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310화 (310/388)

◈ 100. 신경전 (4)

용사의 제전 참가자들을 위한 연회가 끝이 났다.

아니, 정확히는 끝낼 수밖에 없었다. 대진표를 받고 몸이 달아오른 이들이 전부 홀을 떠났기 때문이다.

비등비등한 상대를 만난 자는 그야말로 일분 일초가 아쉬울 터였다.

열세를 보이는 이들 역시 형편없는 꼴을 보이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역전의 가능성을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고, 우승 후보로 꼽히는 이들조차 높은 대진에서 만날 상대를 떠올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검을 수련했다.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허나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오랜만의 재회.

주디스를 포함하면 2년 반 만에 한자리에 모인 크로노 검술관 27기 4인방이, 즐거운 표정으로 대화를 나눴다.

물론 술도 함께였다. 이런 자리에 술을 빼 놓을 리가 없는 브랫 로이드였으니까.

“으, 이거 엄청 독한데.”

“이번 기회에 익숙해지는 건 어때?”

“이딴 거에 어떻게 익숙해져?”

“마시면 는다. 그리고 그런 말도 있잖아, 술은 차가운 불이라고. 어쩌면 네 검술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이 안 가네.”

주디스가 부릅뜬 눈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노려보다가, 용기 내 한 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식도를 타고 흘러 내려가는 뜨겁고도 쓰라린 감각!

위에 안착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독한 향!

자신이 견딜 만한 것이 아니었다. 차가운 불이라는 말뜻은 충분히 이해했지만, 그래도 즐겨 마실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

켁켁, 몇 번 기침을 한 주디스가 고개를 돌렸다.

예전엔 무척 재수 없다고 생각했던, 허나 이제는 몇 안 되는 친구가 된 일리아 린제이에게 물병을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계속해서, 끊임없이 아이른 파레이라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브랫이 주디스를 위해 물병을 가져왔다.

쪼르륵, 잔에 물이 가득 채워질 때까지도 일리아의 시선은 아이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처음 모였을 때부터 그랬다.

가끔 아이른이 대화에 끼려고 할 때조차 다른 곳 보지 말라고, 나만 보라고 하던 그녀였으니…… 이제와서 실망하거나 당혹스러워할 건 없긴 하지만.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변하지.’

“취해서 그런가?”

주디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수련생 시절에는 철가면을 쓴 듯 약간의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던 일리아다.

그런 그녀가 누군가와 연애를 하는 것도 모자라, 저렇게 적극적인 애정 표현을 하는 것은 참으로 믿기 힘든 일이었다.

아무리 브랫으로부터 미리 언질을 들었다고 해도 놀람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때, 슬며시 고개를 돌린 일리아가 주디스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술 취한 거 아니야.”

“그래? 그럼…….”

“아이른에게 취한 거야.”

“…….”

“…….”

말을 끝내고 슬쩍 미소 짓는 은발의 검사.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주디스의 표정은, 그야말로 뒤통수라도 한 대 맞은 듯 멍한 모습이었다.

브랫 역시 마찬가지였다. 넉살 좋은 그조차도 잔에 술이 넘칠 때까지 넋이 나간 눈을 하고 있었다.

헌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손으로 부드럽게 연인의 얼굴을 감싼 아이른 파레이라가, 살며시 자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어디 봐. 계속 나만 보고 있어.”

“…….”

“아, 아…… 브랫, 술 좀 더 따라 봐. 아니, 그냥 병으로 줘.”

주디스가 머리를 숙인 뒤 어지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농담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농담이라 해도, 저런 낯부끄러운 말을 저토록 뻔뻔하게 할 줄은 몰랐다.

둘 다 그런 성격이 아니기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차라리 브랫이 그랬다면 그러려니 할 텐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손 하나가 불쑥 밑으로 들어왔다.

자기 쪽으로 주디스의 턱을 끌어당긴 브랫이 느끼한 눈빛으로 말했다.

“나도 네게 취하고 싶다, 주디스.”

“……다 패죽이기 전에 그만해.”

“음? 왜 나는 안 통하지?”

“그만, 제발 그만…….”

주디스가 괴롭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고, 나머지 셋이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랬다. 오랜만에 만났어도 그들은 친구였다.

어색함 따위 전혀 없는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네 청춘은 이런저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장 먼저 나온 건 아이른과 일리아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였다.

둘이 감정이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던 주디스였지만, 정확히 어떤 흐름으로 사귀게 되었는지는 잘 몰랐다.

