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흔들리지 않는 (1)
“후우, 끝났군.”
“예상대로인가.”
“일리아 린제이도 생각보다 강하긴 했지만, 역시 흑기사단장을 이기기는 힘들지. 나이 차이도 아홉 살이나 나고 말이야. 20살도 더 차이 나는 녀석에게 진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나는 30살도 넘게 차이 난다네.”
“아, 그러고 보니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가 그렇군. 오해하지 마시오, 선배들을 놀리려고 그런 건 아니었소.”
“…….”
“랄프? 자네는 왜 말이 없나?”
“……머리가 조금, 조금 복잡해서.”
이나시오 카라한의 물음에 랄프 펜이 적당한 변명을 댔다.
탈락한 이후, 어쩌다 보니 데반 케네디와 이나시오 카라한과 함께 어울리게 된 그였다.
서로 결이 다른 실력자들과 다양한 시각으로 경기를 평가하고, 이에 관해 토론하는 것은 썩 괜찮은 일이었기에, 비교적 내성적인 성격인 그로서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일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한쪽을 응원하는 거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는 사이일 수도 있고, 그런 게 아니라도 유달리 호감 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방금 전의 둘은 이상했다. 정말로 이상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응원하는 데반 케네디와 이나시오 카라한의 모습은, 지금까지 알던 둘 맞나 싶을 정도로 기괴한 것이었다.
‘이나시오 경이야 그렇다 쳐도, 그 점잖은 데반 경까지 그렇게 흥분한 태도로…… 도대체 뭐였지?’
둘이 오랫동안 독신 생활 중이라는 것도, 이그넷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정도로 뜨거운 분노를 토해냈다는 것도. 랄프 펜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20살이 되자마자 결혼하여 한 번의 다툼도 없이 행복한 가정을 꾸려 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남들 다 눈살을 찌푸리는 아이른과 일리아의 애정행각 역시, 그에게는 보기 좋은 광경이었을 뿐이다.
“아, 이제 대충 정리된 모양이군.”
“으음. 기대되는걸…… 선배, 어떻게 생각하시오?”
“뭘 말인가?”
“당연히 누가 이기느냐지. 나는 아이른의 패기가 캄린 레이 경의 노련함을 꺾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나는 자네와는 다른 의견이네.”
“이유라도 있소?”
“있지. 둘의 스타일이 은근히 비슷해. 기본에 충실한 듯하면서도 다양한 성격의 검술을 함께 다루고, 이를 유기적으로 이어 가는…….”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랄프 펜이 고개를 저었다.
언제 흥분했냐는 듯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와 경기 양상을 예측하는 데반 케네디와, 마찬가지로 진지한 얼굴을 한 채 이를 듣는 이나시오 카라한.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맑은 하늘을 쳐다보던 랄프 펜이 생각했다.
‘부인, 보고 싶소…….’
* * *
약 30분 정도의 정비 시간이 끝나고, 마침내 준결승 제2경기가 시작되었다.
원래라면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터다. 이그넷과 일리아의 격렬한 싸움이 무대를 온통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허나 모든 마법사의 정점인 지아 룬텔이 힘을 쓴 덕에 생각보다 빨리 경기장이 구색을 갖추었다.
“이런 걸 보면, 마법도 가끔은 배우고 싶어진단 말이야.”
“그렇군요.”
“자넨 아닌가?”
“검만 수련하기에도 벅차서요.”
“요술도 다루는 사람의 대답이라기엔 이상하군.”
“하하, 그런가요.”
캄린 레이와 아이른 파레이라, 둘은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며 무대에 올랐다. 앞선 경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그넷과 일리아는 대륙 모두가 아는 악연으로 얽힌 사이다.
허나 둘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도 없다. 점잖고 선한 그들로서는 서로 시비를 걸 이유도, 험한 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조심하게. 사정 봐 가며 할 여유가 없어서, 조금 과할 수도 있네.”
“저 역시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검투 과정까지 얌전하고 말랑말랑할 리는 없었다. 심판의 인도에 따라 거리를 벌린 둘이 고개를 들었고, 눈을 빛냈다.
