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영웅의 다짐 (5)
성기사 전력이 강한 나라답게, 아빌리우스 역시 훌륭한 연무장 시설을 갖추고 있다.
더군다나 올해는 대륙에서 가장 큰 행사인 ‘용사의 제전’까지 열리기에, 대회에 참전하는 손님들의 편의를 최대한 봐 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아이른 파레이라에게도 꽤 넓은 단독 수련장이 배정되었다.
문제는, 그 썩 괜찮은 수련장이 일주일 만에 엉망진창으로 망가졌다는 점이다.
“괜찮아. 얼마 안 해.”
“…….”
“그럼, 다시 할까?”
드드드득
화르륵-!
파직, 파지지직-!
모든 마법사의 왕, 지아 룬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소음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아이른 파레이라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연무장의 바닥을 삼키고 일어난 석재 골렘(Golem).
하늘 위를 두둥실 떠다니는 수십, 수백 개의 화염구와 그 사이를 제멋대로 쏘다니는 뇌전의 향연.
그 밖에도 그가 알지 못하는 여러 마법이 지하에, 지면에, 허공에 녹아들어 있다.
녀석들은 마치 제각기 의지를 지닌 듯,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자신을 골탕 먹일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허나 긴장할지언정, 겁을 먹지는 않았다.
아이른이 희게 미소 지었다.
가족을 위해 검을 들고, 소중한 인연들을 위해 검을 들고. 나아가 대륙을 지키기 위해 강철의 검을 세운 영웅 지망생인 그였지만.
‘검과 검술, 그 자체에도 충실하고 싶으니까.’
그랬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단련해 온 그는, 이미 누가 봐도 200퍼센트 검을 즐기는 ‘진짜 검사’였다.
파지직-!
직후 룬텔의 공격이 시작됐다. 첫 번째는 번개 마법. 수련을 위해 특별히 형성된 마력 결계 덕분에 위력이 무지막지했다.
보고, 생각하고, 행동하면 늦었다. 빠른 대처를 위해서는 감에 의지해야 했다.
머리를 비운다.
생각을 비우고, 시야를 확장하고, 그 이상의 감각을 모조리 동원한다.
허공을 떠다니는 먼지의 생김새, 촉감, 무게마저 손에 잡힐 듯 느끼게 된 아이른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팟
20미터 떨어진 곳에서 나타난 아이른이 대검을 휘둘렀다.
퍼퍼퍼펑, 어느새 지근거리까지 날아온 화염구들이 화려하게 폭발했다.
그 틈을 타고 떨어져 내린 번개 다발은 두 걸음, 세 걸음 전진하여 피했다. 미처 피해 내지 못한 녀석은 어깨를 사용해 흘려 버렸다.
치르르르-
엄한 곳으로 날아간 번개 줄기 하나가 허무하게 스러졌다.
이를 지켜보던 룬텔의 왕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재밌는 녀석이란 말이야.’
아이른이 대단한 놈이라는 것쯤이야 진작 알았다.
늙은 너구리 같은 성왕 앞에서 또박또박 자기 할 말을 하는 것만 해도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프레인 슬릭을 1합에 제압했던 것이 무려 2년 전이니, 그사이에 더욱 강해졌을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 수준의 마력 결계를 버텨 내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지 몰랐다.
‘그런데…… 방식이 독특하단 말이지.’
지아 룬텔이 방금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무수히 많은 화염과 번개 마법.
이는 물리력을 이용한 공격이 아니었기에 모조리 피해 내거나, 모든 데미지를 무효화할 수 있는 ‘오러 소드’를 사용해서 부숴 버리는 것밖에 대처 방법이 없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허나 아이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몇 개는 피해 내고, 몇 개는 부숴 버리고, 몇 개는 ‘흘려’냈다.
견갑이 금속 무구였다고는 하나, 그 밑의 몸뚱이는 사람의 육신임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그 순간만은 몸 전체가 쇳덩이가 된 느낌이었어.’
