세가 느껴졌다.

쒜에엑, 그녀가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반월을 그리고 쏘아진 또 하나의 오러가, 아이른이 서 있던 자리를 초토화시켰다.

꽈과과과과과광-!

“…….”

“…….”

“…….”

투두둑

투둑

휘이이잉-

격렬했던 오러의 파동이 끊어지고, 정적이 찾아왔다. 하늘 위로 떠올랐던 파편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바람이 불어와도 한참이나 시야가 보이지 않았다.

사제와 마법사들이 미리 대처하고 있기에 망정이지, 자칫 잘못하면 관객들마저 피해를 볼 뻔했다.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폭발과 열기의 한가운데서, 아이른 파레이라가 다섯 가지 기운을 회전시켰다.

“후우, 후우.”

강철, 불꽃, 물, 대지, 나무의 순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아니, 비로소 제대로 된 방향으로.

상생(相生)의 흐름을 타고 기운을 이끌어 가던 금발의 영웅이, 빛나는 눈으로 태양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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