불꽃이 튀길 듯 뜨거운 시선 속에서 천천히 자세를 갖추는 검사들을 보며 관객들이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한쪽으로 무게추가 많이 쏠렸던 1경기와는 다르게, 2경기는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우세와 열세는 있었다.
대중은 캄린 레이의 승리 확률을 더 높게 봤고, 용사의 제전에 참가한 실력자들 역시 비슷한 의견을 표했다.
허나 이나시오 카라한만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녀석은 괴물이야.’
16강의 대결을 떠올린 남부의 신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검술, 육체, 오러의 기본기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마치 칠팔십 살 먹은 노인이 외모만 어려진 것처럼, 국면을 이끌어 가는 노련미마저 느낄 수 있었다.
감각 역시 날카롭게 벼려져 있는 게, 도대체 어떤 수라장을 거쳐 왔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아이른이 이긴다.
캄린 레이도 강하지만, 그래도 안 된다. 자신이 둘을 상대했을 때, 후자는 이길 가능성이 보이지만 전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무대를 향해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퍼어어어엉-!
“…….”
“…….”
“……!”
지면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일어날 정도로 강력한 기파.
그와 함께,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 날카로워진 중년인이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한 번. 단 한 번의 걸음으로 스치듯 아이른에게 접근한 그가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꽈아앙-!
“……!”
아이른이 이를 악물었다. 검을 쥔 손이 저렸다.
손바닥의 굳은살이 아니었다면 피가 흘렀을 정도로 무거운 일격이었는데, 회수하는 속도를 놀라우리만치 빨랐다.
다시 중단세. 다시 사선 베기.
반대편으로 날아오는 공격을 보며, 아이른이 강철(金)의 기운을 운용했다.
쩌어어엉-!
귀청을 찢는 소리가 경기장 가득 울려 퍼졌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의 관객들은 귀를 틀어막았고, 멀리 있는 이들조차 인상을 찡그린 채 둘의 모습을 바라봤다.
눈을 뗄 수는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공방이, 두 검사로부터 펼쳐지고 있었다.
쒜에에엑-!
무시무시한 빠르기로 날아드는 노란빛의 오러 소드가, 타격 시에는 잿빛으로 변한다.
그와 동시에 태산과도 같은 압박이 아이른의 검을 타고 전해진다. 신음을 흘린 그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중심을 잡았다.
그사이 펼쳐지는 검이 또 다른 색을 보여 주었다. 회수할 때는 파란색으로, 공격할 때는 보라색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오러와 그에 따라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는 검술을 마주하며, 아이른 역시 오행신공의 여러 가지 기운을 활용하려 애를 썼다.
스르륵
타격 순간 무게를 더하는 강격은 물(水)의 힘으로 흘려 버리고.
스팟!
터어엉-!
끝까지 속도를 잃지 않고 날아오는 송곳 같은 찌르기는 강철의 방패로 막아 낸다.
푸른빛을 머금은 변화무쌍한 검은 드넓은 대지(土)의 기운으로 중심을 잡아 대처하고, 허초와 실초가 섞인 보랏빛의 환영 검술은 불꽃(火)을 발산하여 걷어낸다. 깡그리 날려 버린다.
마치 여러 명의 검사가 번갈아 가며 실력을 뽐내는 듯한 광경에, 대중들보다도 실력자들이 더욱 놀란 반응을 보였다.
하나만 대성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건만, 저들이 익힌 검술이 과연 몇 가지나 된단 말인가?
심지어 개별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아니었다.
캄린 레이가 쾌검에 중검을 섞었듯,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여러 가지 기운을 섞어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했다.
“마치 카라쿰을 보는 것 같구만.”
“으음…….”
페이지 가주의 말에 클리포드, 프레스톤 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오행신공을 알고 있다. 조금이지만 수련했던 적도 있다.
그렇기에 저 어린 나이의 청년이 얼마나 대단한 수준으로 이를 다루고 있는지, 오크만큼은 아니어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확신했다.
저 정도로는 무리라고.
분명 그의 실력은 대단하기 그지없지만, 지금의 캄린 레이를 상대로는 한 수, 아니 한 수 반은 부족하다고.
그리고 잠시 후, 가주들이 자신감을 보이는 이유가 캄린 레이의 검 끝으로부터 발휘되기 시작했다.
