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흔들리지 않는 (2)
“아이른 파레이라!”
“아이른 파레이라! 아이른 파레이라!”
1시간가량의 기나긴 검투가 끝이 났다.
승자는 아이른 파레이라. 캄린 레이의 우세를 점쳤던 이들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높은 기량을 뽐낸 그에게 환호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물론 의문의 시선 역시 존재했다.
캄린 레이의 공세는 매섭고, 날카로웠다.
거센 비바람처럼 몰아치는 오러의 향연. 마치 스타일이 다른 여러 검사가 동시에 합공하는 것 같은 모습에 60세 이상의 실력자들조차 간담이 서늘해졌다.
자신들이 저기에 있었다면 막아 낼 수 있었을까. 자신을 절로 돌아보게 만드는 위력적인 검술이었다.
“아직 여력이 남아 있었지.”
제트 프로스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자신보다 훨씬 수준 높은 이들 간의 대결이기에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캄린 레이가 밀리는 상황은 아니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오러도, 체력도 여유가 있다. 흔들리지 않는 아이른의 안정감에 막막함을 느꼈던 거라면, 다른 흐름으로 싸움을 끌고 가도 좋았을 터였다.
경험 많은 캄린 레이에게 그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터였다.
“왜 항복하신 거죠?”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비슷한 의문을 품었다. 얌전히 무대 밑으로 내려간 캄린 레이를 따라가며 그가 질문을 던졌다.
물론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예전의 자신이 아니었으니까.
불어오는 바람이 무서워 도망가고 웅크리는 대신, 그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굵고 튼튼한 나무를 키워 내는 데 성공했으니까.
‘게다가, 마주치는 것은 비바람만이 아니었지.’
검투를 벌이는 내내 느낄 수 있었다.
쏟아지는 것은 캄린 레이의 검과 오러만이 아니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자신의 안전을 기원하는 가족들.
뜨거운 마음으로 자신을 응원하는 친구와 지인들.
제자의 성장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스승들과.
대륙의 안녕과 평화를 진심으로 바라기에, 자신의 신념과 뜻에도 기꺼운 반응을 보이는 신성왕국의 인물들까지.
그들의 의지 역시 마음으로 전해졌고,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줬다.
요술과 검술의 경계조차 희미한 기적 같은 일이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승부를 매조지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캄린 레이 경은, 아직 보여 주지 않은 수가 있었어.’
그것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이미 결정을 내린 그에게 실례되는 질문일 수도 있지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대륙의 미래를 위한 대회이지 않은가.”
캄린 레이가 입을 열었다.
근엄하기 그지없는, 허나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부드러운 얼굴.
따스한 눈빛으로 아이른을 바라보던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신념, 뜻, 장래성…… 어느 모로 보나, 나보다는 자네가 대륙에 희망을 전하기 적합한 인물인 것 같군.”
“…….”
“아, 물론 이길 수 있는 경기를 포기했다는 뜻은 아니야. 자네, 아직 보이지 않은 카드가 있지?”
“네?”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말게. 내가 비장의 한 수를 숨겨 놨듯, 자네도 아직 아껴 놓은 뭔가가 있지 않나.”
“…….”
“물론 내가 전력을 다하면, 아이른 자네도 더는 그 힘을 숨기지 못했을 테지만…….”
조금 더 선명한 웃음을 보인 뒤, 돌아서는 캄린 레이가 말했다.
“……그건 결승에서 보고 싶군.”
“…….”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패배했다. 허나 여전히 당당하고 굳건한 걸음걸이로 경기장을 떠났고, 아이른 파레이라는 꽤 오랫동안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감사합니다.’
떠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이 온전히 전해져 왔다.
또 하나의 의지를 이어받은 아이른의 마음속 나무가, 또 한 뼘 자라났다.
