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다시 보자 (2)
쿤은 70의 나이에 마스터가 되었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노력하여 크로노의 주인인 이안의 호적수가 되었다.
그야말로 대륙의 모든 재능 없는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일화지만, 이 짧은 문장에 얼마나 깊은 심연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1년을 노력하는 것은.
더 나아가 5년, 10년, 수십 년을 노력하는 것은 평범한 정신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조차 없이, 자신이 나아가고 있는지 후퇴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조차 없이 평생토록 외길을 걸어가라는 것은, 어찌 보면 고문에 가깝다.
어둠.
그리고 지옥.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쿤은 그야말로 온갖 노력을 다했다.
검을 수련하는 시간보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시간이 더욱 많았을 정도였다.
다행히 성과는 있었다.
세상의 조롱, 만인의 비웃음, 자신의 자신에 대한 연민, 슬픔, 자괴감. 그 모든 부정적인 기운에서 벗어나기 위해 쿤은 긴 여행을 떠났고, 새로이 믿음을 쌓았다.
건실한 투쟁심이 열등감을 몰아 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불안과 의구심을 지워 냈다.
그리하길 40년.
마침내, 쿤의 마음속에 있던 검은 늑대가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었어.’
허허허, 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먹이를 주지 않았음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검은 늑대는 살아 있었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정도로 초라해졌음에도 스러지지 않았고, 소멸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마음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주인을 찾았을 뿐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에게 먹이를 받아먹은 것일까?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저만큼 거대해진 검은 늑대의 수작을 이겨 내기에는, 과거의 칼 린제이가 너무나도 어리고 미숙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희망이 보인다.’
노인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꼴을 살폈다.
손가락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양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흘러내린 혈액과, 이에 뒤덮여 보이지 않는 크고 작은 상처들까지.
웬만한 사람이라면 당장에 절명해도 이상하지 않을 부상이다.
허나 이것보다 더 좋지 않은 것은, 그런 자신의 앞에 악마로 화한 검은 늑대와 광대 형상의 괴물이 나타났다는 점이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오른 경지는 위대하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야말로 요술사가 부리는 기적을 상회할 정도로 아득한 지점.
원래라면 주변의 기운을 끌어모아 육체를 재구성하는 것도, 그리하여 새로운 몸으로 거듭나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허나 지금은 불가능했다.
악마들이 내뿜는 혼탁하고 추악한 기운을 끌어모아 육신을 구성해 봤자, 나타나는 것은 또 다른 악일 뿐. 쿤은 자신의 마지막이 찾아왔음을 인지했다.
그렇다면, 노인이 본 희망은 과연 무엇인가?
피식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를 본 사제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광대 악마 역시 경계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대륙의 3대 검사, 아니 대륙 최강의 검사를 쳐다봤다.
‘조심해야 해. 무조건 사려야 해!’
최근 연속으로 패배했기에, 그로 인해 자신감이 떨어졌기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광대의 머리에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다. 먼 옛날, 자신의 가면을 쪼개 버린 노인의 모습. 노인의 눈빛, 노인의 그 끔찍했던 기운!
그에 비견할 만한 기세가, 쿤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죽기 직전인 것마저 비슷하네. 으, 무서워!’
광대가 자신도 모르게 파르르 몸을 떨었다.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웬만하면 이대로 조용히, 아무 일도 없이 임종을 맞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양초가 녹아 없어지듯 조용히, 자신이 나설 일 따위 없이 얌전히 말이다.
그때였다.
화아악-!
“……!”
“힉! 으읏!”
대륙 최강의 검사, 쿤이 오른팔을 뻗었다.
정확히는 팔이 아니라, 오러로 구현화된 기운이었다. 유리가 달빛을 머금은 듯 은은한, 막대한 힘!
사제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고, 광대는 저 멀리까지 도망갔다. 가면 뒤의 상처가 욱신거려 고개조차 들 수 없을 정도였다.
허나 노인의 힘은 그들을 향하지 않았다.
스르륵, 바닥에 쓰러져 있던 젊은이를 끌어와 바로 세운 쿤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
“…….”
“…….”
목소리가 매우 작았다. 아니, 아예 소리가 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입마저 거의 움직이지 않았기에 사제도, 광대도 노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오로지 칼만이 그의 말을 인지했다.
휙
털썩
이야기가 끝났다.
멱살잡이에서 풀려난 칼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쿤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운이 다한 듯, 비틀비틀 뒷걸음질 치던 그가 이윽고 엉덩방아를 찧더니 바닥에 등을 뉘였다.
오른쪽에 자라났던 팔도, 검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노인의 입에서 전보다 훨씬 명료하고 또렷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이, 친구들.”
“…….”
“…….”
“친구들, 귀가 먹었나? 아니면 바짝 쫄아서 그래? 쿨럭, 하아…… 뒤지기 직전인 내 모습을 보고도 그렇게 겁먹고만 있을 거야? 특히 거기 너, 라바트에서 한창 휘저었다는 그놈 맞지?”
“…….”
“저런 병신새끼한테 고전했다니, 이그넷도 갈 길이 멀긴 하구만.”
“이 자식이…….”
광대가 가면 뒤의 핏발 선 눈으로 쿤을 노려봤다.
허나 끝까지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았다.
그런 그를 쿤이 끊임없이 놀려댔다.
병신, 머저리, 고자, 못난이, 얼간이, 따개비, 갯강구…….
그렇게 한참을 중얼거리던 그가 뚝 하고 욕설을 멈추더니, 무게를 잡고 말했다.