눈앞의 두 녀석이 주접을 떨지만 않는다면, 그녀로서도 꽤 듣고 싶은 내용임이 분명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아이른&일리아 커플도 헛소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브랫의 과장 섞인 설명을 들으며 쑥스럽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놀리고 싶을 정도로.

‘아니야. 놀렸다가 또 애정행각을 보이면, 내가 감당이 안 돼!’

여기까지 생각한 주디스는 근질거리는 입을 꾹 다문 채 브랫의 이야기를 들었고, 무사히 둘의 러브스토리를 끝까지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다음으로 이어진 이야기도 러브스토리였다.

브랫과 주디스 역시 커플인 건 마찬가지였고, 아이른과 일리아는 그에 관한 이야기를 100퍼센트 알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들 조심해라. 잔에 물도 가득 따라 두고.”

“응?”

“뭐야?”

“……?”

“너무 달달한 이야기를 갑자기 듣다가 목이 탈 수도 있으니까, 미리 경고하는 거다. 알겠나?”

“…….”

“…….”

“…….”

이번에도 대화를 주도하는 것은 브랫이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치심도 없이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다 털어놓으며 주디스의 얼굴을 붉어지게 만들었다.

물론 부끄러워하는 건 그녀뿐이었고, 모두가 즐거운 얼굴로 이 순간을 즐겼다.

‘신기하네, 참.’

친구들을 돌아본 아이른이 생각했다.

처음 크로노 검술관에 들어갔을 때만 하더라도 이들과 이런 인연이 될 줄은 몰랐다.

같은 무리로 엮이기에는 성적도, 성격도, 배경도, 출신도 너무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옛날 생각 나네.”

“그러게. 이 자식, 처음 봤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재수 없었는데.”

“푸흡.”

“뭐야, 너는 왜 웃냐? 너도 만만치 않게 재수 없었거든?”

“어? 나?”

“그래. 1등이랍시고 남들하고 어울리지도 않고, 지 혼자만 움직이고. 아, 아니다. 그때도 아이른은 챙겼었구나?”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이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하나둘씩 예전 이야기를 꺼냈고, 그렇게 오랜만에 추억 여행이 시작됐다.

크로노 검술관 수련생 시절의 이야기.

아이른에게는 없던 5년 사이의 이야기.

그 이후에 다시 만나게 된 이야기, 그리고 함께 여행을 다니며 겪었던 신기하고도 재미있었던 이야기.

그렇게 한 바퀴를 쭉 돌고 나니, 또다시 현재로 주제가 옮겨졌다.

용사의 제전.

그들 모두를 모이게 한 대형 이벤트에 대해 주디스가 말을 꺼냈다.

“다들 어때?”

“응? 어떤?”

“이번 대회 말이야. 다들, 목표가 어디쯤이냐고.”

“…….”

“…….”

“…….”

“설마 참가에 의의를 둔다, 대회의 취지가 중요한 거지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뭐 이딴 소리 할 건 아니지?”

말을 하는 주디스의 시선이 아이른 쪽에 꽂혔다.

사실, 그녀가 한 말은 대부분 그를 저격한 것이었다.

자신이야 당연히 우승을 노린다. 할 수 있고 없고를 따지기 전에, 누구에게든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으니까.

일리아의 경우에도 대충 짐작이 간다.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목표겠지.

아무리 그녀에 대한 증오와 집착이 사라졌다고 해도, 건전한 승부욕마저 지워 버릴 필요는 없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 말은, 우승하겠다는 말과도 다름없겠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주디스는 안다.

아니, 여기에 모인 넷 모두가 알 것이다.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보다 이그넷의 수준이 훨씬 높다는 것을. 캄린 레이보다 더욱 우승에 가까운 것이 그녀라는 사실을.

그런 존재를 목표로 한다면, 우승에 욕심을 안 내는 것이 더 이상하다. 적어도 주디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브랫은…… 브랫은 잘 모르겠네.’

주디스의 시선이 자신의 연인, 브랫 쪽으로도 움직였다.

어찌 보면 이 녀석이 아이른보다도 더 파악이 안 됐다.

어릴 때는 누구보다도 투쟁심이 강했던 그였으나, 성인이 된 이후로는 경쟁이나 다툼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듯한 모습을 보이는 그였다.

물론 녀석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자신이 가장 잘 아니,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것은 기정사실이겠지만…….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때, 아이른 파레이라의 입에서 포부가 흘러나왔다.

그렇다.

그것은 마땅히 ‘포부’라고 불릴 만한 커다란 목표였다.

“우승할 생각이야.”

“…….”

“…….”

“…….”

“최선의 실력을 선보이고,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안심하고 생업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그럴 수 있도록 누구보다 뛰어난 모습으로 우승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효과적인 방법이니까.”