놀라운 일은 그 이후에도 이어졌다.
스르륵-
또다시 덮쳐 오는 화염의 그물망을 막아 낼 때는, 마치 물결이 흐르듯 시원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우어어어……
꽈아아아앙-!
끊임없이 아이른을 쫓아오며 괴롭히는 대지의 골렘을 상대할 땐 정석적인 대처를 보여 주었다. 막고, 찌르고, 베어 낸다.
물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지아 룬텔의 정신력이 여유로운 한, 골렘의 파손된 부분은 계속해서 회복되기 마련이니까.
중요한 것은, 이를 상대하는 아이른의 기운 역시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콰앙-!
즈우우우웅……
룬텔은 느낄 수 있었다.
골렘의 주먹과 아이른의 공격이 닿는 순간, 적지 않은 기운이 그의 대검을 통해 빨려 들어간다는 사실을.
그 순간의 녀석은 마치 나무인 것처럼 보였다. 골렘의 몸뚱이에 뿌리를 박아 대고 양분을 흡수하는 모습처럼 느껴졌다.
이를 오랫동안 관찰하던 그녀는, 뒤늦게야 아이른이 어떤 힘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 자식…… 검술에 오크 녀석들의 정령술을 녹여 사용하고 있구나.’
오행신공(五行神功)에 대해서 들어 보지 못한 바는 아니다.
끊임없이 순환하는 다섯 기운을 통해, 상생의 원리를 이용하여 오러를 키워 나가는 오크 종족만의 운용법.
마법과는 전혀 방식이 달라 익히지는 못했지만, 그 지식만큼은 웬만한 학자들보다 많이 알고 있는 지아 룬텔이다.
그렇기에 더 놀라웠다.
시간을 두고, 안정적인 장소에서 정신을 집중하여 기운을 끌어들이는 것만 해도 몹시 어려운 일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런 찰나의 순간에, 그 묘리를 활용하여 전투를 이끌어 간다고?’
그걸 넘어, 자기 자신을 살찌워 나간다고?
황당했다.
하지만 그만큼 재미있었다. 처음의 재미없던 느낌과는 다르게, 이제는 그의 물건이 아닌 그 자체에도 흥미가 갔다.
물론 호감이 있다고 해서 대충할 생각은 없었다.
지아 룬텔이 조금 더 출력을 높였고, 마법의 가짓수가 늘어났다. 그런데도 아이른은 꽤 잘 이겨 냈다.
더군다나 점점 더 몸이 풀리는 듯, 날카롭고 예리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물론 언제까지고 버틸 수는 없었다.
자존심 강한 왕의 표정이 점차 심각해질 무렵, 아이른의 신형이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환상 마법에 속아 균형이 무너진 탓이었다.
털썩
“후우, 하아, 허억…… 감사, 감사합니다.”
“뭘. 이 정도는 충분히 해 줄 수 있지.”
지아 룬텔이 웃으면서 말했다.
진심이었다. 그녀는 아이른이 원하는 바를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자그마치 룬텔의 왕이 가능한 한 어떤 소원이든 들어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녀석은 별다른 욕심 없이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을 달라’라는 대답을 했다.
물건의 소유자인 요술 고양이를 소개해 주는 것은 별것 아닌 일이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욕심이 없다기보단, 정직하고 올바른 느낌이야. 성왕 앞에서도 느꼈지만…… 진정 이번 대회에 어울리는 녀석이군.’
쉽게 말해, 그녀의 기준에서는 몹시 재미없는 녀석.
허나 그가 품고 있는 마법 외의 잠재력, 능력을 생각하면 마냥 무시하기는 또 힘들었다.
어찌 됐건 용사의 제전이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 고양이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어울려 줄 의무가 있으니 찬찬히 관찰해 보자.
그런 생각을 품으며 다시금 고대 문자를 살펴보려던 때였다.
“그런데, 그게 마도구였나요?”
“응?”
