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영웅의 다짐 (4)
고대의 언어.
현 대륙인들은 사용하지 않는 옛날 옛적의 언어로, 최소 400년 전의 소수민족들, 혹은 1000년 전에 사멸한 고대 왕국들의 말을 일컫는다.
‘꽤 흥미로운데.’
성왕 역시 이 주제에 관해서는 적지 않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태초부터 존재하셨던 신의 말씀을 하나라도 더 받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하다.
지금도 수많은 신학자가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고대 문헌들을 해석하고 있었으니, 지금의 일은 당황스럽기보단 반가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룬텔의 왕이 인문학적 가치로만 고대 문자를 바라보는 건 아닐 테지만…….’
고대의 문자 가운데서도 유독 특별한 것들이 있다.
일반인은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역사적 지식과 소양이 넘치는 위대한 학자들조차 절대로 파악할 수 없는.
‘마력’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법사의 자격을 갖춘 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힘이 담긴 문자.
‘마법사는 용언(龍言)이라 표현하고, 요술사는 언령(言霊)이라 표현한다고 했던가. 아무래도 진짜가 등장한 것 같군. 만지자마자 자연스레 빛이 나는 것을 보니 말이야.’
성왕의 입에서 소리 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저 성질머리 고약한 여자의 눈총을 받을 것이 뻔했다.
방해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지금 보여 주는 지아 룬텔의 집중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것이었으니까.
장소도, 시간도, 잔에 음각된 고대 문자 외에는 모든 것을 잊은 듯한 그녀의 눈동자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났다.
두 시간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룬텔의 왕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더 기다릴 수는 없었다.
궁금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성왕이 말을 걸었다.
“뭔가 알아낸 거라도 있나?”
“……없어.”
“없다고?”
“그래. 굳이 따지자면…… 내가 가진 어떤 컬렉션보다도 오래된 물건이고, 오래된 문자라는 거. 어쩌면…….”
잠시 뜸을 들인 지아 룬텔이, 흥분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관용적 표현으로서의 용언이 아니라, ‘진짜 용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이봐.”
그녀가 홱 고개를 돌렸다.
성왕을 바라보는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하늘 위의 태양도 저만큼 뜨겁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나한테 팔아.”
“…….”
“너 돈 쓸데 많잖아. 얼마면 돼? 얼마면 넘길 거야, 이거?”
숨길 수 없는 욕망.
감출 수 없는 탐구욕.
바라보는 이의 가슴마저 흥분시킬 만큼 격렬한 감정이었지만, 성왕은 동요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을 지킨 그가, 와이즈 상단원만큼 노련한 표정과 함께 말했다.
“제시.”
* * *
“후우, 힘들다.”
안내받은 방의 침대에 몸을 누인 아이른 파레이라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기는 했다. 남들이 보기엔 꽤 태연해 보였을지 몰라도, 적지 않게 긴장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상대가 성왕이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뛰어넘어야 할 진짜 상대는 따로 있었다.
‘이그넷 크레센시아.’
검사로서의 목표를 떠올린 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1년 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무엇보다 뜨거운,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내뿜던 그녀의 모습은 마치 태양 같았다.
무슨 수를 써도 떨어뜨릴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더 넘고 싶었다.
떨어뜨릴 수 없다면,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서고 싶었다.
‘물론, 다른 이들도 절대 무시할 수 없지.’
최근 왕래가 뜸한 브랫 로이드 역시,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성장을 이뤘을 것이다.
본 지 2년이 넘은 주디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보여줬던 불꽃은 어찌 보면 이그넷의 것보다도 더욱 순수했다.
모든 것을 불살라 얻을 경지가 무엇일지, 자신의 깜냥으로는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밖에도 자신이 만나 보지 못한 수많은 강자가 모조리 이 대회에 출전한다.
소문만 못한 이도 있겠지만, 대부분 그보다 뛰어나다고 보는 것이 나을 터였다. 실력의 삼 할은 숨기라는 격언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결국, 우승하기 위해서는 이대로는 안 돼.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해.’
생각을 마친 아이른이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짐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함이었는데, 마침 문밖에서 안내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른 파레이라 님을 찾는 분이 계십니다.”
“……저를, 찾는다고요?”
“예. 지금 연무장에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안내해 드릴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이른 파레이라의 마음에 다른 감정이 끼어들었다.
‘일리아! 벌써 도착해 있었나?’
그렇다.
자신이 신성왕국 아빌리우스로 향한 것은 용사의 제전에 참가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연인인 일리아 린제이를 찾아가기 위함이기도 했다.
사랑하는 연인이 그곳에서 기다린다고 하는데, 어찌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순식간에 감정이 격해진 아이른이 벌컥 문을 열었다. 안내인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가 말했다.
“안내해 주시죠.”
“…….”
“빨리, 빨리요.”
“예, 알겠습니다.”
잠시 당황했던 안내인이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말로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안내를 시작했다.
물론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허나 더 재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아이른은 얌전히 그의 뒤를 따랐고, 건물을 벗어나고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르자 마침내 연무장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앙에, 누군가가 있었다.
“…….”
아이른 파레이라가 말없이 그 존재를 응시했다.
흩날리는 은발.
강인하기 그지없는 육체.
