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한계 (1)
“…….”
“…….”
여느 때와 같이 정적으로 가득 찬 참가자 대기실.
그럴 수밖에 없다. 토너먼트 1, 2회전 때까지만 하더라도 별다른 일이 없었건만, 그 이후부터는 이변의 연속이다.
이번 경기 역시 쉽사리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20대에 소드마스터가 된, 대륙 남부에서 연일 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던 강자, 이나시오 카라한이 무너졌다.
형편없는 실력을 보여서?
아니었다.
브랫 로이드 vs 데반 케네디 때처럼 상대의 패기에 눌리고, 기지에 휘둘려서?
그것도 아니었다.
실력에 밀렸다.
힘에 밀렸다.
둘 사이에 있는 순수한 격차. 그것이 남부의 신성을 패배로 몰아넣었고, 아이른 파레이라를 승리로 인도했다.
레이 가문의 2인자이자 가주의 친동생, 캄린 레이가 눈을 감고 시합의 마지막 부분을 떠올렸다.
‘오러 쉴드(Aura Shield)라니…….’
웬만한 마스터들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는, 신의 축복을 받은 성기사들조차 진땀을 빼야 하는 고급 기술이 바로 오러 쉴드다.
그것을 힘들이지 않고 했다.
이나시오 카라한이 거리를 벌리고, 비장의 한 수를 준비하는 데 걸린 시간은 절대 길지 않다.
그 짧은 순간 만에 그만큼의 오러를 끌어 올려, 정제된 형태로 가공하였다는 것은…….
‘쉽지 않겠다.’
감았던 눈을 뜨고, 다시금 화면을 바라본다.
젊은 소드마스터의 얼굴이 보였다. 허나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절대 미숙한 자의 것이 아니었다.
누구를 보는 걸까.
자신일까. 이그넷일까.
그도 아니라면…….
그렇듯 생각이 깊어지는 와중, 누군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주디스였다.
16강에 오른 이들 중 유일하게 엑스퍼트의 경지에 머물러 있는 그녀가, 쾌활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 이 몸이 출격할 차례인가!”
전 경기에 대한 충격도, 자신의 시합에 대한 부담감도 전혀 느끼지 않는 듯한 모습.
그 말을 끝으로 붉은 머리 검사는 대기실을 빠져나갔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
민망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나는 아이른 파레이라의 모습이 보였다. 우스울 수도 있는 상황이다.
허나 그 광경에 표정을 푸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뭐 하는 자식이야?’
‘……머릿속이 궁금하군.’
‘어딘가 이상한 아이인가?’
도대체 무슨 자신감일까?
그것이 참가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물론 주디스의 실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올해로 22세,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엑스퍼트의 극한에 다다랐다.
대부분의 마스터가 50대쯤 경지에 오르는 것을 생각하면, 그녀의 미래는 틀림없이 찬란할 터였다.
이런 이들을 선보이는 것 역시 대회의 참된 취지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16강 참가자들 사이에서 저런 태도를 보인다는 건…….’
무언가 한 수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엑스퍼트가 아무리 강해 봐야 엑스퍼트다. 1회전에서 여실히 밝혀졌다.
모든 소드마스터들이 오러 소드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스터에 오르지 못한 이들은 이렇다 할 활약상을 보이지 못했다.
그런데도.
마스터와 엑스퍼트 간의 격차가 엄청나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이 전과 달리 주디스라는 검사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그녀의 16강전 상대인 흑기사단장, 이그넷 크레센시아 때문이었다.
저벅저벅
“…….”
“…….”
거인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평소와 같이 검은색의 기사정복을 입고, 평소와 같이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허나 뭔가 달랐다.
이번 경기에 임하는 이그넷의 분위기는, 틀림없이 이전까지 그녀가 치러 왔던 경기들과 달랐다.
사라지는 우승 후보의 뒷모습을 보며, 쟈롯이 중얼거렸다.
“젠장, 도대체 이게 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디스도, 주디스를 높게 평가하는 듯한 이그넷 크레센시아도, 그런 그녀의 태도에 영향받아 어느새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참가자들도.
