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다시 보자 (1)
성을 점령하기 위해, 수성 측은 공성 측의 세 배가 넘는 병력이 필요하다.
이 말은 오랜 옛날부터 정론으로 자리잡혀 있다.
방어하는 쪽은 먼저 움직이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상대를 관찰할 수 있다. 즉, 무리할 필요가 없다.
공격이 오기 전에 갖가지 준비를 할 수도 있기에, 이를 뚫어내기 위해 공격 측은 상당한 부담감을 안고 돌격해야만 한다.
검사와 검사의 싸움도 마찬가지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실력이 처지는 이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싸움을 시작하기 전, 칼은 냉정히 판단했다. 우선은 버틴다.
상대가 아무리 빠르다고 한들 자신의 넓은 기감을 뚫고, 단단한 방어 태세마저 뚫고 치명타를 먹이기는 힘들 거로 생각했다.
‘결국, 내 빈틈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왼쪽이나 오른쪽, 혹은 뒤로 돌아야 한다.
상대는 방향을 바꾸기 위해 여러 걸음을 걸어야 하지만, 나는 반걸음 내지 한 걸음만으로 가능하다.’
막는다.
막아 내고, 막아 내고, 또다시 막아 낸다.
그리하여 늙고 병든 쿤의 육신이 지칠 때까지 버텨 내다 보면,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시점이다.
전성기라면 모를까, 지금의 그에게는 절대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칼이었다.
오산이었다.
피를 한 바가지나 쏟아 내고, 양팔이 날아간 노인.
위압감은 어디 가고 초췌함만 느껴지는 모습이었으나, 쿤은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보다 더욱 빠른 몸놀림으로 어둠에 잠긴 칼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스윽-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지면에 족적이 남지도 않는다.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리에서 증발했다가.
스걱-!
“크윽!”
상대의 우측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검이 옆구리가 베고 지나간다.
부우웅, 잇새로 신음을 흘린 칼이 뒤늦게 검을 휘둘렀다. 이 역시 어마어마한 빠르기였다.
웬만한 소드마스터조차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무자비한, 위력적인 공격.
허나 맞지 않고서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느새 십여 미터 바깥에서 나타난 쿤이 흐흐,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점멸했다.
자신의 허벅지 뒤를 베고 지나가는 상대를, 칼은 또다시 놓쳐버렸다.
“크아아아아아!”
그가 분노했다.
흐르는 피는 없었다. 마(魔)를 품에 안은 그의 육신은 이미 인간의 범주를 초월했기에, 이 정도 상처는 호흡 한 번이면 재생될 정도로 가벼울 뿐이었다.
어쩌면 상대가 곧바로 추가 타를 날리지 못하도록 위협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헛손질이나마 계속하다 보면 승리할지도 모른다.
자신과 달리, 여전히 쿤의 몸에서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으니까.
허나 그럴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러의 총량도.
육체의 강인함도.
감각의 예리함도, 검술의 위력도 자신이 더 뛰어나다. 유일하게 뒤처지는 것은 단 하나, 속도뿐이다.
그런데, 고작 그 한 가지 차이 때문에 이렇게까지 밀린다고?
마치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놀림당하듯?
“하아아아압……!”
즈으으으으응……
열다섯 번째로 쿤의 공격에 난자되었을 때, 칼이 기합과 함께 자세를 바꾸었다.
그러자 묵빛의 검에서 그보다 더 짙은 어둠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3미터, 5미터, 7미터…….
무려 10미터 가까이 치솟은 오러 소드를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인간계의 종말을 위해 마계에서 돌아온 대 악마와도 같았다.
눈에서는 지옥 불이 일렁거렸고, 입에서는 용암 같은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허나 쿤은 태연했다.
상대의 머리카락이 완연한 잿빛으로, 잿빛에서 흑색으로 물들어도.
그것을 넘어 육신 전체가 어둠으로 물드는 와중에도 허허로운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사람의 마음에 사는 두 마리 늑대에 대해 알고 있나?”
