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물의 검 (2)
쒜에에엑-!
“……졌소.”
“좋은 승부였네.”
“승자, 캄린 레이!”
모두의 주목 속에 시작된 용사의 제전 8강 제1경기는, 싱겁게 끝났다.
캄린 레이의 상대는 채 1분을 버티지 못하고 명치에 검을 허용했다. 자비가 없었다면 이미 목숨을 잃었을 만큼 치명적인 한 수였다.
싱거운 결과였지만, 경기장의 흥분은 가시지 않았다. 애초에 1경기의 승패는 모두가 예상하였다.
이그넷 크레센시아에 밀려 1순위 우승 후보에서 밀려났다 한들, 캄린 레이는 캄린 레이였다.
사람들은 뒤이어 올라오는 아빌리우스의 자랑을 보며 눈을 빛냈다.
“과연 어떨까?”
“잘 모르겠어. 32강의 모습하고 16강의 모습이 워낙 딴판이라…….”
“으음, 마스터들의 인터뷰를 보면 주디스 쪽이 대단한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엑스퍼트인데, 너무 고평가인 거 아닌가? 아, 몰라. 모르겠으니 그냥 보자.”
“그러자고.”
32강에서 북부의 강자, 카림 젠킨스를 압도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그넷의 실력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스터를 발차기 한 방으로 실격시키는 광경은 모두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으니까.
허나 그녀에 대한 믿음은 16강 대진 이후 조금 흔들렸다.
경기를 본 여러 마스터 급 강자들이 ‘이그넷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게 아니라, 주디스가 엑스퍼트치고 너무 강력한 것’이라고 말했으나,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이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러 소드조차 발현할 수 없는 엑스퍼트가 마스터를, 그것도 우승권의 마스터를 힘으로 몰아붙이는 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이것이 대중들의 생각이었고, 강자들은 그들을 설득시키는 것을 포기하였다.
쿤과 주디스로부터 비롯된 파격을 말로 이해시키기에는, 세상의 고정관념이 너무나도 강했다.
그러니까…….
퍼어어엉!
“크허어어……!”
“……이, 이그넷 크레센시아, 승리!”
“…….”
“…….”
“…….”
이처럼 눈으로 보고 판단케 하는 것이 옳았다.
두 번의 검격 이후 기습적으로 섞인 발차기, 이에 복부를 부여잡고 쓰러지는 이그넷의 상대 검사를 보며 관객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대진운이 좋았다곤 하더라도 무려 8강 진출자다.
그런 강자를 상대로 순식간에 승리를 따내는 흑기사단장을 보며, 그제야 그녀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사람들이었다.
주디스에 대한 의구심 역시 사라졌다.
몇몇 이들은 ‘오러 소드보다 위대한 엑스퍼트의 검’이라는, 위클리 아레나의 힌츠 기자가 작성한 기사를 다시금 펴들었다.
분명 같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깊숙이 글자가 뇌리에 박혔다.
물론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30분의 휴식 시간이 끝나고, 3번째로 모습을 드러내는 검사들.
남부의 호랑이 쟈롯 vs 최연소 소드마스터 일리아 린제이.
당당히 무대로 올라서는 둘을 보는 순간, 지금까지보다 더욱 커다란 함성이 울려 퍼졌다.
“쟈롯! 쟈롯! 쟈롯!”
“남부의 저력을 보여 줘!”
“너밖에 안 남았어!”
누군가는 대륙 남부의 유일한 희망을 응원하고.
“일리아 린제이! 아단의 자랑! 아니, 서부의 자랑!”
“역사상 최고의 천재!”
“뭐? 최고의 천재는 이그넷 크레…….”
“일리아 린제이! 일리아 린제이! 일리아 린제이!”
“일리아 린제이! 우와아아아아!”
누군가는 반대편의 이름을 열렬히 불렀다.
굳이 따지자면 후자를 응원하는 이들이 더 많았지만, 이는 아름다운 외모와 어린 나이 때문일 뿐. 둘의 실력 자체는 비등하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앞선 두 경기보다 더욱 열렬한 환호성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결과가 명확한 승부보다는 예측할 수 없는 쪽이 더 재미있는 법이니까.
“젠장.”
물론 쟈롯은 이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회 시작 전만 해도 우승 후보 중 하나로 불렸던 자신에 비해, 상대는 마스터가 된 지 4년밖에 되지 않은 애송이에 불과했다.
물론 마냥 애처럼 취급하기에는 그녀의 친구들이 엄청난 활약을 펼쳤고, 그녀 역시 보여 준 것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콰앙, 강하게 발을 구른 쟈롯이 사나운 눈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그의 흉포한 기세에 경기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두가 놀란 눈으로 그를, 남부의 호랑이를 주시하였다.