* * *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이길 거라고 봅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일리아 린제이의 실력은 절대 아이른 파레이라, 그리고 캄린 레이에 뒤처지는 수준이 아닙니다. 과거 하늘을 지배했던 디온 린제이의 수준에 미치지는 못할지라도, 그녀가 바람의 축복을 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죠. 마스터에 다다른 실력자라면 모두가 공감할 겁니다. 그녀의 검과 발걸음, 몸놀림에 담겨 있는 바람이 얼마나 큰일을 해냈는지. 다시 한번 말하지요. 일리아 린제이가 약한 게 아닙니다.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말도 안 되게 강한 것뿐. 아마 강한 상대를 만날수록 그녀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오를 겁니다. -랄프 펜-]
[예측을 하라고? 하, 이 ‘용사의 제전’만큼 예측이라는 것이 무의미한 대회가 또 있을까? 잘난 평론가들도, 저 위에서 거들먹거리는 늙은이 소드마스터들도 처음에는 캄린 레이와 나, 데반 케네디를 우승 후보로 꼽았지. 심지어 몇몇 멍청이들은 쟈롯과 자쿠앙에게도 기대하더군. 그래서 어떻게 됐지? 나는 16강에서 개같이 패배했고, 데반 케네디 경과 랄프 펜도 마찬가지였지. 캄린 레이 경도 결과적으로는 졌고. 아, 미안. 25살 애송이한테 졌던 이야기를 스스로 하려니 성질이 올라와서 말이 격해졌어. 하하……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말이야, 까보기 전에는 모른다는 거야. 아이른 파레이라가 아직 모든 실력을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고, 어쩌면 캄린 레이 경과의 경기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수도 있지. 어쩌면 이그넷 크레센시아 경과 싸우면서 성장할 수도 있는 거고. 뭐…… 굳이 한쪽에 걸라면 나는 아이른 파레이라 쪽에 걸겠어. 그래도 날 꺾은 사람이 우승해야 내 면이 살지 않겠어? -이나시오 카라한-]
[아이른 파레이라요. -일리아 린제이-]
[이그넷 크레센시아. -데반 케네디-]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이긴다. -카림 젠킨스-]
[말을 아끼겠네. 분명한 건, 누가 이기든 좋은 승부가 될 거라는 점이지. -캄린 레이-]
[둘 다 검술의 역사를 새로 쓸 만큼 대단한 젊은이들이지만, 지금만 놓고 보자면 흑기사단장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군. -앨런 레이 가주-]
[누가 이기든 내가 꺾어 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으라고 전해 주세요. -주디스-]
[주디스 사랑해. -브랫 로이드-]
“브랫 로이드 부분은 삭제하는 게 맞겠지? 이걸 그대로 내면 주디스 쪽에서 내 머리를 깰지도 몰라. 으음, 그래도 따로 특별 코너를 만들어서라도 담고 싶은 내용이긴 한데…….”
“아예 공식적으로 커플 인터뷰를 따면, 의외로 별말 없지 않을까? 엄청 화를 내는 것 치고는 뭔가, 은근 원하는 것 같은 느낌도 있었는데…….”
“아예 더블 커플 인터뷰로 갈까? 브랫&주디스, 아이른&일리아…… 흔치 않은 마스터 급 검사들의 러브스토리라. 좋아, 한번 운이라도 띄워 보자.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그건 그렇고, 아무래도 흑기사단장 쪽으로 많이 쏠리는구만.”
인터뷰 내용을 훑어보던 위클리 아레나의 엘프 수석기자, 힌츠가 담배를 피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이그넷 크레센시아 쪽이 우승 확률이 높다는 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단 한 경기를 제외하면 일방적인 승리만을 거두고 올라온 흑기사단장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역으로 주디스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기도 했다.
대진운이 없어서 일찍 떨어졌을 뿐, 진정한 준우승자는 그녀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어쩌면 4강 진출자들만큼이나 큰 명성을 얻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면…… 나는 누구의 손을 들어 줘야 할까나.’
뻐끔뻐끔 연기를 뿜어내던 힌츠가 둘의 이름을 왔다 갔다 쳐다보았다. 사실 기자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보는 눈이 뛰어나다 한들, 이번 인터뷰에 참여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라.
마스터 중에서도 명성이 드높은 강자들이 아닌가. 그런 이들의 의견을 두고, 자신의 첨언을 신경 쓰는 이는 많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나도 한마디 정도는 꼭 하고 싶단 말이지.’
