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323화 (323/388)

◈ 105. 벼르고 있었다 (2)

“음…… 뭐지…….”

“뭐가?”

갑작스레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친구를 보며, 코가 큰 관객이 질문을 던졌다.

용사의 제전을 보기 위해, 세계 최강의 검사들을 직접 마주하기 위해 아이젠마르크트부터 신성왕국의 수도까지 먼 길을 온 그들이다.

검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둘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경기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봤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즐겨왔다.

물론 모든 참가자를 공평하게 응원하는 쪽은 아니었다.

세계가 하나라곤 하지만, 어찌 됐건 그들은 자부심 높은 서부 출신들!

기왕이면 서부 5왕국의 검사가 승리하길 바랐고, 5대 검술명가의 인물이 우승하기를 바랐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객관적으로 일리아 린제이가 열세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둘은 아단 왕국의 천재를 응원하기로 굳게 마음먹은 상황이었다.

커다란 종이에 반짝이는 형광물질로 ‘일리아 린제이, 파이팅’이라는 문구까지 써서 준비해 올 정도였다.

그런데…….

홱!

“야! 뭐 하는 거야?”

“……그러게.”

큰 코의 관객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응원 문구를 바닥에 내팽개친 이 역시 당황했다. 자신도 자신의 행동이 잘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허나 이를 후회하지는 않았다.

멍하니 준결승 첫 번째 무대에 오른 두 참가자를 살펴보던 그가, 천천히 친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나, 이그넷 응원할래.”

“뭐? 그게 무슨…… 야! 미쳤어?”

“몰라. 모르겠어.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

“이, 이그넷! 이그넷 크레센시아 파이팅!”

소심한 태도로, 허나 이내 커다란 목소리로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응원하는 그.

그런 친구의 모습을 멍청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뒤에서도 굵은 음성이 들려왔다.

“이그넷, 이그넷 크레센시아! 힘내!”

“이겨! 꼭 일리아 린제이를 이겨!”

“이그넷! 이그넷! 이그넷!”

‘아니, 저 사람들은 또 왜…….’

큰 코의 관객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뒤편을 쳐다봤다.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서부 출신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오다가다 마주치며 주워들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기보다 더욱 열렬한 대륙 서부 지지자들이 저들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이들이 하나같이 일리아 린제이가 아닌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응원하고 있다.

“뭐야?”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렇게 이그넷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

“야! 너 갑자기 왜 그래?”

“모, 몰라. 그냥 갑자기,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

그야말로 이유를 알 수 없는 현상.

자신조차 이유를 모르는 상태로 정말 많은 이들이 흑기사단장의 승리를 외쳤고, 갑자기 바뀐 주변의 분위기에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한 혼란 속에서, 예전보다 한결 차분해진 요술사, 아냐 마르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단장의 마음에 물들었네.”

“뭐?”

“연인에 대한 불쾌감. 커플에 대한 분노. 그로 인한 불꽃이,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나 봐.”

“……그런 게 가능해?”

“아냐도 처음 보는 현상이긴 한데, 그거 말고는 설명이 안 되네.”

“…….”

“아마 지금 단장을 응원하는 사람들, 대부분 연인이 없는 상태일 거야.”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곧바로 따지고 싶었던 게오르그 포이베다.

하지만 아냐의 표정이 워낙 진지했고.

일리아 린제이를 마주한 단장의 표정은 그보다 더욱 진지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눈빛을 뿜어내는 자신의 상관을 보며, 그가 중얼거렸다.

“이게 뭔…….”

* * *

펑!

퍼버버벙! 퍼엉-!

콰아아앙-!

“큽!”

돌진, 그리고 강격!

이그넷의 검을 막아 낸 일리아가 표정을 찡그렸다. 그녀가 뒤로 물러났다. 정교한 오러 컨트롤과 바람의 힘을 이용하자 속도가 엄청났다.

허나 이그넷의 진격 속도는 그보다 더욱 빨랐다.

퍼엉-!

콰아앙!

“크읍!”

불꽃이 폭발한다. 이그넷의 발치에서 벌어지는 현상으로, 그로 인한 반발력을 이용하여 순간적으로 어마어마한 빠르기로 접근할 수 있었다.

심지어 보법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퍼엉-!

