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315화 (315/388)

◈ 102. 달라졌어 (2)

“그냥,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연무장의 한쪽 구석 벤치.

나란히 앉아 앞을 바라보는 둘이 있었다.

브랫 로이드는 술 대신 물을 한 모금씩 마시며 말을 이어 갔고, 주디스는 얌전히 이를 들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최고의 검사가 아닌 훌륭한 영주. 검이란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이니, 거기에 매몰되어 괴로워하지 말자고. 불필요한 경쟁 심리에 휩쓸려 나의 색을 잃어버리지 말자고. 엇나가지 말자고. 그런데…….”

……그러한 다짐이, 어느 순간부터 변명으로 쓰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브랫은 담담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별것 아닌 일로 자신의 소중한 친구, 아이른 파레이라에게 날을 세운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을 무시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들이받아 보고 싶었다. 무리해서라도 독기를, 투쟁심을 품어 보고 싶었다.

언제부턴가 따라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검사로서 자신보다 훨씬 앞서나가는 녀석의 뒤를 바짝 쫓고 싶었다.

대회의 취지?

좋다.

가문의 명예?

그것도 좋다. 자신이 용사의 제전에서 활약하면 활약할수록 대륙인들의 희망은 커질 것이고, 영지민들의 자부심은 드높아질 것이다.

부모님도, 동생도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겠지. 그 모든 것들은 브랫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는, 온전히 나를 위해서 싸워 보려고.”

“…….”

“조금 추하고, 비겁하고, 떼를 쓰는 느낌이 들더라도…… 어떻게든 아이른과 만날 거야. 그리고 이길 거야.”

“……지면 어떡할 건데?”

말을 내뱉은 주디스는 아차 하는 심정이 되었다.

이건 마치 브랫이 진다는 걸 전제로 둔 듯한 어조이지 않은가.

‘물론…….’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생각하긴 했다.

연회장에 나타난 아이른을 보는 순간 느꼈다.

달라졌다고. 정말 많이 달라졌다고. 논리적인 분석으로 나온 결론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괴물이라고. 대륙 전체를 탈탈 털어 봐도 지금의 녀석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얼마 없을 거라고.

그렇기에, 궁금했다.

과연 브랫은 어떤 생각으로 아이른에 맞서려는 걸까?

이길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을까?

아니면, 그저 마주 서서 당당히 검을 든다는 점에 의의를 두는 것일까?

그렇듯 혼란스러움이 점점 심해지고 있을 때, 브랫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

“내가 이기든 지든, 아무 문제 없을 테니까. 그놈하고 나는…… 앞으로도 가장 친한 친구야.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

“그러니까, 진짜 아무 걱정할 필요 없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주디스는 깨달았다.

자신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불안해했는지.

어찌하여 용사의 제전이 치러지는 내내 안절부절못했고, 참지 못하고 브랫의 연무장까지 찾아왔는지.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닌, 친구들 간의 관계가 망가질까 두려워서. 그것이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브랫을 끌어안으며, 그녀가 생각했다.

‘……많이 바뀌었네, 나.’

예전의 자신은 이러지 않았다.

자기밖에 없었고, 자신밖에 몰랐다. 남들이 어찌 되든 말든 아무런 감흥도 없었고, 오로지 자신이 최고가 되는 것에만 집중했다.

대륙 최강의 검사가 되어 만인의 위에 우뚝 서겠다.

그리하여 자신을 무시했던 녀석들을 역으로 무시해 주고, 짓밟아 주겠다.

그런 악에 받친 생각 정도가, 그녀가 남들에게 품고 있는 몇 안 되는 감정이었다.

……그랬던 자신이, 타인의 일을 신경 쓰느라 검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브랫과 아이른이, 일리아가 앞으로도 좋은 관계로 남기를, 그리하여 4인방이 언제까지고 즐겁게 웃고 떠들 수 있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고맙다.”

‘……나도 고마워.’

“이 정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네 영향이 큰 것 같아.”

‘더 진하게 영향받은 건, 오히려 나 같은데.’

“후우, 후회 없이 싸워야지. 그러려고 참가한 대회니까, 진짜 최선을 다해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올라간다, 8강. 그리고 이긴다.”

