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327화 (327/388)

◈ 107. 상생(相生) (1)

용사의 제전 준결승전이 끝난 뒤.

아이른 파레이라는 검을 휘두르기보다는 마음을 다스리는 쪽을 택했다.

자기 안에서 자꾸만 커지는 이그넷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쉽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그녀를 저평가했던 것과 달리, 아이른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1년 전의 대련을 통해 알고 있었고, ‘오러를 보는 눈’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이그넷은 부족한 부분이 없어. 모든 부분에서 완성에 가까운 상태야.’

그러한 생각은, 자신의 연인인 일리아 린제이가 패배하면서 더욱 확실해졌다.

어떻게 하면 이그넷을 이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검의 축복을 받은 듯한 그녀를 상대로 승리를 쟁취하고, 용사의 제전에서 우승을 거머쥘 수 있을까?

고민은 깊어져만 갔고, 명상에 잠겨있는 시간도 계속해서 길어졌다.

그러던 와중에 자각했다.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는 것을 말이다.

‘……꿈이네.’

낯익은 하늘.

낯익은 담장.

낯익은 마당.

그 중심에 서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낯익은 사내.

꿈이 확실했다. 점술사 구르가르로부터 신세를 진 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전생의 자신이 맹렬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이른의 표정이 절로 밝아졌다.

그렇다. 이거라면 가능했다.

커다란 성취가 필요할 때마다 자신을 도와줬던 꿈속 사내라면, 과거의 자신이라면 지금의 고민 역시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

완벽하기 그지없는 이그넷 크레센시아와 맞상대할 방법을 알려 줄지도 모른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마당의 구석에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유심히, 빛나는 눈으로 꿈속 사내를 지켜봤다.

카렌 윈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고독하고 슬픈 얼굴로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 * *

‘……생각했던 것과 다른데.’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사내는 여전했고, 아이른도 여전했다. 검을 휘두르고, 이를 지켜보고. 다른 것 역시 변함이 없었다.

꿈속이기에 밥을 먹을 필요도 없었고, 누군가가 찾아오는 이도 없었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조차 규칙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배운 것?

없었다. 애석하게도, 각성하기 전의 카렌 윈커는 모든 면에서 현재의 아이른보다 부족한 존재였다.

육신?

부족했다. 마스터는커녕 엑스퍼트에도 다다르지 못한 존재의 몸뚱이가 특별할 리 없었다.

검술?

형편없었다. 수직 베기, 사선 베기, 횡 베기. 찌르기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세 가지 동작만을 반복하는데, 그마저도 정교함이 부족했다.

자꾸만 흔들리는 밸런스를 보고 있자니 직접 지도해 주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의지?

그것이야말로 카렌 윈커로부터 유일하게 배울 만한 점이었지만, 이미 예전에 품었다.

오행신공의 성취가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는가. 다 꿈속 사내의 강철의 의지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꿈으로부터 얻을 것은…… 이제는 없다는 건가.’

아이른 파레이라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카렌 윈커는, 자신을 만날 때마다 엄청난 깨달음을 전해 주곤 했다. 마치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도 같았다.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는 상황에서 꿈을 꿨기에 더 기대가 컸고,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허탈함은 두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마음이 아이른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조금만 더 있어 보자.’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언제라도 가능할 터였다.

정신을 집중하는 순간 환상을 뚫고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른은 복귀를 뒤로 미뤘다.

그리고 절실한 눈으로,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전생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후웅!

후우우웅-!

카렌 윈커는 변함없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차갑고 날카로운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

* * *

전생의 자신이 괴로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정된 공간.

한정된 세상.

그보다 더욱더 좁은 시야와 꽉 닫힌 마음.

그 속에서, 미래에 거대한 힘을 손에 쥘 거라는 확신조차 없는 나날을 보내며 검을 휘두르는 카렌 윈커의 모습이, 문득 그의 검술보다 더 깊이 와닿았다.

아이른의 눈빛이 변하였다.

뭐라도 얻어 갈 점이 없나, 그것에만 몰두하여 꿈속 사내를 지켜봤던 그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럴 수가 없었다.

까마득한 세월을 고독 속에 살아왔고, 그보다 더욱 긴 세월을 외로움 속에 살아갈 사내를 떠올리니 지금껏 자신이 품었던 마음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심지어 이곳은, 다른 누군가자 절대로 찾아올 수 없는 장소잖아.’

오랫동안 사내만을 바라봤던 아이른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꿈속이기 때문일까. 이곳은 검을 휘두르는 사내와 그를 위한 공간, 그것 말고는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감각을 개화해도 담장 너머로 느껴지는 건 푸르른 하늘이 전부였다.

‘평생을, 괴로움 속에 살아갈지도 모른다.’

우연히 찾아왔던 소녀와도 마주할 수 없을 것이고.

아이의 조막만 한 손, 그 위에 올려진 꽃 한 송이도 전해 받을 수 없을 터였다.

당연히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죽음 직전에 찾아온 깨달음도 없던 일이 될 터였다.

자연스레 그려졌다. 자신의 생을 후회하며 스러져갈 카렌 윈커의 마지막 모습이.

“…….”

아이른의 시선이 담장 너머가 아닌, 조금 더 가까운 곳을 훑었다.

삭막했다. 꽃은커녕 나무 한 그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원래 그랬는지, 오늘의 꿈에서만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꿈속 사내의 시선을 돌릴 만한 무언가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때, 아이른의 마음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잠깐의 망설임, 잠깐의 주저함.

허나 포기하지 않았다.

후우, 크게 숨을 내쉰 그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펼쳐지는 심상세계, 그 안에 우뚝 솟아나 있는 거대한 나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힘이 전해졌다. 지금껏 정성 들여 키워 왔던 힘의 절반이 넘어왔다.

