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신경전 (3)
그리 특별할 것 없는, 하지만 서로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몇 마디 대화.
언제 어디서라도 볼 수 있는 평범한 광경이다.
연인들이 애틋한 눈빛으로 사랑을 속삭이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 당장 무도회만 가더라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더 으슥한 곳을 찾아보면 그보다 농도 짙은 스킨십을 하는 이들도 쉬이 찾아볼 수 있고.
“…….”
“…….”
“…….”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장소의 평범한 분위기에 해당하는 이야기일 뿐.
용사의 제전을 위해 모여든 수십 명의 소드마스터, 그리고 최상위 엑스퍼트들은…… 놀랄 만큼 말랑말랑하게 변한 분위기 속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5분 전만 하더라도 누구 하나 검이라도 뽑을 만큼 살벌한 상황이었지 않은가?
그 뒤에 나타난 이그넷 크레센시아, 일리아 린제이 사이의 대치도 그랬다.
기세 따위 전혀 끌어올리지 않은 채 서로 바라만 보고 있었지만, 오히려 직전보다 더욱 서늘한 느낌에 등에서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허상이었다.
마치 없던 일과 같았다.
현재 일리아 린제이의 행복한 얼굴을,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주디스가 브랫에게 말했다.
“……이게 뭔 일이야.”
“말했잖아. 예전하고 많이 달라졌다고.”
“아니, 하지만…….”
주디스가 말끝을 흐렸다.
둘이 연인이 되었다는 사실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브랫을 통해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어느 정도 그렇게 될 거라 예상하기도 했다. 딱히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여정 내내 둘 사이에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는 것쯤은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느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사람들 다 있는 곳에서 딥 키스를 한다거나, 끈적한 무언가를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허나 그냥 알 수 있었다.
마냥 풋풋하고 소년, 소녀들이 할 법한 연애를 할 거로 생각했던 자신의 추측과는 달리, 그들이 꽤 진한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허, 애기들인 줄 알았는데.”
“그래? 우리 애…….”
“닥쳐.”
“…….”
“아무튼, 신기하네. 이 누나가 다 감격스럽다.”
브랫이 작은 소리로 툴툴댔지만, 주디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흐뭇한 얼굴로 아이른, 일리아를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아니, 대부분이 그러했다. 너무 급격하게 변한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고, 그 속에는 방금 전까지 대치 중이었던 이그넷 크레센시아도 있었다.
‘뭐야?’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야말로 수많은 이들의 관심과 이목을 한 몸에 받아 왔던 그녀다.
그것들은 질투로 인한 것이든, 선망으로 인한 것이든, 혹은 증오로 인한 것이든 굉장히 강렬했지만, 이그넷의 입장에서는 받아 줄 감흥이 들지 않았다.
마주 관심을 줄 만한 존재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헌데, 반대로 흥미가 생기기 시작한 이들로부터 이렇게 철저한 외면을, 무시를 당하자 기분이 묘했다.
낯선 가운데 설명할 수 없는 찝찝함, 불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심술을 부린 것은 그래서였다.
그녀가 연회장에 오고 처음으로 오러를 끌어올렸다.
슈우욱-
넓지 않게, 단 두 사람만을 노리기 위해 가공된 날카로운 기운.
마치 바늘처럼 뾰족한 그것이 아이른과 일리아의 몸을 콕콕 찔렀다. 이그넷은 침을 삼키며 둘의 반응을 기대했다. 왠지 모르게 긴장감이 생겼다.
“…….”
허나 둘은 여전히 서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세상과 단절된 것처럼.
너 따위는, 그 정도 자극으로는 우리의 세계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처럼 더 애틋한 표정으로.
이그넷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묵묵하고 조용한 상태로, 더 강한 기세를 뿜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 고민의 저울추가 ‘한다!’ 쪽으로 기울려는 순간이었다.
“왔다.”
“율리우스 휼!”
“백기사단장!”
“옆은…….”