검에서 피어나는 폭발이 내려긋는 동작에 가속을 일으키고.

콰앙-!

연이어 터져 대는 불꽃들이 강제로 검의 경로를 뒤바꾼다. 거칠기 그지없는 방식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과 무시무시한 속도, 파괴력을 손에 넣은 이그넷은 상대를 시종일관 압도하고 있었다.

“마치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길을 보는 것 같소, 선배.”

“동감이네. 저 정도로 격한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걸.”

관객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율리우스 휼과 퀸시 마이어스가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로서는 이그넷이 왜 저런 모습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연인이니, 이성과 교제니 하는 것을 수십 년 전에 내려놓은 그들로서는 그녀의 마음에 영향받기 힘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검술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을 배제한 채 더욱 객관적으로 둘의 실력을 평가할 수 있었다.

“이그넷이 이기겠군.”

“당연한 걸 말하나. 그래도…… 많이 성장했어. 일리아 린제이.”

“으음.”

율리우스 휼이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지금 경기장에 모인 모든 관객들은 화려하게, 사납게, 거칠게 몰아치는 이그넷의 검술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다.

더욱 기세를 높여 가는, 건조한 날의 산불처럼 거대해지는 그녀의 존재감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은 합이 어느 정도 맞기 때문이지.’

율리우스 휼이 지금까지의 경기들을 떠올렸다.

죄다 순식간에 끝이 났다. 이그넷이 불을 뻗칠 수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명멸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찰나 만에 승패가 결정되었기에, 흑기사단장은 제대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받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힘들게나마 그녀의 검을 막아 내고 있는 일리아의 실력은 박수를 받아 마땅했다.

퍼어엉-!

사납게 옆구리에 꽂히는 검을 풍압으로 막아 내고.

쒜에엑-!

목을 노리고 뻗어가는 찌르기를 상체를 젖혀 피한 뒤, 관성에 맞지 않는 방향으로 거리를 벌린다.

어떨 때는 상대의 불길을 피하고자 무대 바깥으로 몸을 던진 뒤, 바람을 밟고 되돌아오기도 했다.

‘마치 하늘의 일부인 듯 자유로운 움직임이야. 이건 단순히 검술에 국한된 깨달음이 아니군.’

퀸시 마이어스가 생각했다.

그렇다. 다른 것을 도외시한 채 검술에만 매몰되었다면, 날카로움은 더해졌을지언정 저렇든 가볍고 창의적인 몸놀림을 보일 순 없었을 터다.

지금의 일리아는 마치 오랫동안 품고 있던 짐을 덜어낸 듯했다. 커다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보기 좋군.”

“맞소.”

두 늙은 성기사가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는 이번 용사의 제전을 흑기사단장을 자랑하기 위한 쇼라고 폄하했지만, 이것 봐라.

이그넷만큼이나 빛나는 젊은 인재들이, 이렇게 많지 않은가?

신의 품으로 돌아갈 날이 머지않은 그들로서는 지금이 기껍기 그지없었다.

웃음이 나면서 눈물이 날 정도로, 종일 지켜보고 싶을 정도로 기쁘고 복받쳤다. 나이 지긋한 성기사들 모두가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허나 그럴 수는 없었다.

오 분이 지나고, 십 분이 지나고.

그동안 내내 방어에 열중하던 일리아 린제이가, 거리를 벌린 뒤 빠르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뭐야?”

“뭐라고 하는 거야?”

관객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둘이 뭐라 뭐라 대화하는 중인데, 소리가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허나 그들의 궁금증은 얼마 가지 않아 풀렸다.

마치 처음 시합을 시작하는 것처럼 위치를 잡은 둘의 몸에서,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이를 지켜보던 이안 관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 수에 결판을 내자고 합의를 봤군.”

“흑기사단장이 배포가 크군요.”

“그렇지. 이미 이긴 싸움인데 말이야.”

“이미 이그넷의 승리라고 봐도 되겠어.”

다른 관주들 역시 요셉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의 말마따나, 지금과 같은 흐름이 계속 유지되었다면 어느 쪽이 패배할지는 불을 보든 뻔했기 때문이다.

허나 이그넷은 상대가 자신의 모든 것을 선보이고 갈 수 있도록 배려를 보였으니, 이미 승패는 지금의 격돌과는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일리아 린제이 또한 알고 있었다.

