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벼르고 있었다 (1)
바야흐로 용사의 제전 준결승의 대진이 정해졌다.
대륙에서 고르고 고른, 인간계의 미래를 책임질 128명의 검사.
그중에서도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별들은, 결과적으로 대륙 서부와 중부에서 나왔다.
“결국, 또 이렇게 되는 건가?”
“이번에는 좀 다를 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데반 케네디도, 이나시오 카라한도 만만한 인물들은 아니었잖아? 그런데 20대 소드마스터들이 그렇게까지 강할 줄이야…….”
“크로노 검술관이 또 한 번 증명한 셈이지. 대륙 최고의 검술관이라는 걸 말이야.”
“마칸 왕국은 속깨나 쓰리겠어. 쟈롯도 엉망진창이었고, 자쿠앙은…….”
“쉿. 저 사람 남부 출신이야. 조용히 해.”
그렇다. 캄린 레이라는 유력한 우승 후보가 있긴 했지만, 동부와 남부에서도 충분히 비벼 볼 만하다고 평가받던 대회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젊은 층에서 엄청난 이변들이 연이어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서부 출신 2명, 중부 출신 2명이라는 뻔한 준결승 대진이 탄생했다.
타 지역 출신 입장에서는 아쉬움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가올 4강이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 같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기대되는군. 그것도 엄청.”
“그러니까. 기왕이면 중부, 서부에서 한 명씩 올라갔으면 좋겠는데…….”
“그게 가장 좋지. 아예 젊은 쪽, 그러니까 아이른이 승리해서 완전히 대회의 취지에 부합하는 결승이 나오길 바라는 사람들도 많기는 하지만, 솔직히 그럴 가능성은 적을 것 같긴 하고.”
“음, 나는 충분히 해 볼 만한 싸움이라고 생각하는데…… 뭐, 그거야 각자 의견이 분분할 거고. 하여튼 기대되는구만.”
“그렇지.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어.”
“서부 출신으로서, 나는 캄린 레이와 일리아 린제이가 올라갔으면 좋겠어.”
“나도.”
“나도 그렇긴 한데…… 그건 좀 많이 힘들지 않을까?”
흥분으로 가득 찬 수도의 분위기 속에서, 여론은 대륙 서부보다는 대륙 중부 출신의 전력을 더 인정해 주는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도박판 배당률로 따지자면 이그넷 크레센시아, 캄린 레이, 아이른 파레이라, 일리아 린제이 순으로 우승에 가깝다.
그 말은, 중부 출신끼리의 결승은 있을 수 있어도 반대는 성사되기 어렵다는 뜻과 동일했다.
“허허, 아쉽구만. 검술 하면 대륙 서부가 첫손에 꼽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러게 말이야.”
몇몇 노인들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마룡왕의 목을 벤 전설적인 영웅, 디온 린제이를 필두로, 지난 400년간의 검술계는 서부가 지배하고 있었다.
아무리 신성왕국의 역사가 깊고 성기사들이 대단하다고 할지언정, 5대 검술 명가의 아성을 넘기는 힘들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대륙 최고의 스승이라 평가받는 크로노의 주인, 이안.
그런 그의 영원한 라이벌, 쿤.
거기에 더해, 역대 최고의 성기사라 추앙받는 율리우스 휼.
대륙의 3강 모두가 중부에서 나온 순간부터 ‘검술하면 서부!’라는 자부심은 옛말이 되었다.
거기에 더해 이그넷 크레센시아마저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이는 상황이니, 옛 영광을 떠올리는 늙은 검사들의 마음은 착잡할 수밖에 없었다.
‘쉽지 않겠지.’
그러한 마음은, 서부의 기둥들이라 할 수 있는 5대 검술명가의 가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그들이 훨씬 먼저 알고 있었다. 흑기사단장의 경지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을 말이다.
32강이 되어서야 눈이 휘둥그레졌던 대중들과 달리, 가주들은 1년 전부터 이그넷의 실력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대륙의 강자들을 들쑤시고 다녔던 것이 바로 그때였기 때문이다.
‘……그때로부터 하나도 발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승에는 문제가 없었을 터.’
조슈아 린제이가 과거를 떠올렸다.
자신의 전력을 마주하고도 물러서지 않았던, 하늘을 지배하는 자신보다도 더 높이 올라갈 준비를 하던 흑발 검사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이그넷과 맞붙었던 5대 검술가주 모두가, 그녀의 무지막지한 성장 속도에 질려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봤을 정도니까.
