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314화 (314/388)

◈ 102. 달라졌어 (1)

아이른 파레이라.

일리아 린제이.

주디스.

그리고 브랫 로이드.

검의 길을 걷는 수많은 젊은이 사이에서도 가장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별이 바로 그들이다.

물론 그런 넷이라고 해서 부족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상처와 아픔, 결핍으로 인해 고통받았고, 평범한 이들처럼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여전히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나아가고 있는 와중이며, 언제고 또 부침이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다.

‘그래도 굳이 꼽자면…….’

‘브랫. 브랫이 가장 어른스럽지.’

‘브랫…….’

마법 화면에 비치는 친구를 보며, 세 청춘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달랐다. 평소의 여유롭고 든든했던 분위기에서 벗어나 조금 더 독하게, 조금 더 집념 어린 눈빛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브랫.

다른 참가자들과 다르게, 셋은 그의 외적인 부분이 아니라 내적인 부분을 봤다.

그가 무대에서 내려온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에 대해 생각했다.

물론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이른 파레이라도, 일리아 린제이도, 주디스도 관객이 아닌 용사의 제전 참가자였다.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가장 처음 호명된 것은 일리아 린제이.

역사상 가장 빨리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천재가 무대로 걸어 나갔고.

콰아앙!

“……승자, 일리아 린제이!”

손쉬운 승리를 따냈다.

우우우우웅!

서걱-

“승자, 아이른 파레이라!”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찬란하게 솟아난 황금빛 오러 소드를 보는 순간, 상대는 전의를 상실했다. 엑스퍼트인 그로서는 32강까지 온 것 자체가 운이 좋은 일이었다.

투지도, 의지도 없이 뒷걸음질을 치던 중년인은 아이른의 돌격에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고, 그것이 끝이었다.

동강 난 검과 함께 쓸쓸히 퇴장하는 참가자를 보며 대기실의 검사들이 제각기 중얼거렸다.

“……확실히, 나이에 맞지 않게 안정적인 모습이긴 하군.”

“누구 말이지?”

“둘 다. 당연한 걸 묻고 있어.”

“……그건 맞지. 하여튼, 새삼 다시 보게 되는군. 젊은 참가자들.”

“음.”

담소를 나누던 마스터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아이른과 일리아, 둘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들의 대진운은 썩 좋은 편이었기에, 16강 진출이 결정된 지금 순간까지도 마스터와 검을 맞댄 적이 없다.

허나 군더더기 없는 동작과 잘 정제된 오러 소드의 자태는, 잠깐의 순간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브랫 로이드의 선전이 그들을 더욱 경계하게 만들었다.

세 20대 소드마스터 중 가장 약한 것으로 여겨졌던 거베라의 별이 그 정도의 실력을 보여 줄 거라고는…….

“이거, 카라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겠는데?”

“그러게 말이야. 4강까지는 낙승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

두 마스터의 이야기를 들었음인가?

대기실 구석에서 화면을 응시하던 남부의 신성, 이나시오 카라한이 시선을 돌렸다.

물론 오래 그러고 있지는 않았다. 시비 걸 마음도 없었을뿐더러, 그들의 말이 사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웬만하면 진짜 실력은 아끼고 싶은데.’

물론 질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허나 준결승에서 만날 이번 대회 최강의 우승 후보, 캄린 레이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카드를 아낄수록 좋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생각보다 위협적인 존재로 거듭난 아이른 파레이라가 자꾸만 눈에 밟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후후, 나름 긴장이 되나 본데?”

“그러는 선배 상대도, 만만치는 않을 텐데요? 그리고…….”

때마침 신경을 긁는 남부의 호랑이, 쟈롯도 짜증 나는 존재였다.

물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8강에서 또 다른 천재, 일리아 린제이를 만날 확률이 농후하니까.

뭣보다, 그를 발작시킬 훌륭한 버튼이 하나 더 존재했다.

이나시오 카라한이 미소를 지었다.

얄미운 그의 입이 ‘자쿠앙’이라는 단어를 내뱉으려 했고, 이를 눈치챈 쟈롯의 표정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허나 이 역시 다툼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무대를 비추고 있는 마법 화면.