게다가 자신의 경우에는 여타 기자들보다는 말에 힘이 실리는 편이기도 했다.
남들은 32강이 되어서야 주목하기 시작한 브랫 로이드, 주디스, 일리아 린제이, 아이른 파레이라에 대해 처음부터 고평가하는 기사를 써 왔기 때문이다.
덕분에 위클리 아레나는 서부를 넘어 대륙 전체에도 인지도를 높이게 되었다. 이번에 받을 보너스를 생각하니 벌써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팬심으로 밀고 가야겠다.’
이윽고 결정을 내린 엘프가 ‘아이른 파레이라’의 이름을 적었다. 논리적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아이젠마르크트에서부터 이어진 기적을 한 번 더 보고 싶을 뿐이었다.
담배를 비벼 끈 그가 재빨리 기사를 다듬었다. 마침내 모든 일을 마친 그가 쭈욱 기지개를 켜며 혼잣말을 뱉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당사자들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려나.”
일리아 린제이와 이그넷 크레센시아 사이에 있었던 것처럼 특별한 사건은 둘 사이에 없다. 적어도 알려진 바로는 그렇다.
허나 왠지 모르게, 서로가 서로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힌츠였다. 기자의 감이었다.
‘어쩌면 대중들이 모르는 뭔가 특별한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좋아. 경기가 끝나면 아이른 쪽에 부탁 좀 해야겠구만.’
그가 아이른 파레이라의 푸근한 미소를 떠올렸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올라간, 허나 여전히 순박한 표정으로 모두를 대하는.
그렇기에 더 영웅에 가깝다고 느껴지는, 오랜 기자 생활을 통틀어서도 가장 대단한 청년.
“……이겼으면 좋겠네.”
다시금 궐련을 꺼내 드는 힌츠의 입에서, 응원의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 * *
신성왕국 아빌리우스의 단장 급에게만 허락되는 개인 연무장.
물론 그녀 혼자 드넓은 공간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대표적으로 흑기사단 부단장 게오르그 포이베가 자주 신세를 졌고, 요술사 아냐 마르타도 종종 놀러와 둘이 검을 휘두르는 것을 구경하고는 했다.
남들 앞에서는 꽤 얌전해진 그녀였지만, 그들 앞에서만큼은 여전히 어리광을 부리고 큰 소리로 떠드는 등 꼬맹이 시절의 모습을 보여 주곤 했다.
허나 최근에는 그렇지 않았다.
정확히는 용사의 제전 32강이 지나간 이후부터 그러했다.
그녀의 영원한 대장, 아니 단장인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더욱 진지하게 수련에 임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연무장의 중앙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에 빠진 단장을 보며, 아냐도 게오르그도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벌써 5시간, 평소보다 훨씬 긴 시간이었지만 둘 다 지루하거나 불편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신기한 표정으로 이그넷을 바라보았다.
그런 평화를 깬 것은, 불쑥 찾아온 은발의 검사.
일리아 린제이였다.
“대련을 부탁합니다.”
“……굳이? 지금 말이냐?”
눈을 뜬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4강 경기가 끝난 후, 언제든 상대해 줄 테니 찾아와도 된다고 말해 놓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곧바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결승이 내일 모레인 시점에서.
‘말을 많이 나눈 것은 아니나, 예의 없는 녀석처럼 보이지는 않았거늘.’
그렇기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뭔가 중요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을 뿐.
하지만 지금은 내키지 않았다. 평상시와 달리 조금, 아주 조금 머리가 복잡했다.
이것을 정리하기 전에는 누구와도 검을 맞대기 싫었다. 생각을 마친 그녀가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아쉽네요. 마침 아이른하고 포옹도 하고, 뽀뽀도 받고 온 참이라 기운이 넘치는데.”
“……?”
“이렇게 힘이 넘칠 때 싸워야, 조금이라도 승산이 높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쩔 수 없지. 다음에 와야겠네요.”
그 말을 끝으로 신형을 돌리는 일리아 린제이.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으며 말했다.
“덤벼.”
“…….”
“빨리 덤벼, 새끼야.”
고풍스러운 귀족의 말투까지 벗어던진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분노가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