“…….”
칼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도, 그보다 더 전에도 물어왔던 질문이다. 허나 대답할 이유는 없었다.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쿤의 목숨을 거두고 그의 육신을 확보하는 것뿐, 다른 것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그렇기에 더 짜증 났다.
알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대답을 강요하는 저 노인을, 저 노인의 입을 찢고 싶었다.
어둠을 듬뿍 머금은 칼은 평소 이상으로 흥분하고, 또 분노하고 있었다.
쿤이 그런 그를 바라봤다.
자신의 호적수인 이안의 표현을 빌리자면, 눈을 통해 상대의 마음을 바라봤다.
뜨겁게 타오르는 가운데도 어둡기 그지없는 심연.
그 속에서 잔뜩 덩치를 불린 검은 늑대에 대해 말하려는 순간.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공격이 쏟아졌다.
그야말로 엄청난, 지도를 바꿔 버릴 만큼 무지막지한 위력의 검격.
머리끝까지 화가 난 칼은 거대한 검으로 주변 모든 것을 날려 버렸다. 쿤의 거처도, 바위도, 나무도. 하늘을 날아가던 날짐승들도 횡액을 면치 못했다.
검의 길이보다도 훨씬 넓게 퍼진 충격파가 일대의 풍경을 지워 버렸다.
하아, 하아.
그제야 감정이 가라앉은 칼이 뒤늦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상대를 죽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의 육신을, 시체를 온전히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쩌지? 지금의 일격으로 쿤의 육체가 증발했다면, 그렇다면…….’
……그러한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우뚝, 칼의 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비산하는 돌가루와 흙먼지 사이를 뚫고 천천히 걸어오는 노인.
그 모습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를 잡지 못했던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사람은 태어날 때, 마음속에 두 마리 늑대와 함께한다.”
“…….”
“한 마리는 검은 늑대. 대체로 부정적인 기운을 대변하지. 자신을 불태우는 분노,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 끊임없이 발목을 붙잡는 열등감…….”
저벅저벅, 쿤이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여유롭게,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느긋하게.
허나 칼은 예전처럼 검을 놀릴 수가 없었다.
과도하게 힘을 소모한 탓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점은 상대의 모습이었다.
전보다도 더욱 가벼워진 듯한, 아니 세상 그 무엇보다 자유로운 듯한 노인의 발걸음이, 묘하게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 왔다.
주춤, 칼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노인이 계속해서 걸어왔다. 이야기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입은 어느새 나머지 하얀 늑대에 대한 설명을 읊고 있었다.
즐겁고, 너그럽고, 용감하고, 올바른 향상심과 건전한 투쟁심으로 똘똘 뭉친.
그렇기에 때 묻지 않은, 설산의 정상처럼 아름답고 희게 빛나는.
“……내가 말한 두 늑대는 앙숙이기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싸움을 이어 간다. 검은 늑대가 이길 때도 있고, 하얀 늑대가 이길 때도 있어. 하지만 이처럼 엎치락뒤치락하는 녀석들도 언젠가는 승패가 난다. 패배한 쪽은 쫓겨나고, 승리한 쪽만 남아 마음속에 자리를 잡지. 그리고 계속해서 덩치를 불려 간다.”
“…….”
“주로 어느 쪽이 이긴다고 생각하나?”
“그게 지금…….”
“바로 먹이를 주는 쪽이다.”
노인은 상대의 대답을 듣지 않았다.
차갑게 말을 끊은 그가, 부릅뜬 눈으로 어둠에 물든 청년을 쳐다봤다.
“……네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아픔이 있었는지 온전히 공감하지는 못한다.”
쿤이 오른팔을 들었다.
아니, 오른팔이 아니었다. 이미 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으니. 허나 그렇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결국 먹이를 준 것도 너고, 검은 늑대를 키운 것도 너다.”
즈으으응-
자라났던 오러 소드가 변화했다.
빛이 강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옅어졌다.