더욱 짜증 나는 사실은, 자신 역시 그러한 참가자들 중 한 명이라는 점이었다.
이를 부드득 간 쟈롯이 눈을 부라렸다.
어느새 무대 위에 올라선 두 젊은 검사를 보며, 그가 생각했다.
‘자쿠앙, 도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냐.’
* * *
‘넌 모지리다.’
‘네?’
‘모지리라고, 모지리. 이 단점투성이 녀석.’
‘아니, 왜 갑자기 욕이야!’
‘최고의 재능들에 비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이그넷, 일리아…… 그리고 아이른 같은 녀석들 말이야.’
‘…….’
‘네가 적당히 10대 검사 정도의 위치에서 만족할 거라면 모지리라는 말을 듣고 발끈해도 되지만, 대륙 최고를 목표로 한다면 겸허하게 받아들여라.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것 없는 무결점의 검사들과 비교하면, 너는 모자란 것 천지야. 잘 모르는 것 같으니 하나하나 짚어 주지.’
그 이후로 쏟아지는 말들은 주디스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에 충분했다.
자존심이 강해서?
그것도 맞는 말이었지만, 그보다는 스승인 쿤의 말이 전부 사실이어서 그랬다.
오러 운용의 6단계는 물론이거니와, 검술의 정교함, 몸놀림의 안정감, 멘탈,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부분에서 주디스는 진짜 천재들의 상대가 안 됐다.
당장 자신의 연인인 브랫과 비교하더라도 한참 후달리는 것이 자신의 위치였다.
‘하지만, 단점이 많다고 해서 꼭 약하다는 뜻은 아니지.’
‘네? 지금까지 실컷 욕해 놓고 그게 무슨…….’
‘여러 가지를 다 잘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너나 나처럼 욕심에 비해 재능이 부족한 인간들은 그러면 안 돼. 잘하는 것. 적당히 잘하는 것 말고 가장 잘하는 것. 그거 하나만을 무식하게 갈고, 닦고, 연마하고, 수련하고, 집착해야 한다.’
‘…….’
‘모든 단점을 덮어 버릴 수 있는 강력한 장점 하나.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성이다.’
“맞는 말이지.”
스승의 말을 떠올린 주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화를 참기 힘들었다.
자기도 할 수 있다고,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부터 하는 그런 썩어 빠진 정신이야말로 가장 큰 단점이 아니냐고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고 싶었다.
허나 그럴 수 없었던 것은…… 극한으로 예리하게 날을 세운 쿤의 장점이, 대륙의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그의 속도가 만들어 낸 기적이 얼마나 위대하고 처절한 것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네 한계는, 나보다 위에 있다. 아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인간이 낼 수 있는 속도에는 한계가 있어. 육신의 제약. 거기에 묶여 있는 한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
‘하지만 너는 다르다.’
‘네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것.’
‘불꽃.’
‘그건 한계가 없어. 어디까지고, 언제까지고 뜨거워질 수 있다.’
불쑥 찾아온 아이른 파레이라와의 대결에서 패배한 다음 날, 스승이 건넨 한마디.
주디스가 불꽃에 집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전에도 자신의 스타일을 불(火)이라 규정하긴 했지만, 그야말로 모든 것을 내던질 정도로 하나에만 집중했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마스터가 되지 못했던 것은.
마스터의 길을 걷지 않은 것은 그래서였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럴 여력도 없었다.
집중, 그리고 발현.
‘아니…… 발산.’
속으로 중얼거린 주디스의 내부에, 강렬한 불이 치솟았다.
화르르르륵!
무대 위에 올라, 심판의 외침이 들리기 전까지. 주디스는 계속해서 내면의 불길을 피워 올렸다.
어렸을 적의 서러움과 억울함을 먹이로 주고.
크로노 검술관에 입관했을 때의 희열도 장작으로 던져 주었다.
그 밖에도 불꽃을 키울 것은 많았다.
오랫동안 아이른과 일리아를 보며 쌓아 뒀던 열등감.