‘내가 졌어.’

은발의 검사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단했다. 굉장했다.

이그넷 크레센시아는, 자신의 오빠를 무참히 패배시킨 장본인은 자신의 상상 속 모습보다도 더욱 강했고, 더욱 뜨거웠으며, 더욱 사나웠다.

그러나 증오스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분노가 끓어오르지는 않았다.

그럴 거로 생각했지만, 실제로 마주한 와중에도 정말 그러니 신기했다. 피식 웃은 일리아가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내가 싫어했던 건, 없애 버리고 싶었던 건 이그넷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구나.’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에 휘둘려 자신을 잃어버릴 일도 없고.

쓸데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자신을 상처입힐 일도 없다.

자신을 사랑해 줄 것이다.

모든 것은 거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자기를 사랑하고, 아껴 주고, 인정하고, 칭찬해 줄 수 있어야만 타인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 왜곡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어느새 불어온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씻어 주었다.

파앗!

후우우우웅-!

“……!”

“……!”

일리아 린제이로부터 뿜어져 나온 기운이, 속도를 더했다. 위력을 더했다.

일반적인 오러가 아니었다. 태풍, 아니 광풍이라 표현할 정도로 사나운 바람을 확인한 5대 가주가 번쩍하고 눈을 떴다.

디온 린제이로부터 탄생한 하늘검의 최후 비기.

완벽하진 않지만, 그 위압감의 일부나마 빌려왔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웠다.

그녀의 천재성에 소름이 끼쳤고, 그녀의 미래를 떠올리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푸화아아악-!

그때, 이그넷의 몸에서도 거친 기운이 폭발했다.

모든 이의 시선을 잡아끌 정도로 높게 치솟은 불꽃.

그것이 압축되고, 압축되고, 압축되었다. 몸이 아닌 검으로, 검날이 아닌 검 끝으로.

우우우웅, 미세한 진동음과 함께 형성된 붉은색의 오러 구체를 보는 순간, 모든 관객들이 꿀꺽 마른 침을 삼켰고.

직후, 격돌이 벌어졌다.

“…….”

“…….”

“…….”

“……또 한 번 고맙군.”

“흥.”

이번에도 재빨리 마법 결계를 만들어 낸 지아 룬텔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들의 대화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고요함 속에서 흙먼지가 가라앉길 기다렸다.

승부의 향방이 어떻게 되었을지를 알기 위해 눈이 빠져라 무대를, 마법 화면을 주시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지면에 우뚝 서 있는 이그넷 크레센시아.

무대 밖으로 날아가 쓰러져 있는 일리아 린제이.

승자가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스, 승리! 이그넷 크레센시아!”

환호가 뒤따랐다. 누군가는 커다란 목소리로 이그넷의 이름을 연호했고, 누군가는 점잖은 박수를 보냈다.

잘 싸운 일리아의 이름을 외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듯 쏟아지는 응원과 격려 속에서 자신의 검을, 그리고 일리아의 검을 바라보던 이그넷이 조용히 말했다.

“그 검, 불카누스가 새로 만들어 준 것이냐?”

“…….”

“과연, 쓸 만하군. 나의 검에도 부러지지 않았다니 말이야.”

이 말을 들은 일리아가 기침 섞인 웃음을 쏟아낸 뒤, 고개를 들어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음?”

“검만 좋아서 부러지지 않은 게 아니잖아요? 검을 든 사람도 실력이 있었으니까 그럴 수 있었던 거지.”

“…….”

“…….”

“…….”

“아님 말고.”

자리에서 일어난 은발의 검사가 툭툭,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담담한 표정.

태연함을 가장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감이 충만한 태도.

패배를 전혀 개의치 않는 그녀의 모습을, 흑발의 검사가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하, 하하. 하하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일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지지 않겠다는 듯, 연신 피가 섞인 기침을 쏟아내면서도 큰 소리로 웃어 대는 모습. 이것이 관객들에게 꽤 기괴하게 비쳤다.

이를 마법 화면으로 지켜보던 캄린 레이가 아이른 파레이라에게 물었다.

“자네 연인, 괜찮은 거 맞나?”

“……아마 괜찮을 겁니다.”

이 말 말고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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