밤하늘의 가장 옅은 별보다도 흐릿하게. 윤곽만 겨우 확인할 수 있는 검의 색이 마치 투명한 유리와도 같았다.
허나 그 볼품없는 검의 모습이, 칼에게는 그 무엇보다 두렵게 느껴졌다.
으득
어금니를 간 그가 재차 자세를 갖췄다.
주변을 쓸어버렸을 때와는 달랐다.
방어에 치중한 그의 검에서 또다시 검은색의 오러가 흘러나왔으나, 이 역시 위로 치솟지 않고 옆으로 넓게 퍼져 갔다.
방패처럼 두껍게 전방을 가로막는다.
아니, 그것을 넘어 모든 방위를 물샐 틈 없이 막아 버린다.
마치 거대한 검은색의 보석에 들어간 듯한 모양새.
어찌 보면 직전에 봤던 초대형 오러 소드보다도 더욱 대단한 광경이었지만, 쿤의 얼굴에는 놀라움 대신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그가 중얼거렸다.
“이거 원, 혼날 용기조차 없는 놈이었구만.”
하하하, 하하하하……
쿨럭, 쿠헉!
크게 웃어 재끼던 노인이 또다시 피를 토했다.
아까보다 적은 양이었다.
허나 그것이 상태가 호전됨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그도 느끼고 있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허나 괜찮았다.
이는 빈말도 아니었고, 허세는 더더욱 아니었다. 자포자기의 심정도 아니었고, 못돼처먹은 칼 린제이 녀석에 대한 용서도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삶을 돌아봤다.
완전히 벗어났다고, 내려놨다고 생각했던 와중에도 끝끝내 떨쳐 내지 못했던 단 한 가지 집착.
‘이안.’
그에 대한 열등감이 아니었다.
그에 대한 질투심도 아니었다.
쿤을 끝까지 두렵게 만들었던 건, 그를 꺾어 보기 위해 통째로 쏟아 넣었던 자신의 인생이…… 무가치해질 수도 있다는 데서 나오는 공포였다.
‘필요 없다.’
그가 웃었다.
직전까지의 호탕한 웃음이 아닌, 엷은 웃음. 한결 보기 편하고, 가벼워 보이는 웃음.
진작에 깨달았다.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게 훨씬 많다는 사실을, 2년도 더 전에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적지근하게 행동했으니, 벌을 받아도 싸다.
생각은 여기까지.
숨을 들이마신 쿤이 걸음을 멈추고 앞을 노려보았다. 스윽, 발끝에 힘을 준 그가 찌르기의 자세를 취했다.
검술의 현묘함이 부족하다고?
오러의 총량이 부족하고, 운용이 미숙하고, 당연히 위력도 동급의 검사에 못 미치고……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속도밖에 없다고?
괜찮다.
그거면 충분했다.
한 걸음에 공간을 뛰어넘고.
두 걸음에 시간을 앞질렀다.
대륙의 모든 이들이 입을 모아 말하길, 검의 궁극에 달한 이들을 ‘소드마스터’라 칭송한다.
허나 그 위대한 칭호조차 담을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여태껏 누구도 오르지 못했다 알려졌고.
앞으로도 등장할 거라고 결코 장담할 수 없는 경지.
그랜드 소드마스터(Grand SwordMaster).
마침내 이를 엿본 노인의 검이, 검은색의 구체를 자르고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우우우우웅-
쿤의 표정이 굳어졌다.
상대의 목숨이 붙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살아 있긴 했지만, 그는 이미 자기 힘으로 일어서는 것조차 힘든 상태.
이대로 걸음을 옮겨 마무리만 하면 문제 될 것 하나 없었다.
허나 그럴 수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몰고 다가오는 사제, 그리고 광대.
그중에서도 사제에게 시선을 맞춘 노인이, 허탈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쫓아내어 소멸한 줄 알았던 검은 늑대가…….’
다시 돌아왔다.
더욱 거대한 악이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