허나, 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세대가 저물었음에 울적해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신성왕국의 떠오르는 태양만큼이나 가파르게 치솟는 서부의 천재를 바라봤다.
그렇다.
지금 이곳에 다섯 가주들이 전부 모인 이유는. 그들이 젊은 시절에 비견될 정도로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이유는.
그들이 가르치고 있는 존재가 다름 아닌 ‘일리아 린제이’이기 때문이었다.
쾅! 콰앙!
쾅-!
“정신 차려! 왼쪽이 비었다!”
“크읍, 옙!”
쒜에에엑-!
“대답할 정신이 어딨어! 나는 안 보이나!”
“크으윽……!”
강격으로 유명한 클리포드 가문의 가주가 호통치며 검을 휘두른다.
마치 거목을 뽑아 휘두르는 듯한 그의 모습은, 대검으로 유명해진 아이른이 뿜어내는 압박감보다도 엄청났다.
헌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려 둘이었다.
쿤이라는 최속의 검사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대륙에서 가장 빠른 검술을 구사한다고 알려졌던 프레스톤의 가주 역시, 날카로운 눈으로 일리아 린제이를 관찰하며 검을 찔러 넣고 있었다.
“장소의 제약에 묶이지 마라. 중력의 상식에 얽매이지 마. 네가 다루는 것은 바람이다. 면이 아닌 공간으로 생각하고 끊임없이 변수를 만들고, 임기응변을 쏟아내라. 그래야 비빌 수라도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페이지 가주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끊임없이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검술 지식만으로는 세상 전체를 상대로도 패배하지 않을 거라 알려진 인물답게 조언 하나하나가 적절했다.
이론에만 갇혀 있는 낡은 지식도 아니었고, 파격에만 집중하여 중심이 없는 느낌도 아니었다.
쉴 틈 없이 말을 내뱉는 그의 지도 역시, 실전 대련을 이어 가는 두 가주만큼이나 날카롭고 쓰라리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허나, 일리아 린제이는 그 모든 가르침을 흡수했다.
힘들어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고, 괴로워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구슬땀을 흘리며 몸을 움직이고, 머리를 회전하고, 본능을 일깨우는 그녀로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평생토록 천재 소리를 들으며 자라 왔던 5대 가주들로서도 거의 마주치지 못했던, 특별한 기도.
지금껏 잠자코 있던 레이 가문의 우두머리, 앨런 레이가 말했다.
“벽을 깼군.”
“그렇소.”
“이그넷을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야. 우리와 격이 달라. 그런 재능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빼 주시오. 나도 저 정도는 되니까.”
“자네는 언제 봐도 건방지군.”
“하지만 사실인걸. 불만이면 한판 하시든가.”
“선배 취급 좀 해 주면 어디 덧나나?”
“선배 취급이란 게 뭔지 설…….”
“그만. 더 지껄이면 자네 아내에게 이르겠네.”
“…….”
“이제 좀 조용하군.”
레이 가주가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조슈아 린제이의 공처가 기질 때문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일리아 린제이의 성장 때문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성장이란, 검술의 성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 자체가 성장했어.’
칼 린제이의 칩거, 그리고 실종.
이는 앨런 레이에게 있어서 단순한 가십거리 수준이 아니었다.
장차 서부를 이끌 인재라고 생각했던 젊은이가 좌절하고, 몰락하는 것을 넘어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것.
그리고 그 사건이 린제이 가의 두 번째 천재인 일리아 린제이의 마음을 닫아 버렸다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 대륙 서부의 쇠퇴를 알리는 신호처럼 보였을 때도 있었으니까.
허나, 기우일 뿐이었다.
그가 더욱 또렷한 시선으로 앞을 바라봤다.
칼 린제이로부터 비롯된 어둠을 걷어내고, 이그넷 크레센시아에게 쏠렸던 집착에서 벗어난.
그리하여 온전히 껍데기를 깨고 나온 일리아 린제이를 꼼꼼히 눈에 담았다.
단순히 지금 순간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어쩌면 디온 린제이의 아성을 넘을지도 모를 진정한 천재의 앞날을 떠올리며, 그가 엷은 미소를 그릴 때였다.
“그런데, 선배까지 여기 있어도 되겠소?”
“음?”
“4강 진출자가 우리 딸만 있는 건 아니지 않소. 캄린 레이 경이 서운해할 것 같은데…….”