그 열등감보다도 더욱 거대한 투쟁심, 그것들이 충돌하며 피어나는 독기, 집념, 광기는 정말로 좋은 연료였다.
‘물론, 네가 걷는 길은 굉장히 불안정하다. 아마 모든 상대에게 동일한 열기를 발할 수는 없을 거야.’
이 역시 수긍 가는 이야기였다.
먹을 것이 없어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이에게, 주디스는 불꽃을 퍼부을 수 없었다.
무색무취의 검사를 향해 쏟아지는 열기 역시 그리 만족스러울 수는 없을 터였다. 마음이 동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자쿠앙은 힘을 발휘하기에 최적의 상대였다.
면상만 봐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던져 줄 때마다 불꽃은 두 배 세 배 덩치를 키워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녀석과 싸웠을 때가 인생에서 가장 강했을 시기였다.
고개를 끄덕인 주디스가 전방을 바라봤다.
화르르르르륵-!
그 순간, 불꽃이 더욱 커졌다.
이그넷은 그런 사람이었다.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을 뿜어내지만, 이를 견뎌 내는 이의 마음에는 불을 지르는 존재.
누구라도 바라보고, 누구라도 쫓고 싶고, 누구라도 닿고 싶을 정도로 강렬하게 작열하는 하늘 위의 태양.
최고의 궁합이었다.
피식 입꼬리를 올리는 주디스의 몸으로부터, 정제할 수 없는 기세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시, 시작!”
두려움을 느낀 심판이 무대 밑, 멀찌감치 떨어져서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그와 동시에 주디스의 검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쌓이고 쌓여서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던 기운이 일시에 뿜어져 나왔다.
고대의 신비로운 힘이 담긴 적검의 날이 노랗게, 하얗게 끓어올랐다.
‘오러 소드 따위, 필요 없어!’
오러의 총량?
부족했다.
오러의 강화?
모자랐다. 경화는 말할 것도 없고, 감각의 개화 역시 마스터들에 비해 한참 모자랐다. 주변 환경은커녕 자신의 상태를 신경 쓰기도 바빴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리저리 날뛰는 기운을 컨트롤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손발을 움직이는 것보다도 오러를 다루는 것이 익숙한 달인들에 비하면, 그녀의 오러 운용은 분명 낙제점을 받을 만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폭력적이었다.
그러나, 충격적이었다.
무식할 정도로 야만적으로 뻗어 나오는 열기는, 주변 모든 것을 위축시킬 원초적인 공포를 품고 있었다.
천 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다듬어져 온 검술의 역사를 거스르는 거칠고도 두려운 기세가 경기장의 모든 이들을 전율케 하였다.
이그넷 크레신시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약간의 방심 따위, 검에 집중되는 기운을 보는 순간 순식간에 날아갔다.
완성되기 전에 막아야 한다!
표정을 굳힌 그녀가 발에 힘을 주었다.
허나, 곧바로 떨어지진 않았다.
“……!”
거대하고도 위압적인, 생명이라면 본능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불꽃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아주 잠시 발목을 잡는 순간.
극한의 열기를 품은 주디스의 검이,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검과 충돌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크윽!”
“으윽!”
“큿……!”
무지막지한 굉음이 경기장 전체로 울려 퍼졌다.
불안감을 느낀 지아 룬텔이 한발 먼저 마법 결계를 펼쳤기에 망정이지, 소리만으로도 엄청난 피해가 일어날 뻔했다.
성왕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맙네.”
룬텔의 왕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밭고랑과 같은 긴 족적을 남기며 무대의 끝자락에 겨우 멈춰선 이그넷 크레센시아.
그리고 결과를 보기도 전에 탈진하여 바닥에 쓰러져 버린 16강 유일의 엑스퍼트, 주디스였다.
“……검의 세계도 꽤 흥미롭네.”
그녀의 넓은 시야에 여럿이 들어왔다.
대부분이 나이 지긋한 마스터들로, 후배 검사들의 재롱을 보기 위해 먼 걸음을 한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단 하나도 빠짐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