방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진중해졌다.

어찌 보면 대회의 취지에 가장 잘 들어맞는 신념이자 목표. 허나 대부분의 참가자에게는 비아냥밖에 들을 수 없는 발언.

허나 주디스로서는 이를 트집 잡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지켜봐 왔기 때문이다.

녀석이 품은 뜻이 얼마나 숭고하고, 얼마나 단단하고, 얼마나 그에 진심인지.

말뿐만이 아니라 그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 왔는지, 아마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가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일까?

녀석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음에도.

그보다 더 먼, 더 높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디스는 화가 나지 않았다.

아마 다른 녀석이었다면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헛소리냐고, 우승하려면 나를 넘고 가라고 바락바락 악을 썼겠지.

헌데, 이러한 반응이 전혀 의외의 인물로부터 터져 나왔다.

“난 신경도 안 쓰는군.”

“응?”

“…….”

“……?”

“그렇지 않나? 대진표를 봤으면 알겠지만, 우리는 8강에서 만난다. 그걸 의식하고 있었다면, 네가 벌써 우승이란 단어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됐다는 말이지.”

“음, 어, 그게…….”

아이른이 당황했다.

일리아도, 주디스도 당황했다.

애초에 그의 발언은 딱히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저 자신의 신념과 뜻을 위해 최선을 다해, 최선의 결과를 쟁취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급작스레 흥분할 일이 아닌 것이다.

심지어 시비를 건 인물이 브랫이어서 더 당혹스러웠다.

차라리 주디스가 그랬다면 이해라도 할 텐데, 이런 쪽으로 가장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던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고?

그것도 이렇게 뜬금없이?

“…….”

“…….”

“…….”

“흠, 분위기를 깼군. 미안하다.”

꼴꼴골

남은 독주를 전부 잔에 따른 브랫이 이를 단번에 털어 마셨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하지 않았음에도 살짝 취한 것처럼 보이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잠시 아이른 쪽에 시선을 던졌다.

“그럼 이만, 수련하러 가야 해서.”

뒤돌아서 방을 나서는 그를 아이른도, 일리아도, 주디스도 붙잡지 못했다.

그렇게 다소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 속에, 4인방의 술자리가 마무리되었다.

* * *

“후, 도대체 뭐 하는 자식이야?”

대화가 이상한 분위기 속에서 끝난 뒤.

주디스는 툴툴거림을 멈추지 않은 채 개인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용사의 제전 참가자들을 위한 신성왕국의 배려였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브랫을 만나러 가기가 더 불편했다. 그녀가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닌데!’

정말로 그랬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감 넘치게 행동하는 그녀였지만, 현실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자신은 우승 후보가 아니었다. 아이른이니 일리아니 다 제쳐 두고, 일단 16강에서 만날 상대부터가 이그넷 크레센시아였다.

남 걱정이 아니라 자기 걱정만 해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염려가 되었다.

“후우.”

주디스가 한숨을 쉬었다.

언제부턴가, 자신이 변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타인의 도움도, 걱정도, 격려도 필요 없다. 세상은 자기 혼자니까, 악과 깡과 독기만으로 어떻게든 최고의 자리에 올라갈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을 비웃었던 모든 이들을 역으로 비웃어 줄 것이다.

이런 어릴 때의 다짐이 희미해졌다.

자신을 찾아오지 않은 쿤을 생각하고.

자신의 연인이 된 브랫을 생각하고.

자신의 소중한 친구들인 아이른을, 일리아를 생각하고. 그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에도 이리 신경을 쓰고.

복잡했다.

머리가 복잡해서 터질 듯 했다.

“어이.”

“…….”

그런 그녀의 앞에, 히죽 웃음을 보이며 다가오는 근육질의 거한.

남부 용병왕 자쿠앙이었다.

그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대회까지 열흘이나 남았잖아? 근데 난 성격이 급해서 말이지. 그렇게 오래 못 참아.”

“…….”

“아, 겁먹지 마. 널 어떻게 하겠다고 찾아온 건 아니야. 그냥 가볍게 친선 대련 정도는 괜찮…….”

화아아악-!

주디스의 몸에 기세가 피어났다.

마스터의 것처럼 눈에 보일 정도로 밝은, 진한 오러는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엑스퍼트였으니까. 여전히 부족했으니까.

허나 그 뜨거움만큼은, 강렬함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진짜 불꽃이 된 그녀가 검을 뽑으며 말했다.

“마침…….”

잘 찾아왔어.

사납게 웃어 보인 주디스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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