그렇다.
30대 초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소드마스터에 오르고, 그 후에도 나태한 적 없이 충실히 투사의 길을 걸어온 자.
그것이 바로 자신이다.
그것이 바로 이 몸이다.
조용히, 씹어뱉듯 중얼거린 그가 다시 한번 강하게 발을 굴렀고, 기세에 질린 심판이 무대 밑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입을 열었다.
“겨, 경기 시작!”
마침내 시작된 8강 제3경기.
쟈롯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나워지는 기세가 무대를 잠식했고,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사람들은 맹수가 자신의 목덜미를 노리는 듯한 착각 속에 양팔을 감쌌다.
몇몇 이들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손에서 땀이 나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허나 일리아 린제이는 태연했다.
평온하게, 조용하게.
착 가라앉은 눈으로 상대를 지켜보던 그녀의 검 끝이, 강철의 나비처럼 나부끼기 시작했다.
* * *
“승자, 일리아 린제이!”
“뭐야!”
“이게 뭐야! 쟈롯, 똑바로 안 해?”
“아아아아! 150골드나 잃었어!”
“이거 사기 아니야?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에 질 수가 있어!”
‘당연한 일이지.’
‘보는 눈들이 없구만. 하긴, 당연한가…….’
‘쟈롯 잘못은 아니지. 린제이 가의 재녀가 너무 뛰어났을 뿐.’
예상외의 결과에 난동을 부리는 남부 출신 관객들과 달리, 서부의 검술관주들은 평온한 모습으로 정신을 잃고 실려 가는 쟈롯을 바라봤다.
32강까지는 몰랐지만, 16강에서 확신했다.
일리아의 실력 역시, 엄청난 활약을 펼쳤던 다른 20대 참가자들 못지않다고.
이나시오 카라한은커녕 데반 케네디, 아니 랄프 펜보다도 하수인 쟈롯이 그런 그녀를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노검사들이 다시금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비장한 표정을 내비치는 거베라의 별, 브랫 로이드.
그런 그와 나란히 걸어 올라오는 또 다른 다크호스, 아이른 파레이라.
사실 이번 경기도 예측은 어렵지 않았다. 후자의 승리다.
그들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건 과정이 궁금해서일 뿐,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이 절대 아니었다.
……라고 일축하기에는, 이번 대회에서 벌어진 이변이 너무 많았다.
‘뭘 보여 줄 거냐.’
‘브랫 로이드, 설마 아무 계획도 없는 건 아니겠지?’
관주들의 시선이 브랫 로이드, 그리고 크로노 검술관주를 연이어 오갔다.
아이른도 브랫도 모두 이안의 제자다. 하지만 최근 그가 더 공을 들인 쪽은 전자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대륙 최고 스승의 밑에서 집중 교육을 받은, 32강과 16강에서 연이어 처절한 승리를 따낸 저 푸른 머리의 젊은이가…… 과연 이번에는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가.
기적이 일어날 것인가?
아니면 예상대로 뻔한 결과가 나올 것인가?
노인들의 진한 상념 속에서 두 청년은 천천히 거리를 벌리고 마주 섰고, 무대 위를 점검하던 심판이 연신 땀을 흘리며 참가자들을 쳐다봤다.
‘왜 이렇게 땀이 나지?’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니긴 했다.
그 역시 엑스퍼트 최상위의 실력을 갖춘 훌륭한 검사라고는 하나, 오늘 무대에 올라왔던 이들의 면면을 생각하면 긴장되는 것이 당연했고, 진이 빠지는 것이 당연했다.
더군다나 4번 중 가장 주목받는 무대가 지금이라고 생각하면, 그들이 내뿜는 기세에 위축되는 것은 필연이라 할 수 있었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
그가 금발의 검사, 아이른 파레이라 쪽을 쳐다봤다.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마치 모든 기운을 내면에 갈무리한 사람처럼, 평범하게 길거리를 지나치는 사람처럼 신기할 정도로 기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반면, 브랫 로이드는 달랐다.
스르르륵-
흐른다.
배어 나온다.
아니, 쏟아져 나온다.
그야말로 경기장을 가득 채울 듯이 새어 나오는 무언가에 심판이 당황했다.
쟈롯이 그랬던 것처럼 단순히 투기를 뿜어내는 것이 아니었다.
대놓고 기운을 뿌려 상대를 압박하는 모양이었다면 바로 제지했을 터였다. 심판이 경기를 진행하기도 전에 위해를 가한 것이니 말이다.
허나 이것을 상대에 대한 공격이라고 볼 수 있는가?