그곳으로부터, 무시무시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쩌어어엉!

꽈아아아아앙-!

“크, 으흑! 쿨럭!”

왈칵!

“…….”

“…….”

“…….”

대기실에 있던 참가자 전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경기 때문이었다.

시합이 시작되자마자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간 그녀가 강하게 프런트 킥을 날렸고, 상대는 재빨리 검을 들어서 막았다.

그것이 끝이었다.

부러진 검과 함께 무대 밖으로 날아간 검사는 벽에 파묻혔고, 빠져나온 후에도 피를 토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중요한 점은, 그가 엑스퍼트가 아닌 소드마스터라는 점이었다.

‘오러 소드를 발현했는데도…… 막지 못했다고?’

‘막지 못한 걸 넘어, 오러 소드와 함께 검이 부서졌어?’

‘마스터를 일격에? 아무리 우승권의 참가자가 아니라고 해도?’

‘이건…….’

정적이 흘렀다.

이나시오 카라한도, 쟈롯도, 랄프 펜도.

심지어 데반 케네디의 패배 때도 동요하지 않았던 캄린 레이조차도 긴장한 표정으로 마법 화면을 바라봤다.

검은색의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는 흑기사단장의 얼굴이 보였다.

입매는 굳게 닫혀 있었다. 허나 그녀의 목소리가 모두의 귀에 들리는 듯했다.

‘신성왕국이 용사의 제전을 개최한 이유가, 과연 무엇 때문일까?’

대중들 사이에서 조심스레 퍼졌던 소문.

허나 수십 년 세월의 격차를 생각하면 도무지 믿을 수 없었던 소문.

이를 재차 떠올린 참가자들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누구 하나 분위기 전환의 이야기를 꺼내지 못할 정도로.

“흠. 꽤 강한데? 내 다음 상대.”

“…….”

“…….”

“…….”

그렇듯 공기조차 무거운 공간 속에서, 주디스의 발랄한 목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승리! 주디스!”

“아자!”

최상위 엑스퍼트를 상대로 깔끔한 승리를 거둔 그녀를 마지막으로, 용사의 제전 32강이 마무리되었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흥밋거리들이 쏟아진, 진짜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하루였다.

* * *

‘흑기사단장의 진짜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

‘0순위 우승 후보는 캄린 레이가 아닌 이그넷 크레센시아?’

‘그녀의 경지는 이미 5대 가주 수준…… 애초에 결과는 정해져 있다.’

우승 후보 중 하나였던 데반 케네디가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다음 날.

예상외로 세간에 떠도는 가장 뜨거운 화제는 ‘브랫 로이드를 필두로 한 20대 참가자들의 재평가’가 아닌,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진짜 실력’이었다.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비록 우승 후보는 아니었을지언정, 어제 일격 패를 당한 검사는 나름대로 명성이 있던 존재였다.

대륙 북부의 카림 젠킨스 하면 자존심 강한 오크들조차 한 수 접어줄 정도였다.

헌데, 그런 그를 검조차 쓰지 않고 장외로 날려버렸다.

브랫처럼 기지를 발휘한 것도 아니었다.

순수하게 힘 대 힘의 싸움에서 압도하였고, 그러한 광경은 대부분의 머릿속에 엄청난 충격으로 자리 잡았다.

역사상 최연소 마스터 타이틀은 빼앗겼지만, 역사상 최고의 재능은 여전히 이그넷이다!

그러한 여론 속에서 아이른, 일리아, 브랫은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을 수밖에 없었다.

허나 주디스는 반대였다.

이그넷의 다음 상대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인데, 이 경기는 꽤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끌었다.

캄린 레이를 제치고 우승에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된 자와, 16명의 검사 중 유일하게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자의 싸움이라니.

어찌 이런 대진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죽는 거 아니야?”

“에이, 대륙의 수호자인 성기사단장이 그럴 리가 있겠어? 적당히 사정 봐주겠지. 어제 그 뭐냐, 카림 젠킨스도 치료받고 멀쩡해졌다며.”

“그 얘기 들으니까 자쿠앙이 진짜 이상하네. 도대체 수련 중에 무슨 부상을 당했기에 출전도 못 한 거야? 고위 사제들이 잔뜩 대기 중일 텐데…….”

