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326화 (326/388)

◈ 106. 흔들리지 않는 (3)

쾅!

콰앙!

콰아앙-!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굉음이 연속으로 울려 퍼진다. 자연재해가 아니다.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 내는 소리다.

웬만한 마스터들조차 고개를 숙일 경지에 다다른 초인들의 싸움에 아냐 마르타가 멍한 표정을 지었고, 게오르그 포이베도 놀란 듯 입을 벌렸다.

더 강했다. 준결승전에서 봤던 것보다, 오늘 본 일리아 린제이의 검이 더욱 강력했다.

경기장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하늘과 땅을 오가는 그녀의 몸에서 은은하게 빛이 났다.

은빛의 머리카락과 은빛의 오러 소드에 바람의 힘이 더해지자 현실의 존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쩌어어엉-!

그렇듯 요정 같은 아름다움을 뽐내던 은발의 검사를, 붉은 오러가 강타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저 멀리 날아가는 일리아를 흑기사단장,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뒤쫓았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접근한 그녀가 상대의 허리를 동강 낼 듯 검을 휘둘렀다.

콰앙!

텅, 텅, 터덩!

일리아가 이를 간신히 막아 냈다. 허나 지면과 수평으로 날아가던 와중이었기에 바닥에 내리꽂힐 수밖에 없었다.

관성에 의해 물수제비처럼 지면에 튕기던 그녀가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기민하게 자세를 갖추는 모습이 뭇 기사들의 귀감이 될 만한 태도였지만.

뻐어억!

“끄윽……!”

기척을 숨긴 채 접근한 이그넷에게 옆구리를 허용한 이상, 별 의미 없는 모습이 되어 버렸다.

콰콰콰콰콰콰쾅-!

연무장 돌바닥에 큰 고랑을 남기고 멀어진 일리아가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쿨럭, 피를 토한 뒤 무너져내렸다.

게오르그는 그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검이 아닌 주먹이긴 했지만, 저기에 얼마나 무지막지한 힘이 실려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결착이 났다.

하늘검은 대단했으나, 드높이 떠 있는 태양을 추락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가라앉는 흙먼지와 돌가루 속에서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읊조렸다.

“앞으로는 말을 가려서 하도록.”

“쿨럭, 쿨럭…….”

“……그리고, 알아 두도록. 본 단장이 연인을 두지 못한 건, 아니, 않은 건. 어디까지나 업무가 바빴기 때문이다. 160년 만에 악마가 출현하여 세상이 어지러운 마당에, 연애라니. 성기사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단장으로서 그런 여유를 부릴 수는 없는 법이지.”

“하아, 하아, 후아…….”

일리아 린제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 잘 버티긴 했지만, 어찌 됐건 자신은 패배했다. 그것도 준결승 때보다 훨씬 엉망진창이 되어 바닥에 몸을 눕혔다.

왼쪽 허리의 통증이 너무 심해 호흡을 하는 것조차 벅찼다. 더 맞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있는 것이 상책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호기심이 자꾸만 그녀를 자극했다.

‘여기서 한마디 더 하면 어떻게 될까?’

‘무슨 말을 하면 이그넷을 더 열 받게 만들 수 있을까?’

‘전쟁통에도 다들 연애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살았다고 말할까?’

‘아니면…… 사랑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라고 말할까?’

……잠시 고민하던 일리아 린제이는, 굳이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번에는 진짜로 죽을 것 같았다. 싸우기 전의 발언도 선에 걸친 수준이었지만, 지금 떠올린 말들은 확실히 이그넷을 폭발시킬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여기에 온 건, 무의미하게 상대를 놀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조금 더 숨을 고르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찝찝했어요.”

“……?”

“이대로 끝내는 거, 마음에 안 들었어요. 결승을 위해 힘을 숨기는 거일 수도 있고, 관객들을 위해 치열한 싸움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내가 모든 것을 보여 주고, 후회를 남기지 않고 무대를 떠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그래서 더 아쉽더라고요. 당신의 진짜 실력을 확인하지 못한 게.”

“…….”

“그래서 조금 더 세게 도발했어요. 미안해요. 후우, 조금 민망하네. 내가 더 강했더라면 굳이 이러지 않았더라도, 알아서 그쪽이 전력으로 다가왔을 텐데. 읏차.”

자리에서 일어난 일리아 린제이가 서너 번 기침했다. 그때마다 핏방울이 쏟아져 나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준결승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오히려 마음속의 짐을 끄집어낸 듯 시원한 표정이었다.

그렇듯 상쾌한 모습이 된 그녀가 어색하게 서 있는 이그넷의 곁으로 다가간 뒤, 털썩 앉았다.

의아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원수.

아니, 이제는 친구가 되고 싶은 존재를 올려다보며, 일리아가 말했다.

“우리, 얘기나 좀 할래요?”

“…….”

“…….”

“…….”

이그넷도, 게오르그도, 아냐도 말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은발의 검사를 쳐다볼 뿐이었다.

아랑곳하지 않았다.

린제이 가의 재녀가 싱긋 웃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으음, 싫은가?”

“…….”

“그러면 그냥, 내 얘기 들어요. 그것도 싫으면, 쫓아내든가. 이미 흠씬 두들겨 패서 엉망진창이 된 나를 저 멀리 내팽개치든가.”

“너, 원래 이렇게 뻔뻔했었나?”

“안 쫓아내네요. 그럼 듣고 싶다는 거로 알고, 시작할게요.”

“…….”

“해도 되죠?”

“……마음대로 하거라.”

……그렇게 시작된 일리아 린제이의 이야기는,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홉 살 어린 나이에 마주쳤던 마녀 같은 분위기의 이그넷과, 이에 처참히 패배한 칼 린제이.