“……응원할게.”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허나 입 밖으로 나온 것은 ‘응원할게’라는 상투적인 대답뿐.

그것만으로도 브랫은 좋아했다. 또다시 웃음을 머금었고, 부드럽게 연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가 말했다.

“그런데, 넌 어떻게 되고 있어?”

“응? 뭐?”

“16강 준비. 다음 상대…… 이그넷이잖아.”

“아.”

주디스가 브랫을 쳐다봤다.

걱정이 담긴 눈빛.

그럴 수밖에 없을 터였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크로노 검술관 4인방은 이그넷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처음부터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제각기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늘 위에 떠 있는 고고한 태양 같던 그녀의 모습은 주디스의 뇌리에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보다도 더욱 강해졌겠지.’

하지만 괜찮았다.

조금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정말로 마음이 편하다. 자신을 가장 힘들게 했던 부분이 해소되자, 그녀와의 시합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야.’

주디스가 빙긋 웃었다.

신뢰를 주기 위한 미소. 연인이 그랬던 것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분위기를 풍기기 위해 그녀가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브랫이 한 박자 빠르게 입을 열었다.

“정신 차려.”

“뭐?”

“응?”

“갑자기 뭔데. 정신 차리라니.”

“아.”

잠시 뜸을 들인 브랫 로이드가 다시금 정면을 보며 답했다.

“갑자기 이상한 표정 짓기에, 긴장했나 싶어서.”

“…….”

“그런 거 아니면 됐다.”

“……일어나.”

목소리를 낮게 깐 주디스가 연인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말했다.

“대련이다.”

“……우리 이틀 뒤에 경기야. 진정해.”

“닥쳐.”

화르르륵

가슴속에 분노의 불꽃이 피어오른 그녀가, 여전히 능글맞은 푸른 머리의 검사를 보며 검을 들었다.

“덤벼.”

그날, 신성왕국 구석의 연무장에서는 밤늦게까지 격렬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주로 주디스가 공격했고, 브랫 로이드는 받아 냈다. 무지막지하게 살벌한 데이트였다.

허나 그 무시무시한 싸움의 와중에, 양쪽 모두 순영향이 있었다.

주디스는 쌓여 있던 찝찝함을 모조리 털어 내어 더욱 순수한 불꽃을 피워 냈고, 브랫은 그녀에게서 얻은 조언으로 비장의 한 수를 더 날카롭게 다듬을 수 있었다.

“그럼, 갈게.”

“그래.”

그렇게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서야 헤어지는 둘.

인사는 길지 않고 담백했다.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언제까지고 함께라는 걸 알고 있기에.

걱정을 내려놓고 돌아서는 주디스의 얼굴에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브랫의 표정에도 맑은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 * *

바야흐로, 용사의 제전 토너먼트 16강의 막이 올랐다.

물론 참가자 전원이 대륙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실력을 갖춘 초인들이었지만, 3번의 승리를 거두고 이 자리까지 올라온 이들의 면면은 1회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인상 푸근한 고위 사제의 연설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관객들이 저마다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새삼 대단하네.”

“뭐가? 아. 그렇지. 다들 엄청난 사람들이지. 처음 예상했던 것과 많이 다르긴 하지만, 그래서 더 재밌는 것 같기도 해.”

“동감이야.”

가장 큰 이변은, 20대 소드마스터들의 활약이었다.

이번 용사의 제전에 참가한 마스터의 수는 모두 24명.

그들 대부분은 갓 경지에 오른 이들이 아니라, 짧게는 10년에서 길게는 20년 이상 마스터로서의 명성을 쌓아 온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일리아 린제이와 아이른 파레이라, 특히 브랫 로이드가 16강이라는 높은 무대까지 올라올 것이라 예상했던 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브랫 로이드는…… 진짜 대단했지.”

“그러니까. 마지막에는 정확히 어떻게 된 일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해설을 들으니까 그제야 알겠더라고.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 오러를 그런 식으로…….”

“물과 같은 흐르는 느낌의 오러를 사용하는 검사가 브랫 로이드만 있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그런 방식으로 활용하는 건 신선했지.”