“설마, 성왕 폐하?”
장내에 소란이 일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신성왕국의 최고 실력자이자, 대륙 3대 검사의 한 축을 담당하는 백기사단장, 율리우스 휼.
오러와 신성력이 섞인 기운이 상쾌하게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머리가 청량해지고, 차분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왕국 제일의 실력자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존재감이었다.
허나 그보다도 더욱 눈길을 끄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성왕이었다.
공식적으로 아주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딱히 별다른 기운을 뿜어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의 정체를 간파했다.
이유를 설명하라면 할 말이 궁하겠지만, 그냥 알았다. 그냥 느껴졌다.
‘하긴…….’
‘수십 년간 아빌리우스를 이끌어 온 존재가, 평범할 리 없겠지.’
‘여기 온 이유가 뭐지?’
‘할 말이라도 있나?’
‘지루한 건 딱 질색인데…….’
신성왕국.
나이 지긋한 노인.
최고 권력자.
왠지 지겨운 연설이 흘러나올 것 같은 조합이었기에, 몇몇 이들의 표정에는 놀란 와중에도 걱정된다는 기색이 엿보였다.
특히 자쿠앙과 쟈롯이 그랬다. 그들은 태생부터 갑갑한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허나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성왕은 고루하고 답답한 사람이 아니었다.
걸음을 멈춘 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대륙에 희망을 전파하기 위해 먼 걸음 하신 검사 여러분, 반갑소. 질질 끌 것 없이, 바로 대진표를 보여 주겠소.”
“……!”
“……!”
쿵!
우우웅-!
그가 짚고 있던 지팡이를 바닥에 쿵 찍었다.
그러자 은색의 광휘가 흘러나와 허공에 글자를 새겼다.
128강 토너먼트 대진표였다.
단순히 보여 주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하인들이 신속하게, 허나 급하지 않은 몸놀림으로 대진이 적힌 종이를 건넸다.
참가자들은 그야말로 빨려 들어갈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대진을 확인하였다. 여기에는 고수, 하수의 구분이 없었다.
상대적으로 낮은 실력의 참가자들은 1회전 상대를 중점적으로 살폈다.
마스터 급의 강자를 만난다면 최악이지만, 운 좋게 만만한 상대를 만난다면 2회전에 올라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면, 그리하여 높은 이의 눈에 들 수 있다면 어쩌면 좋은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주로 소속이 없는 방랑기사들이 이러한 생각을 했다.
마스터 급의 강자에게도, 심지어 그 이상을 바라보는 우승 후보들에게도 대진은 중요했다.
어찌 됐건 모두를 쓰러뜨려야 우승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강자는 최대한 나중에 만나고 싶은 법.
그렇기에 일찍 강적을 만나게 되는 이의 입에서는 답답한 신음이 흘러나왔고, 비교적 순탄한 대진을 뽑은 이의 얼굴에는 화색이 돋았다.
“으음…….”
남부 용병왕 자쿠앙의 경우는 전자였다.
초반에는 괜찮다. 자신을 위협하기는커녕 검 한 번 제대로 못 뽑을 녀석들만 주르륵 늘어서 있다.
허나 16강 대진에서 만나는 상대가 아빌리우스의 흑기사단장, 이그넷 크레센시아였다.
‘어차피 16강부터는 대부분 소드마스터만 남을 테고, 쟈롯이나 이나시오 등을 만나는 것보다는 훨씬 낫긴 하지만…….’
그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였다.
원래라면 꽤 기분 좋게 받아들였을 대진이다.
대회의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인 캄린 레이를 결승에서 만난다는 것부터가 희소식이었으니까.
이그넷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30대 초반의 애송이에게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적어도 10분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직접 마주한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존재감이 생각보다 컸다.
그것이 자쿠앙의 기분을 찜찜하게 만들었다.
“뭐야, 표정 심각한데? 뭘 그렇게 걱정해?”
