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물의 검 (3)
“하, 하…….”
서부 검술 도시 라티온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강자, 카리사 플로이드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만이 아니었다. 이미 브랫 로이드가 파도의 검을 펼쳤을 때부터 검술관주들은 모두 일어나 있는 상태였다.
푸른 머리의 청년이 보여 준 검술은 그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16강에서 봤던 주디스의 것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감과 본능으로만 이루어진 주디스의 검에 비해, 저 아이의 검은 훨씬 더 치밀한 계산 하에 펼쳐졌지. 그런 점에 집중해서 보면 더 대단하다 볼 수도 있어. 현재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길도 계산이 서는 느낌이니까.’
그야말로 32강, 16강에서 보여 줬던 활약을 압도할 만한 한 수!
허나 카리사 플로이드가 헛웃음을 보인 건, 애석하게도 브랫 로이드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이 상대측 검사, 아이른 파레이라 쪽으로 향했다.
자연스레 누군가가 떠올랐다.
힐끗 이안 관주 쪽을 쳐다본 플로이드 관주가 과거를 떠올렸다.
‘물을 베는 검이라니. 저 나이에…… 어처구니가 없군.’
지금이야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되어 라티온을 떠나지 않고 있지만, 젊었을 때는 그녀 역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수행을 했던 경험이 있다.
온갖 곳을 들쑤셔 놓은 탓에 무뢰배 소리를 들었던 적도 있었고, 시비도 꽤 자주 붙었었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의 검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크로노 검술관을 찾아가 보게.’
그렇든 안하무인이었던 그녀에게, 악우(惡友)인 요셉 관주가 넌지시 제안했다.
의도야 뻔했다. 적당히 나대라고. 하늘 위의 하늘이 있으니 주제 파악 좀 하고 얌전히 지내라고.
물론 카리사 플로이드는 거절하지 않았다.
물론 상대가 대륙의 10대 검사, 그 이상의 경지로 나아가고 있는 괴물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분명 자신보다 강할 터였고, 대단할 터였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결국에는 자신이 더 높이 올라갈 것이다.
지금 당장 이안의 경지에 도달할 수는 없더라도, 그가 내뻗는 검에 담긴 기교를, 위력을, 진의를 파악하고만 와도 남는 장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부터 남의 비전을 자기 방식으로 소화하는 데 재능이 있었던 그녀이기에, 오히려 크로노의 주인과의 만남이 더욱 기대되었다.
‘기다려. 내가 이안 관주 밑천 싹 털어서 올 테니까.’
그렇듯 당찬 말을 내뱉고 알칸트라로 향하고 2년.
평범한 철검으로 호숫물을 가르는 이안의 검을 목도한 뒤로, 카리사 플로이드는 소드마스터들 사이에서도 ‘격’이란 게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었다.
‘여전히, 여전히 나는 그때의 검을 이해할 수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재앙처럼 무너져 내리는 파도와 해일. 그야말로 천재지변이라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을 무지막지한 한 수였다.
비록 반칙에 가까운 기술이라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저것의 위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라면 막아 내지 못했을 터였다. 가까스로 막아 냈다 쳐도 온몸이 너덜너덜해졌겠지. 더는 검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헌데, 저 금발의 아이는 이를 너무나도 평범한 검으로 막아 냈다. 오러 소드조차 두르지 않고. 어떠한 기교조차 부리지 않고.
‘……아마, 평범한 것은 아이른의 검이 아닌, 나의 눈이겠지.’
카리사 플로이드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수십 년 전, 이안 관주가 아무렇지 않게 휘둘렀던 그 검을 재현하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했다.
어떻게든 그의 비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고, 추할 정도로 발버둥 쳤다. 좋게 말하면 독기였고, 나쁘게 말하면 집착이었다.
이제는 알았다.
저 검은, 선택받은 자만이 다룰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은 선택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말없이 상대를 바라보고 있는 푸른 머리의 검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장내가 적막에 휩싸였다.