“나는 다시 돌아온다.”
“…….”
“…….”
“저기 성직자인 척하는 짐승 새끼는 몰라도, 너는 알겠지. 악마니까 오래 살았을 거 아니야?”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뛰어넘은 존재에 대한 전설 말이다. 모두가 바라마지않는 위대한 영역, 그랜드 소드마스터. 이에 도달하면 병들고, 늙고, 낡아 버린 몸뚱이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이야기…… 들어 본 적 있지?”
“…….”
“확신한다. 나는 마스터의 벽을 깼고, 다시 돌아올 거야. 어떤 방식으로든 말이야.”
그래야…….
나의 맞수 이안도.
나의 아내 케이라 핀도.
앞길 창창한 나의 제자, 주디스도…… 다시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낮게 중얼거린 쿤이 킬킬킬 웃었다.
미련도, 집착도, 분노도, 슬픔도 없는 천진난만한 웃음.
그야말로 듣는 악마의 속을 박박 긁을 정도로 때 묻지 않은 목소리였는데, 그것이 끝이었다.
1분이 지나고, 2분이 지나고. 의심 많은 광대 악마조차 죽음을 확신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날 때까지, 노인은 숨을 쉬지 않았다.
비로소 한숨을 토해 낸 광대가 욕설 섞인 조롱을 내뱉으며 시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 병신, 병신병신병신병신 같은 새끼가! 도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그랜드 소드마스터의 전설이라니, 그딴 개소리를 믿는다고?
하!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물론 그 역시 이에 대한 전설을 알긴 했다. 실제로 마냥 헛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 어떤 분야가 되었든, 궁극의 경지에 다다르면 요술과도 같은 기적을 발휘할 수 있는 법이니까.
‘내 예상대로라면, 마스터의 벽을 깨는 순간 샘솟는 오러를, 외부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기운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를 담을 더 튼튼하고 넓은 그릇을 만들기 위해, 육체가 새로이 진화하는 쪽에 가까울 테지.’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다.
지금처럼 죽어 나자빠진 후에야 아무리 용을 써도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애초에 쿤과 비슷한 위엄을 보였던 과거의 검사, 카렌 윈커도 흙이 되어 사라졌다. 다시는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
‘……잠깐.’
광대의 표정이 굳어졌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
자신을 긴 잠에서 깨우고, 그것도 모자라 또다시 쓰라린 상처를 안겨 줬던 애송이 녀석.
그놈의 얼빠진 얼굴을 떠올리며 엄습하는 불안을 느낄 때.
서걱
“크아아아아악!”
죽은 줄 알았던 쿤으로부터 날카로운 기운이 날아들었고, 광대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었다.
비명, 고통에 찬 비명!
이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음미하던 노인이 중얼거렸다.
“이놈아, 끝까지 긴장하고 있었어야지.”
“시발, 시발시발 시바아아아알!”
“욕해도 소용없어 이 녀석아…… 그럼, 이제 진짜 간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진짜로 숨이 끊어진 쿤이 축 늘어졌다. 비웃음을 머금은 표정은 여전히 유지한 채.
복수할 기회조차 앗아간, 그야말로 완벽한 조롱이었다.
“…….”
물론, 광대는 동의하지 않았다.
동강 난 악마의 상반신이 높이 점프하여 하반신과 합쳐졌다. 물론 고통은 어쩔 수 없었다.
최근의 연이은 타격에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일격이 더해지자 가진바 힘 역시 처참할 정도로 소진되었다.
이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체에라도 화풀이를 해야만 했다.
허나 불가했다.
“비켜라.”
광대의 어깨를 밀치고 등장한 사제.
그가 쿤의 가슴팍에 손을 올린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
광대는 침묵했다.
원래라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터다.
함께하고 있다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사제의 조력자로서 함께했을 뿐, 결코 이런 불쾌한 취급을 당할 정도로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경어가 아닌 낮춤말을 들은 것도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
한 차원 높은 존재로.
더욱더 깊은 어둠으로 거듭나는 그의 모습 앞에서, 광대는 감히 분노를 표출할 수가 없었다.
울컥울컥
즈으으으으으……
쿤의 진력이 사제의 몸으로 흘러들어간다.
오랜 세월 방황했던 늑대가 마침내 자신의 고향을 찾아 즐거워한다. 기뻐한다. 더할 나위 없는 진미에 눈물을 흘리고, 웃음을 흘린다.
잠시 후.
힘을 되찾은 사제의 앞에 선 광대가, 예를 담아 말했다.
“경하드립니다. 새로운 마왕의 탄생을.”
“아니, 그리 부르지 마라.”
악마가 광대의 말을 부정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주먹을 쥐었다 펴고, 다리를 굽혔다 펴고.
그렇게 한참 동안 자신의 몸을 점검하던 그가, 이윽고 자신을 정의했다.
“심마(心魔).”
“…….”
“앞으로는 나를 심마라고 부르도록 해라.”
“예.”
광대가 대답했고, 칼 역시 고개를 숙여 답했다.
허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사제, 아니 심마를 눈앞에 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각은 다른 쪽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신성왕국으로 가라. 가서 용사의 제전을, 거기에 참가한 이들을 봐라.’
‘모자라고, 부족하고, 그로 인해 고통받고 괴로워하면서도 끝끝내 일어서서 나아가는…… 그 녀석들을 본다면, 어둠에 물든 네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지.’
주디스.
브랫 로이드.
일리아 린제이.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
깊어 가는 어둠 속에서, 칼은 노인이 말해 준 이들의 이름을 오래도록 되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