그녀가 떠나간 뒤에도 재기하지 못하고 천천히 무너져 내렸던 오빠와, 그로 인해 자신의 마음에 켜켜이 쌓인 어둠.

크로노 검술관에서 잠시 찾아왔던 빛.

그 빛을 송두리째 앗아간 또 한 번의 어둠.

어둠, 어둠, 어둠…….

칠흑처럼 깜깜한 밤하늘 아래서 방황하던 시기와, 그것을 극복하도록 도와준 연인, 친구, 스승.

그리고 마침내 다시 마주하게 된 자신의 원수이자 스승, 이그넷 크레센시아.

“……지금 기분을 정확하게 설명하라면, 자신이 없어요.”

일리아 린제이가 중얼거렸다.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 치고는 무척이나 담담한 상태.

어쩌면,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부터 어리석었던 과거 대부분을 정리한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게오르그 포이베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아집과 집착, 고통과 좌절에 몸부림치는 이는 약할 수밖에 없고, 약한 존재는 자신의 모자란 점을 타인에게 밝힐 수 없다.

자신만 해도 그랬다.

어렸을 적, 별 볼 일 없는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 부끄러웠던 그는 부잣집 아이들 앞에서 허세 가득 찬 말들로 자신을 치장하곤 했다.

‘……꽤 나이 먹은 지금 역시, 저렇듯 솔직한 모습을 보이지는 못하겠군.’

그렇다.

일리아 린제이는 약하지 않다. 오히려 강하다.

그렇기에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이었고, 가장 쓰라린 상처였던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러 이 자리에 왔다.

자신이 가장 싫어했던 사람에게.

더는 증오도, 분노도 쏟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기 위해.

“후, 이제 좀 후련하네. 눈도 맑아진 느낌이고.”

“…….”

“그래서 그런가, 당신하고도 조금 더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

“음, 계속 말이 없으시네.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나.”

훕,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일리아 린제이가 재차 미소를 지었다.

모든 짐을 덜어내고, 마지막 한 조각 어둠마저 말끔하게 지워 낸 그녀의 얼굴이 은색의 검날보다도 밝고 맑게 빛났다.

그런 그녀가 악수를 건넸다.

……묵묵히 있던 이그넷도, 이것만큼은 거절하지 않았다.

“종종 보러올게요.”

“……바쁠 때는 어울려줄 수 없노라. 본 단장은 한가한 사람이 아니니.”

“알고 있어요. 나도 자주는 못 오거든요? 아이른이랑 있을 시간도 부족…….”

꽈아악-!

“윽…… 미안, 미안! 미안합니다!”

화들짝 놀라 손을 뺀 일리아가 질린 표정으로 이그넷을 바라봤다.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표정도 어마어마했다. 더는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었다.

세 발 짝 뒤로 물러난 그녀가, 검집에 검을 집어넣은 뒤 말했다.

“그거 알아요?”

“무엇 말이냐.”

“내가 당신을 편견으로 바라보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고. 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용기를 내고, 실천한 건. 내가 예전과 달라졌기 때문이에요. 과거의 불미스러운 일에만 사로잡혀 있었더라면, 여전히 당신이 악마처럼 보였겠죠.”

“…….”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지금 이렇게 그쪽을 마주하고, 정겹게…… 정겹게는 아닌가? 아무튼 비교적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이그넷, 당신 역시 변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

“음, 뭐라 그래야 하지…… 더 주변을 돌아보게 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물론, 더 멋있어진 내 모습은 누구라도 고개를 돌릴 정도로 매력적이지만…… 그러니까 그 모습에 아이른도 반한 거겠지만…… 아, 죄송. 이번엔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 그럼, 실례합니다!”

그 말이 끝이었다.

뒤돌아선 일리아 린제이는 꽁지가 빠져라 이그넷으로부터 달아났고, 흑기사단장의 이마에는 힘줄이 불끈 돋아났다.

그런 그녀를 게오르그와 아냐가 말렸다.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않았다. 자기들에게도 불똥이 튈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않는구나.”

“……아닌데요. 적극적으로 말리는 중인데.”

“아냐도 적, 적극적이었는데. 단장이 착각한 것 같은데!”

“……됐다.”

푸욱 한숨을 내쉰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다시금 명상에 빠져든 단장을 보며 게오르그와 아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폭풍이 왔다 갔어도 이보다는 덜 조마조마할 것 같았다.

‘더…… 주변을 돌아보게 된 것 같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이그넷은 생각을 이어갔다. 직전까지의 상념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결승 상대인 아이른 파레이라, 하나에만 국한됐던 생각이 일리아와의 대화로 인해서 더 넓게 퍼졌으니까.

아이른 파레이라.

일리아 린제이.

브랫 로이드.

그리고 주디스.

맞는 말이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터인데, 지금은 자꾸만 그들의 모습이 머릿속을 채웠다.

눈에 밟혔다. 단순히 대회 때문이 아니었다. 용사의 제전이 끝나고도 꽤 오래.

어쩌면 그보다 더욱 오래, 그들의 이름이 잊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들을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모두의 위에 군림하기만 하던 존재가, 아래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태양만큼이나 뜨거운 불꽃과, 그러한 불꽃에게조차 위협적인 거대한 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바람과, 끝을 모르고 솟아오르는, 어쩌면 자신이 있는 곳까지 다다를지도 모르는 거대한 나무.

정말로 오랜만에 자신이 아닌 타인에 대해 고뇌하며, 이그넷은 길고 긴 시간을 명상으로 보냈다.

* * *

그로부터 이틀 뒤의 밤.

아이른 파레이라는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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