“……걱정은 무슨! 그냥 상대 녀석들 어떻게 다져 줄까, 그 생각을 하고 있었지.”
쟈롯의 물음에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됐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긴 했지만, 무시했다. 어찌 됐건 캄린 레이와 일찍 만나는 것을 피했으니 괜찮다.
몇몇 신경 쓰이는 서부 녀석들과 이나시오 카라한 녀석도 전부 반대편이다.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즐거운 점은…….
‘주디스, 이 주제도 모르는 새끼를 내 손으로 직접 패 죽일 수 있다는 거지. 아 참, 죽이는 건 안 되지.’
그가 히죽 웃으며 대진표에 적힌 1회전 상대를 쳐다봤다.
주디스.
이 세 글자가 어찌나 자신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
하하, 육성으로 웃음을 터뜨린 자쿠앙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디스 또한 자기 상대를 확인했을 터.
과연 녀석은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까?
“야, 아이른. 아까 진짜 심하더라.”
“응? 아니, 뭐가…….”
“아무리 일리아 있다고 해도, 어? 나랑 거의 2년 반 만에 만나면서 어떻게 눈길 한 번을 안 주냐? 와, 진짜…….”
“동의한다. 우리 주디스, 알고 보면 여린 여자라 그런 거에 쉽게 상처받는…….”
“아, 미친놈아 제발 입 좀 다물고 있어!”
“…….”
보고 있지 않았다.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언제 자신과 신경전을 벌였냐는 듯 주변인들과 신나서 웃고 떠들고 있는 녀석을 보며, 자쿠앙은 머릿속의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분노로 인해 잔뜩 힘이 들어간 주먹.
흥분으로 인해 터질 듯이 붉어진 얼굴.
그의 몸에서 용암처럼 난폭한 오러가 발현되려는 순간, 화들짝 놀란 그가 뒤를 바라봤다.
“…….”
눈이 마주쳤다.
율리우스 휼이었다.
그의 단단하기 그지없는, 수백 번을 두드려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강건한 육신과 신앙으로 빚어진 오러를 느낀 순간.
스르륵……
자쿠앙의 기운이 사그러들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다른 쪽을 응시하는 늙은 성기사를 보며, 자쿠앙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조금만 참자고.
조금만 참으면, 참는 동안의 괴로움을 한 번에 갚아 줄 만큼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물론 주디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회포를 푸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었다.
* * *
“연애란 뭘까?”
철그럭-!
단장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불철주야 검을 수련하고 있던 게오르그 포이베가 검을 떨어트렸다.
마스터 급의 검사가 검을 놓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허나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연애를 입에 담았다고?
“사랑이란 뭘까.”
“……!”
또다시 흘러나오는 이그넷의 목소리.
잘못 들은 게 아니었구나. 조용히 생각한 게오르그가 조심스레 자신의 검을 주워 든 뒤, 흥미 가득한 눈으로 단장을 바라봤다.
매사에 유능하고, 누구보다 앞서가는. 그야말로 모든 방면에서 엘리트 소리를 들어 왔던 것이 바로 그녀였다.
허나 연애 분야만큼은 예외였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관심이 없어서이긴 했지만, 어찌 됐건 31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교제 경험이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궁금했다.
뭘까?
연회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혹시 어떤 간 큰 녀석이 단장에게 구애라도 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단장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긴 걸까?
그야말로 온갖 망상이 머릿속을 헤집었고, 그의 마음을 부풀게 만들었다.
원래 연애 이야기라는 것이 자신의 것보단 남의 것이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허나 오랜 고민 끝에, 오랜 중얼거림 끝에 이그넷의 입에서 흘러나온 결론은…… 게오르그 포이베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연애는…… 불쾌한 것.”
“…….”
“부숴 주마. 두 녀석 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그넷은 입을 열지 않았다.
힘차게, 허나 정교하고 날카롭게.
자신과는 격이 다른 검술을 보여 주는 단장을 보며, 게오르그가 생각했다.
‘왜 저런 결론이 나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