평범한 관객들은 싸움의 양상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주디스가 16강에서 보여 줬던 것처럼 거대한 기운이 솟구쳤다는 것까지는, 그것이 아이른 파레이라를 향해 무섭게 쏟아졌다는 것까지는 이해했으나, 그 힘이 어찌하여 순식간에 증발했는지는 대부분 깨닫지 못했다.
허나 그들조차도 분위기는 읽을 수 있었다.
브랫 로이드의 회심의 한 수는 실패했고, 이제 그에게 남은 카드는 없다.
패배가 확정된 상황 속에서, 왠지 모를 처연한 분위기 속에서 모두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무대를 바라봤다.
심지어 중립을 지켜야 할 심판조차도 마찬가지였다.
휘익
휙- 휘익!
“…….”
“와라.”
그런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푸른 머리의 검사가 전투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깜짝 놀랐다.
다른 사람도 대충 눈치챘겠지만, 그는 더욱 정확히 알 수 있다.
요술을 각성한 그의 눈은 상대의 체내에 남은 오러의 양을 살필 수 있으니까. 현재 브랫의 몸에는 오러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만만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빈말이 아니었다.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친우의 눈빛은, 마치 주디스의 그것을 보는 것처럼 거칠고 광폭했다.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릴 정도로.
“와라. 아직 안 끝났다.”
“…….”
“아니면 내가 갈까?”
“아니, 내가 간다.”
아이른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금 기운을 끌어올렸다.
키이이잉- 여력이 남은 그의 몸이 단단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강철(金)의 오러였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 준, 그 어떤 기운보다 익숙하고 편안한 힘.
거기에…….
화르르륵-!
불꽃이 더해졌다.
새빨갛게 달구어져 황금색으로 빛나는, 아이른 파레이라의 모습도.
여전히 거친 눈빛으로 일관하는 브랫 로이드의 모습도, 모두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이를 주디스도, 일리아 린제이도, 이그넷 크레센시아도 조용히 지켜봤다.
캄린 레이는 지그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했고, 관객석의 강자들 역시 저마다의 방식으로 둘의 마지막을 머리에 담았다.
“……모두.”
그러한 군중 속에서.
“……모두, 고생했다.”
물기 섞인 이안 관주의 혼잣말이 울려 퍼졌다.
부관주 케이라 핀과 교관 아메드, 카라카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그마한 목소리였다.
* * *
용사의 제전 8강 토너먼트가 모두 마무리되었다.
이변은 없었다. 캄린 레이와 이그넷 크레센시아는 손쉽게 상대 검사를 꺾었고, 일리아 린제이 역시 쉬운 승리를 따냈다. 일
반 관객들에게는 의외일 수 있으나, 진짜 강자들은 일찌감치 그녀가 쟈롯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브랫 로이드와 아이른 파레이라의 경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자가 예상을 초월한 한 수로 많은 이들을 경악시키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대가 너무 나빴다.
“브랫 로이드!”
“브랫 로이드! 거베라의 자랑! 거베라의 별!”
“응원한다! 앞으로도 계속 응원할 거야! 응원할 거라고!”
“힘내! 브랫 로이드!”
허나 이 푸른 머리 검사에 대한 반응은, 이전 3경기의 패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모두가 그를 응원했고, 격려했다. 심지어 데반 케네디에게 보였던 예의 없는 행동 때문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이들마저 그러했다.
‘하긴, 누구라도 그렇겠지. 저런 모습을 보면.’
힌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패배가 확실한 상황.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한 수가 파훼되어 충격이 클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랫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투지를 보여 줬다. 상처 따위 전혀 받지 않은 사람처럼 상대를 도발했고, 최선을 다해 맞서 싸웠다.
실제로 여력이 없는 와중에도 아이른의 검을 13번이나 받아 내는 데 성공했다.
“대단하단 말이지.”
“그렇지. 정신력이 장난이 아니야.”
“지금도 대단한데, 오히려 미래가 더 기대될 정도야.”
“그러니까.”
주변 기자들이 브랫을 향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물론 검에 대한 지식이야, 진짜 검사들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그들이다.