“이번 상대는 랄프 펜이라지? 이거 긴장 좀 되겠구만.”

“그렇지. 데반 케네디가 못 싸워서 진 게 아니야. 오히려 예상보다도 더 실력이 좋았다는 평가도 꽤 많은 걸 보니까, 랄프 펜 입장에서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거야. 그리고 아마…….”

“아마?”

“이나시오 카라한. 이 양반도 압박 많이 받을걸?”

“으음.”

“그렇지. 맞지.”

“아무래도 그렇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나시오 카라한.

남부의 신성이자,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마스터에 올라 무려 20년째 위명을 떨치고 있는 강자.

당초 분위기로는 우승은 캄린 레이, 혹은 그가 할 거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허나 데반 케네디의 실력이 생각보다 더 훌륭했고.

그런 베테랑 검사를 이번 대회의 다크호스, 브랫 로이드가 꺾었다. 덕분에 다른 두 젊은 마스터에 대한 평가도 덩달아 상승했다.

그 말은, 그가 우승하기 위해 뚫어야 할 여정이 말도 안 되게 험난해졌다는 뜻이었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얼마나 강할지는 모르겠지만, 마냥 만만하지는 않겠지. 심지어 그 상대를 꺾는다고 해도 랄프 펜과 브랫 로이드의 승자와 싸워야 하고, 그다음에 만날 상대는 캄린 레이야. 심지어…….”

“그렇지. 결승에서 기다리고 있을 건 이그넷 크레센시아지.”

“마스터를 발길질 한 방으로 날려 버린…….”

“후아, 이거 참. 내가 이나시오여도 열이 좀 받겠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만만한 상대가 하나도 없어.”

“그래도 우리 입장에서야 재밌지. 남부 출신들은 좀 불편해하는 모양이긴 하지만.”

“그렇지! 우리로서야 흥미로운 대진이 연달아 벌어지는데, 좋은 일임에 틀림없…… 오! 시작한다!”

관객 하나가 중얼거리자, 모두의 시선이 마법 화면으로 향했다.

무대 위로 올라서는 중년 검사 하나와, 젊다 못해 어린 티가 나는 풋풋한 검사 하나.

그러나 누구도 후자를 무시하지 못했다.

이나시오 카라한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 자존심 강한 그조차도 상대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다.

자신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 반대편에 서는 아이른 파레이라를 보며, 그가 생각했다.

‘……내 실수가 맞아. 너무 편견에 빠져 있었어.’

걸음걸이.

호흡.

눈빛.

절제한 와중에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기도.

표정, 분위기, 그 밖의 경지에 이른 고수만이 파악할 수 있는 사소한 정보들.

그 모든 것이 말해 주고 있다. 상대가 마냥 애송이가 아니라는 것을.

‘숨길 여유가 없겠어.’

파앗-!

“……!”

“……!”

그의 몸에서 강렬한 기세가 쏟아졌고, 대기실에 있는 이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마법 화면을 건너서 보는 것이기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렇기에 더욱 놀랍다.

직접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느껴진다. 이나시오의 강함이. 별 볼 일 없던 카라한 가문을 대륙에 널리 알린 신성의 저력이.

아니, 장차 대륙 남부의 최강자가 될 인물의 강함이!

그렇기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파아아앗-!

“…….”

“…….”

“…….”

참가자들을 충격에 몰아넣은 이나시오 카라한이라는 검사를.

그의 강렬한 존재감을 완전히 지워 버리는, 아이른 파레이라의 기세.

우우우우우웅-!

눈이 부실 듯 치솟아 오르는 황금빛 오러 소드와, 이를 강하게 쥔 굳은살이 박인 손, 그로부터 뻗어가는 단련된 팔뚝, 몸통, 하체.

마지막으로 그 모든 분위기를 아우르는, 깊고도 흔들림 없는 눈.

“……괴물 새끼!”

그 눈빛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다.

그 사실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이나시오 카라한은 감히 상대를 건방지다 말할 수 없었다.

새로운 다크호스.

아니, 또 하나의 우승 후보.

아이른 파레이라가, 비로소 본 실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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