피슉-!
“……!”
기습적으로 날아든 공격.
아이른이 고개를 돌려 이를 피해 냈다. 그리 치명적인 일격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정교한 컨트롤에 비하면 손색이 있는 수였으니까.
문제는, 그것이 단발성이 아니라는 점에 있었다.
피슉.
퓩, 퓨퓩
후우웅-!
날카로운 기운이, 음습한 기운이, 때로는 바윗덩이만큼 육중한 기운이 아이른을 향해 날아든다. 계속해서 날아든다.
잔상.
그것은 지금까지 아이른이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더 놀라웠다.
캄린 레이가 검을 휘두르고 지나간 자리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기운들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합공을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안 그래도 복잡하고 난해하게 자신의 품으로 파고들던 공격이, 더 다채롭게 날아들었다. 더 정신없이 쏘아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여러 명의 마스터를 상대하는 듯한 국면에 아이른의 표정이 굳어졌고, 그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표정도 나빠졌다.
대표적으로 이나시오 카라한이 그랬다.
데반 케네디를 쳐다본 그가 질문을 던졌다.
“알고 있었소, 선배?”
“몰랐지.”
“그럼 어떻게 확신했소? 캄린 레이 경이 이길 거라고…….”
“확신하진 않았네. 다만, 다양한 검술을 한데 엮고, 조합하고, 연계하여 풀어 가는 국면에서는…… 젊은이의 패기보다 중년인의 경험, 노련함이 더 중요할 거로 생각했을 뿐이지. 보게, 그 결과가 이거지 않나.”
“…….”
“캄린 레이는 자신이 가진 다재다능함을 가장 잘 발휘할 방법을 찾아냈고, 아이른은 그러지 못했네.”
아쉽지만, 승부는 정해진 것 같군.
데반 케네디가 확신하듯 말했고, 랄프 펜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얼마나 버틸지가 관건이겠지.”
서부의 검사들이 결론을 냈다. 남부의 신성은 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들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날카롭고 정교하게 이어지는 검술과, 그 사이를 절묘하게 파고드는 제2의 공격 수단.
마치 브랫 로이드의 파도 검술을 더 유연하게 활용하는 듯한 모습이었고, 실제로 아이른은 이에 대해 뾰족한 대처 수단을 찾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점점 더 지쳐 가는 모습이, 거칠어지는 호흡이 이나시오 카라한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힘들겠군.’
‘어렵겠어.’
검술관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곁에 있는 이안의 눈치를 보느라 말을 아끼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캄린 레이의 승리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숨겨 놨던 실력이 생각보다 대단했다. 지금 그가 보여 주는 모습은, 약간의 과장을 추가하면 5대 가주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
그런 일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크로노의 검술관주는 말을 아꼈다.
제자의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도.
제자의 검술을 지켜보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의 그가 들여다보는 것은 제자의 마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자신의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과거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고민하여 찾아낸, 피워 낸, 가꿔 낸 무언가로…….
전생의 사내가 만들었던 쇳덩이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그것은, 홀로 외롭게 두드려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잔인하고 냉혹한 현실만큼 차가운 것도, 피의 복수를 행하기 위해 날카로이 다듬어진 것도, 결코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의 품에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이어받아, 자신의 꿈과 신념으로 오롯이 키워 낸 거대한 나무.
그것은 홀로 키워 낸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기에 고독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튼튼할 수 있었다.
이안 관주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마침내, 자신의 검을 완성했구나.”
10분이 지났다.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고, 그만큼의 시간이 더 지났다. 그동안, 캄린 레이의 공격은 계속해서 쏟아졌다.
그치지 않는 바람과 비처럼 끈질기게 아이른 파레이라를 괴롭혔다.
그러나, 쓰러지지 않았다.
꺾이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후우, 후우.”
“후욱, 하아…….”
거친 숨소리가 교차하는 무대의 위에서.
캄린 레이는, 자신의 검으로는 절대로 청년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였다.
허허, 웃으며 검을 늘어뜨린 그가 무대 밑의 심판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졌소.”
“…….”
“패배를 인정하겠소. 승자는 아이른 파레이라요.”
바야흐로, 결승 무대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