“그 얘기는 됐고. 하던 말 계속하자면…… 아니 그렇잖아? 격차가 워낙 많이 나다 보니까, 마스터가 살짝 친다고 한 게 엑스퍼트 입장에선 엄청 아프게 먹힐 수도 있는 거고…… 뭐 그렇다는 거지.”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완전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기는 해.”

“어쨌든 웃기네. 최강과 최약의 싸움이라니…….”

“자쿠앙, 그 양반 헛짓거리만 아니었으면 훨씬 더 재미있었을 텐데…….”

주디스를 애도하는 사람들.

혹은 악의적인 실수로 인한, 더 자극적인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들.

그런 많은 이들의 기대 따위, 붉은 머리 검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의 마음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향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생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자기 자신의 검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왔던 주디스건만…… 지금은 도무지 다음 상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브랫 로이드를 만나러 가는 내내, 그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옛날, 예비 수련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정확히는, 그보다 더 좋지 않았다.

당시의 브랫 로이드는 일리아 린제이라는 괴물을 뛰어넘기 위해 강한 독기를 품었고, 그것이 다소 과하다는 평가도 있었다.

허나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한계를 부수려는 그의 노력이, 그의 의지가 눈부실 정도로 빛나 보였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최종 평가 전날, 녀석이 자기보다 위라고 속으로 인정하기도 했었다.

‘자존심 빼면 시체인 내가 그런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그때의 브랫은 대단하긴 했지.’

지금은 조금 달랐다.

독기, 집착, 집념으로만 따지자면 오히려 지금이 더했다.

마치 자신을 보는 것 같다. 아니, 증명의 땅에서 마주한 일리아 린제이를 보는 것 같다.

그것이 문제였다.

이그넷이라는 드높은 태양을 넘기 위해 일리아가 받았을 고통과.

아이른이라는 찬란한 존재를 꺾기 위해 브랫이 느끼고 있을 압박감이, 괴로움이 비슷할 거라 생각하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갑자기 그러는 거야?’

‘너는 브랫이잖아. 내가 아니잖아.’

‘경쟁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상처입히지 않고.’

‘누구보다 멋있게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그런데, 왜…….’

“…….”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주디스의 시야에, 이윽고 브랫 로이드의 모습이 들어왔다.

검을 휘두르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명상 중이었다. 신성왕국이 제공한 연무장의 중앙에 앉아있는 그의 얼굴이 한없이 진지했다.

과연, 지금의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것이 너무나도 궁금했지만…….

“……방해하면, 안 되겠지.”

주디스가 신형을 돌렸다.

끼어들고 싶었다.

다가가고 싶었다. 다가가서 물어보고 싶었다. 갑자기 왜 그러느냐고.

하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 평소와 다른 자신의 모습에, 그녀는 괜히 눈물이 나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꾹 참고 걸음을 옮겨, 자신에게 배정된 연무장으로 돌아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주디스.”

어느새 뒤까지 다가온 연인의 목소리에, 그녀가 발을 멈췄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침을 삼키며 감정도 삼킨다.

그 후에야 목소리가 나왔지만, 떨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수련 계속하지, 왜…….”

“사랑하는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데, 어떻게 그러고 있나.”

“…….”

“좀 느끼했나?”

“하, 하하하하!”

주디스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상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그냥 그랬다. 브랫의 목소리를 들으니 걱정이 절반쯤은 날아가 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다시 몸을 돌렸다.

슬며시 다가가 연인을 꼭 껴안았고, 키스했다.

한 발자국 떨어진, 머리처럼 살짝 붉어진 얼굴을 한 검사가 말했다.

“갑자기 왜 그랬는지 말해.”

“…….”

“그런데 그냥 말하면 안 돼. 내 마음에 들게, 안심되게, 걱정 끼치지 않게, 그러면서도 속이는 건 없게. 그렇게 말해. 전부 다.”

“…….”

“……너무 이기적인가?”

“어.”

씨익 웃은 브랫 로이드가, 말을 이었다.

“근데 괜찮아. 알고 사귄 거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