“흠. 그놈은 괜찮다.”
레이 가주가 고개를 끄덕였고, 조슈아가 그의 얼굴을 살폈다.
항상 무표정한 양반이고, 지금도 그렇긴 했다.
허나 그러한 가운데 왠지 모를 자신감이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뭔가 있나 보군.”
“성취가 있긴 했지.”
“방심하진 말라고 전해 주시오, 아이른도 만만한 놈은 아니니까.”
“허허. 자네, 이젠 대놓고 사위까지 챙겨 주는 건가?”
“…….”
“응? 표정이 왜 그러나?”
“……아직 사위는…… 아닙니다…….”
“뭐, 그럼 그런 거로 치지.”
“…….”
“흠, 일리아가 자네를 닮지 않아서 참 다행이군.”
깊어가는 밤 속에서 나직이 중얼거리는 앨런 레이 가주와, 그런 그를 보며 주먹을 꽉 쥐는 조슈아 린제이 가주.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다가오는 시합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리아 린제이였다.
* * *
“와아아아아아!”
“이그넷! 이그넷! 이그넷 크레센시아!”
“일리아 린제이! 아단 최고의 천재!”
“디온 린제이의 화신! 우와아아아아악!”
“서부의 자존심을 보여 줘!”
“신성왕국에 영광을!”
그럼, 다녀올게.
은발의 검사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이른은 언제나처럼 맑게 웃었고, 연인에게 가벼이 입을 맞췄다.
살짝 붉어지는 볼도 쓰다듬었다. 캄린 레이가 허허 웃으며 중얼거렸다. 좋을 때군.
그것이 대기실에서의 마지막이었다.
열렬한 환호와 빛나는 햇살이 쏟아지는 무대로 나아가며, 일리아 린제이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의 나는, 성장했어. 그것도 꽤 많이.’
자만이 아니다.
자신감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당당하게 말할 뿐이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이럴 수 없었을 터다.
시합 전날부터 오늘이 걱정되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을 테고, 너덜너덜한 상태라는 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대기실 내내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겠지.
5대 가주들께 도움을 청하지도 못했을 테고, 지금처럼 이그넷 크레센시아와 함께 걸어나가며 평정을 유지하지도 못했을 터다.
‘……굳이 정정하자면, 평정까지는 아닌가?’
상대를 마주하며, 일리아가 생각했다.
그렇다. 아무래도 평정까지는 아닌 듯싶었다. 허나 예전의 부정적인 느낌은 확실히 아니었다.
바닥에 떨어진 자존감으로 인한 타는 듯한 집착은 사라졌고, 건강한 호승심이 지금의 그녀를 빛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그넷 역시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역시 예전과 다른 점이었다. 과거의 그녀는 자신을 쳐다보지 않았다. 일절 흥미 없다는 눈빛으로, 표정으로 지나칠 뿐.
‘좋아, 힘내자.’
후우, 은발의 검사가 제자리에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시원한 바람이 그녀 주변을 휘감았다.
지금은 산들바람에 불과하지만, 마음먹는 순간 언제라도 거대한 태풍이 되어 상대를 집어삼킬 수 있는. 태양을 떨어뜨릴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기운.
물론 상대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태양처럼 뜨거운 기세를 뿜어내는 이그넷을 바라보며, 일리아가 전투 양상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화르르르륵-!
“…….”
“…….”
“…….”
뭔가 이상했다.
상대의 기운이, 상대의 눈빛이 더욱 뜨거워졌다.
단순한 투기가 아니었다. 마치 증오스러운 존재를 부수고 싶다는, 파괴하고 싶다는 의지가 사납고 두렵게 전해져 왔다.
이상할 정도로 처절한 느낌이었다.
‘뭐지? 갑자기? 이제 와서?’
일리아가 당황했다.
상대와 악연으로 묶인 사이라곤 하지만, 그건 사고일 뿐. 둘 사이에 쌓인 악감정은 없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그넷이 이런 반응을 보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리아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사랑이란…….”
“……?”
이그넷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때까지도 일리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도대체 싸움 직전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런 생각으로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허나 상대의 뒷말을 들은 순간, 깨달았다.
“연애란…… 커플이란…… 불쾌한 것.”
“…….”
“부숴 주마. 두 녀석 다.”
“……!”
자신과 아이른이 대기실에서 보였던 애정행각이, 누군가를 자극했을 수도 있다는 점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