허나 오랜 세월 검투판에서 구른 덕분에, 어떤 타입이 더 높이 올라갈지는, 누가 옥이고 누가 돌인지는 대충 구별이 가능했다.
기자들이 볼 때, 저 푸른 머리의 청년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강해질 게 분명했다. 장담할 수 있었다.
“브랫 로이드! 브랫 로이드!”
“브랫 로이드! 브랫 로이드!”
“브랫 로이드! 우아아아아아아!”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정중한 예의를 표하고 경기장을 떠나는 거베라의 고위 귀족. 그의 모습에 모두가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냈다.
일찌감치 모든 참가자가 떨어진 동부 출신들도, 쟈롯의 형편없는 패배에 우울해 있던 남부 출신들도, 북부와 중부, 서부 출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격려 속에서, 브랫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경기장을 떠났다.
* * *
“하하, 괜찮습니다.”
“아니, 그래도 그렇게 격렬한 싸움을 했는데…….”
“사제분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아이른도 마지막에 사정을 봐 주기도 했고…… 제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안 좋으면 안 좋다고 말합니다.”
“네 성격에 대해선, 나쁘다는 것밖에 모르는데…….”
“……농담이 과하십니다, 어머니.”
“농담 아닌데.”
“애초에 아들 건강이 그렇게 걱정됐으면, 술 마시는 것부터 만류했어야 정상 아닙니까?”
“술은 약이지. 소독제고.”
“암, 그렇고 말고.”
“어머니 아버지 말이 맞습니다, 형님.”
“……아무튼, 다녀오겠습니다.”
용사의 제전 탈락이 확정된 당일, 브랫 로이드는 가족들과 조촐한 파티를 벌였다.
그렇다. 이건 축하받을 일이지 위로받을 일이 아니다.
무려 128명의 강자들이 참가한, 대륙에서 가장 큰 검투 대회에서 8명 안에 들었다.
굳이 순위를 매기자면 5등 정도는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는 뜻이다.
“물론 여기서 만족할 수는 없지.”
나는 브랫 로이드.
언제 어느 때나 정진하는 남자.
담담하면서도 느끼한, 신기한 톤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가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있었던 경기를 복기하며 더 나은 앞날을 꾀하기 위함이었다.
쒜엑-!
‘조금 더 여력을 남겨 놨으면 어떨까? 녀석이 파도를 가른 직후를 노려서, 내가 돌격했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검 하나에 생각 하나를 담고.
쒜에엑-!
‘아니면, 여러 번에 걸쳐서 쏟아냈어도 좋았을 것 같아. 저런 기술을 연달아 펼칠 수 있을 것 같진 않으니까. 내가 조급했다. 멍청했어.’
검 하나에 반성 하나를 담는다.
그렇다. 충분히 더 좋은 국면을 끌어낼 수 있었다. 브랫의 머릿속에 후회와 아쉬움으로 점철된 생각들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쳐 그를 괴롭혔다.
점점 더 거칠어지고, 난폭해지는. 폭력적으로 변하는 검이 이를 증명했다.
“흘려 버려.”
“…….”
그런 그의 곁에 나타난 연인이 건넨 한마디는.
무척이나 익숙한 말이었다.
“흘려 버려. 다 쏟아내 버려. 불쾌하고, 힘들고, 쓸데없는 감정들. 네 발목을 붙잡는 괴로운 것들, 다 걷어 내고…… 다시 너답게, 네 길을 걸어.”
어느새 검을 멈춘 브랫을, 주디스가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허나 괜찮았다.
지금은 잠시 이대로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항상, 네 옆에 있을게.”
“…….”
눈으로 조용히 부정적인 감정을 흘려보내는, 그리하여 더 가벼운 마음으로 앞을 향해 나아갈 준비를 하는 브랫 로이드를 품으며. 연인의 등에 얼굴을 기대며.
주디스는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연무장에 서 있었다.
* * *
이그넷 크레센시아 vs 일리아 린제이.
캄린 레이 vs 아이른 파레이라.
준결승전 대진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