“그 황금잔 말입니다. 저는 루루, 그러니까 고양이 요술사가 준 거라서, 당연히 요술의 힘이 깃든 거로 생각했는데…….”
“…….”
“아. 설명하기 어려우시다면, 괜찮습…….”
“마법도, 요술도. 경지가 높아지다 보면 나름 겹치는 구석이 있어.”
지아 룬텔은 의외로 순순히 아이른의 질문에 입을 열었다.
놀라운 것은 그 내용이었다.
마법과 요술에 겹치는 구석이 있다니?
마법의 왕이 하는 말이기에 더욱 그랬다.
철저한 계산과 공식하에 굴러가는 마법과, 세상에 떼를 쓴다는 괄시의 말까지 들을 정도로 체계가 없는 요술을 비교하는 것은……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꽤 큰 실례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왕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녀가 말을 이어 갔다.
“수준 높은 마법사라면 아무 도움도 없이 마법을 구현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지. 무언가의 도움을 받는다. 뛰어난 마법사도 마찬가지야. 더 효과적으로 마법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정신 집중을 보조해 줄 수단이 필요해. 그리고 그중 가장 보편적인 것이 말, 주문이다.”
“…….”
“언어는 생각을 담는 도구이고, 생각은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지. 그런 관점에서 생각할 때, 강렬한 염원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요술과 아주 별개의 능력이라고 할 수는 없어. 물론 그 과정은 다르지만…….”
잠시 생각에 잠긴 룬텔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력과 마음을 함께 담은 듯한 고대의 문자를 볼 때마다…… 어쩌면 둘을 융합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둘은 처음부터 하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야.”
“…….”
“흠. 너무 나 혼자 심취해서 떠들었나?”
“아, 아닙니다.”
아이른이 고개를 저었고, 지아 룬텔이 피식 웃었다.
“뭐…… 굳이 따지자면 검술도, 신성력도, 정령도 비슷하지. 흑기사단장의 마음의 검도 그렇고, 신성력도 신에 대한 거룩한 마음을 담아 피워 내는 기적이고,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정령술 역시 마음 공부의 비중이 작지는 않다고 들었다. 심지어…….”
악마의 계약조차도 파괴적인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세상 만물은 마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걸지도 모르지.
여기까지 말한 그녀가 한 번 더 웃으며 말을 맺었다.
“물론, 그 마음이란 것을 마법사의 관점으로 연구하고, 분석하고, 누군가에게 설명할 정도로 명확한 답을 구하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겠지만.”
“…….”
“좋아, 잡담은 여기까지. 대충 회복했으면 다시 할까?”
“예, 감사합니다.”
아이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곧바로 집중력이 올라오지는 않았다. 룬텔의 왕과 나눈 짧은 대화 내용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세상 만물을 이루는 모든 것이,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모든 힘과 능력이…… 어쩌면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
‘왠지 마음에 드는 말이야.’
명확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비로소 머리가 맑아진 그가 지아 룬텔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아이른이 검을 들었다.
그리고 자세를 갖췄다. 몸의 자세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도 함께였다.
꼭 우승할 것이다. 결과에만 중점을 둔 게 아니라, 그에 합당한 과정을 선보이며 대륙의 모든 이에게 희망을 전파할 것이다.
새로이 마음을 다잡은 영웅의 검에서, 뜨겁고도 단단한 신념의 빛이 우뚝 솟았다.
* * *
“후우, 후우, 하아…….”
피로했다. 조금 더 첨언하자면 예민했다. 그리고 혼란스러웠다.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어둠의 힘까지 끌어다 썼다. 그런데도 압도하지 못했다.
그것을 넘어 지금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가문의 이름을 버린 자, 칼이 긴장 가득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양팔이 날아갔음에도, 한 줌의 오러밖에 남아 있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괴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노인.
대륙 최강의 검사, 쿤의 입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이 흘러나왔다.
“사람의 마음에 사는 두 마리 늑대에 대해 알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