애매했다. 대놓고 오러 소드를 발현한 것도 아니고, 날카롭게 상대를 자극하는 느낌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공간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는 듯했다.
심지어 그조차도 확실하지 않았다.
“잠시, 신발 끈이 풀려서. 묶어도 되겠습니까?”
“…….”
“죄송합니다.”
당황을 틈타, 브랫 로이드가 신발 끈을 묶었다. 허리를 숙이고 정비를 하는 동작이 몹시 느렸다.
마치 일부러 그러는 듯했고, 그러는 순간에도 알 수 없는 묘한 감각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빨리, 빨리 끝내시오.”
“예, 죄송합니다.”
대답과 달리 브랫의 행동은 여전히 굼떴다.
안전을 위해 무대 밑으로 내려간 심판이 눈총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더 오래, 조금 더 꼼꼼히 신발 끈을 묶는 모습이, 마치 일부러 시간을 끄는 듯한 모양이었다.
그것이 맞았다.
브랫 로이드는, 최대한 시간을 들여 경기장이라는 무대를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고 있었다.
‘평범하게 가면 이길 수 없어. 단번에 모든 힘을 끌어내야 해.’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상대를 꺾기 위해 필요한 능력은 무엇일까?
바로 일격필살의 수법이다.
육체의 강건함도, 검술의 정교함도, 오러의 총량도 모자란 그가 아이른을 이기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나마 그를 압도할 수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한 번에 끌어올리는 힘의 최대치를 높이는 것이 중요했다.
마치 주디스가 순식간에 힘을 폭발시켜 이그넷을 궁지에 몰았던 것처럼 말이다.
‘애석하게도, 나에게는 그런 폭발력이 없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지.’
그리하여 생각해 낸 꼼수가, 바로 지금의 밑 작업이었다.
대놓고 기운을 뿜어내지는 않는다.
대신 엑스퍼트 최상위 수준인 심판이 트집 잡기는 힘들 정도로, 애매하게 주변 공간을 자신의 영역으로 만든다.
자신의 물과 같은 기운을 더욱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빠르게 흡수할 수 있도록. 비유하자면 하수는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물방울 입자를 허공에 뿌려 놓는 격이다.
그리고…….
“……경기 시작!”
콰아아아아아아-!
경기가 시작되는 동시에, 체내에 담긴 기운을 최대한 빨리 쏟아낸다.
밑 작업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자신의 오러가 순식간에 주변을 물들였다.
경기장의 꼭대기까지 가득 찬 물결이 고요하게, 묵직하게 아이른을 내려다본다. 거인의 시선을 마주한 듯, 경계하는 친구의 눈빛이 보인다.
‘미안, 아이른.’
그렇다.
이것은 발악이다. 실전에서는 절대로 사용할 수 없고, 검투 시합에서도 반칙 소리를 들어 마땅할 비겁한 짓이다.
하지만, 이것이 자신의 최선이다. 이것 말고는 녀석을 이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올라간다.’
생각을 마친 브랫 로이드가, 물처럼 푸르른 검을 휙 내리그었다.
콰콰콰콰콰콰-!
파도가 몰아쳤다.
균형 상태로 경기장에 담겨 있던 물의 오러가, 둑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거칠게 쏟아졌다.
해일처럼 아이른 파레이라를 향해 짓쳐 들었다. 이를 확인한 브랫이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는 이 거대한 힘을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이 통제하려 했었다. 그러다가 피를 토한 적도 많았고, 몸살을 앓은 적도 많았다.
굳이 따지자면 두르칼리 부족에서 주디스에게 보여줬던 기술이 지금의 초안과도 같았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굳이 통제하려 들 필요 없어.’
도미노의 첫 번째 패를 툭 건드리듯, 아주 약간만 힘을 준다.
그 뒤는 신경 쓸 것 없다. 파도에 편승하면 된다. 해일과 함께하면 된다.
흐르는 물줄기에 몸을 맡기며, 그의 검이 춤을 추었다.
그에 따라 사방에서 짓쳐드는 오러가 작은 인간을 덮쳐 가는 순간이었다.
스윽-
금발의 검사가 스윽, 검을 휘둘렀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황금의 대검을 더욱 찬란하게 빛내줄 정제된 오러 소드도, 주디스가 보였듯 야만적이면서도 폭력적인 기운의 폭발도.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평범하기 그지없는 검이 파도를 갈랐다.
해일을 나눴다.
물을 베었다.
“……!”
“……!”
“……!”
과거, 크로노의 검술관주 이안이 보였던 기적.
거대한 호수를 베어 냈던 기적이, 아이른 파레이라의 검에서 또 한 번 펼쳐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