순식간에 줄어드는 나무를 뒤로한 채, 아이른이 심상세계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꿈속 사내의 앞에 섰다.

처음으로 검을 멈추고, 자신을 쳐다보는 카렌 윈커.

그에게 미소를 보인 아이른 파레이라가, 손에 있는 묘목을 마당에 심은 뒤 말했다.

“선물입니다.”

“…….”

“금방 클 테니까, 그늘 밑에서 쉬기도 하면서 수련하세요.”

사내의 대답은 없었다.

아이른 역시 뒷말은 하지 않았다.

허나 마음은 전해졌다. 카렌 윈커에게 전해진 선의가, 과거 소녀가 건넸던 꽃과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

차갑고 삭막했던 사내의 마음에 한 줄기 빛을 내려주었다.

“……그럼, 갈게요.”

더 있을 필요는 없었다.

꾸벅 인사한 아이른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꿈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물론 꿈이라고 해서 지금의 행동이 아무 의미 없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마 정말로 힘이 줄어들어 있을 터였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정말로 그럴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요술사 아닌가. 상식 밖의 일쯤이야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

‘하지만, 딱히 후회는 되지 않아.’

아니, 오히려 마음이 가볍다.

처음보다 한결 밝은 표정이 된 그가 조금 더 힘을 끌어올렸고.

파삭

환상으로 빚어진 세상이 무너졌다.

……

……

……

하지만, 아이른 파레이라는 곧바로 현실로 돌아올 수 없었다.

* * *

후웅!

후우웅-!

카렌 윈커가 검을 휘둘렀다. 언제나와 마찬가지였다.

고통스러운 육신.

그보다 더 괴로운 과거의 추억과, 그로 인해 일그러지려는 얼굴. 허나 사내는 억지로 표정을 유지했다.

어디선가 자신을 보고 있을 광대 악마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조금은, 편해.’

그런데, 요즘은 표정을 관리하는 것이 마냥 힘들지만은 않았다.

그가 위를 올려다봤다.

초록 잎이 무성한 나무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원한 그늘로 자신을 지켜 주고 있었다.

“…….”

카렌 윈커가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여전히 몸은 힘들었다.

무리한 수련으로 인해 근육과 관절이 비명을 질렀고, 손에 박인 굳은살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피가 흘렀다. 괴로운 나날이었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더는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는 가면들이 무섭지 않았다.

* * *

낯선 청년으로부터 나무 한 그루를 선물 받은 카렌 윈커는, 죽기 직전에 깨달음을 얻어 추악한 악마에게 심대한 피해를 준다.

그로 인해 광대 악마는 오랜 은거에 들어간다. 그 밑에서 고통받던 수많은 이들이 해방되었고,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원래라면 슬픔 속에 스러져 갔을 이들이 희망찬 내일을 노래하고.

원래라면 아픔 속에 병들어 갔을 이들이 위대한 꿈을 키워 간다.

그중 많은 이들이 또 다른 고난에 부딪혀 좌절했지만,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다.

그들은 마법사가 되었고, 검사가 되었고, 영웅이 되어 악마와 마인을 물리쳤다. 덕분에 세상은 조금 더 평화로워졌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다.

이제 카렌 윈커를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가스코 영지민들이 영주를 존경했던 것도, 욕했던 것도.

그가 그러한 아픔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구했던 것도, 그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구원받아 또 다른 선의를 퍼뜨리고, 그들의 은혜를 입은 이들이 같은 일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하고…….

그렇게 찾아온 평화 속에서 자신이 태어났다는 것을, 꿈에서 빠져나오기 직전의 아이른 파레이라가 명확히 인지했다.

“…….”

머릿속이 복잡했다.

점술사 구르가르가 보여 줬던 과거가 진짜일까?

아니면 꿈속의 카렌 윈커가 진짜인 걸까?

만약 후자가 진짜라면, 자신이 묘목을 건네지 않았을 때는 세상이 어떻게 변했을까.

400년 전의 영웅인 디온 린제이도 태어나지 않고, 160년간 이어져 왔던 평화의 달콤함도 맛볼 수 없었을 것이고, 자신이 태어났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고…….

모르겠다. 알 수 없었다.

무척이나 중요한 부분이지만, 지금은 넘어가기로 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자신이 용사의 제전에 참가한 이유.

자신이 여정을 떠나고, 가르침을 구하고, 검의 길을 걷기로 다짐한 이유.

그것은…….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꺾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륙에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기 위해.’

비로소 방황하던 마음을 다잡은 아이른의 몸에, 녹색의 기운이 피어났다.

드드드드드득-!

그와 함께,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던 마음속의 나무가 다시 크기를 키워 갔다.

예전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욱 거대한 모습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선의가 또 다른 선의가 되어 돌아오고, 그것이 더 큰 선의로 뻗어 나가고, 결국에는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올바른 순환이었고, 상생의 묘리였다.

“후우.”

여기까지 생각한 아이른 파레이라가, 비로소 눈을 떴다.

마음이 가벼웠다.

무언가를 바라며 꿈속으로 들어갔던 어제보다, 무언가를 베풀기 위해 현실로 돌아온 지금이 훨씬 편안했다.

심지어, 혼자가 아니었다.

“이제 가자.”

자신의 주변을 지키고 있는 세 명의 소중한 인연들.

주디스.

브랫 로이드.

그리고 일리아 린제이.

그들을 웃는 얼굴로 바라보며, 아이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가자.”

대륙에 희망을 전하기 위해 개최된 용사의 제전.

그 마지막 날이, 비로소 밝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