그 누구보다 열심히 검을 휘두르며, 주변의 바람을 조종하는 신비로운 힘을 보여 주고 있는…… 아단 왕국의 자랑.
일리아 린제이.
……가 아닌, 조슈아 린제이.
그가 홱 신형을 돌리더니, 몹시 쾌활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왔다.
“반갑다, 아이른 파레이라.”
“…….”
“왜 말이 없지? 혹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기대했나? 내 딸이라거나?”
“…….”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로 그런 모양이군. 안타깝게 됐다. 일리아는 지금 수련 중이다. 매우 중요한 순간이기에, 적어도 2주 정도는 만날 수 없을 거야. 이해하지?”
“……이해합니다.”
“이해하는 것치곤 기분이 언짢은 모양인데.”
“…….”
“그런데 이상하군. 네 그런 모습을 보니, 나는 꽤 기분이 좋단 말이지. 하하, 하하하하!”
부웅!
부우웅-!
부웅-!
조슈아 린제이가 검을 휘둘렀다.
정말로 신이 나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경쾌하고 산뜻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것이 아이른의 실망감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슈슉, 요술대검을 소환한 그가 오러 소드를 뿜어내며 말했다.
우우우우웅-!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대련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오, 대련 말인가? 좋지. 그런데 진짜 대련 맞아?”
“…….”
“대련이라고 하기에는, 눈빛이 너무 매서운데. 연인의 아버지에게 보일 눈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가겠습니다.”
아이른이 짧게 대꾸했다. 터엉, 말을 마친 즉시 린제이 가주에게 돌격하는 그의 모습은, 평소에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사나운 모습이었다.
“하하하, 하하하하!”
조슈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그를 더욱 즐겁게 만들었다.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 가주로부터 일리아 린제이의 것과 비슷한 검술이 펼쳐졌다.
그것이 더 짜증 났지만, 아이른이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었다.
……그저 분노와 실망감을 담아 검을 휘두르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쾅, 콰앙!
콰아앙!
합을 나누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조슈아 린제이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아이른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 * *
“감이 많이 무뎌졌군.”
“…….”
“최근에 대련다운 대련을 못 해서 그런 건가?”
“아무래도 영향이 없진 않겠군요.”
아이른의 솔직한 인정에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평하긴 했지만, 그는 지금 꽤 놀란 상태였다. 몇 달 전에 겨뤘을 때보다 엄청나게 성장했다.
둘 모두 알고 있었기에 따로 언급하지 않았을 뿐, 실제로 이번 대련은 가주로서도 결코 여유로운 흐름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욱 아쉬웠다.
그가 짚은 것은 경지의 성장과는 별개의 부분.
바로 실전 감각을 말하는 것이었다.
‘머리 회전도 조금 느린 느낌이고, 칼끝도 미세하게 아쉬운 부분이 있었지.’
지적받은 아이른 역시 진지하게 이에 대해 고민했다.
사실 큰일은 아니었다.
오러의 총량을 높이고, 오러 운용을 눈에 띄게 개선하는 등의 목표는 단기간에 바라긴 어렵다.
허나 살짝 풀어진 몸과 마음에 긴장을 부여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실전에 가까운 치열한 대련을 연달아 치르다 보면, 자연스레 세포가 깨어나고 시야가 트이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마땅한 상대가 없다는 점이었다.
“나는 안 된다. 딸의 경쟁 상대에게 좋은 일을 해 줄 수는 없지.”
“…….”
“너무 정 없었나? 뭐, 조금 더 듣기 좋게 말하자면…… 일리아의 수련을 도울 시간도 부족하다. 아까 말했듯이 매우 중요한 순간이라서.”
“이해합니다.”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딸의 성장을 위해 힘쓰겠다는데 떼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그런 무리한 부탁을 할 정도로 경우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로 상대가 없네.’
브랫과 주디스도 신성왕국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허나 그들 역시 일리아와 마찬가지로 개인 수련에 힘쓰고 있었다.
회포 정도는 풀 수 있겠으나, 경쟁 상대에게 억지를 쓰면서까지 자기 편의를 봐 달라고 하는 것은 힘들었다.
이안 관주님과 쿤, 카라쿰 등은 도착했으려나?
그렇다면 그들의 도움을 받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은데…….
이런저런 고민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그런 아이른을 조슈아가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는, 30대 초반 외모의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말없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아이른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을 뒤늦게 파악한 조슈아 린제이가 대경하여 전투 자세를 갖췄다.
“네겐 볼일 없다.”
여자가 나직이 말했다.
가주와 마찬가지로 뒤늦게 기척을 파악한 아이른이 신형을 돌렸다.
눈에는 놀람이 가득했고, 손은 당장이라도 대검을 소환할 듯 긴장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마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여전히 차분한 표정의 그녀가, 찬찬히 자신의 할 말을 이어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아니란 말이야.”
“…….”
“네가 이 물건의 가치를 알았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들어. 아마 직접 구한 물건도 아니겠지. 누군가에게 받았을 거야.”
아니면, 단순히 운이 좋았던 거려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조슈아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룬텔.”
“…….”
“…….”
두 검사의 얼굴에, 더욱 진한 경악의 감정이 덧씌워졌다.
룬텔.
아빌리우스를 제외한 가장 강력한 왕국의 이름이자, 3대 마법 명가에서도 첫 손에 꼽히는 유서 깊은 집단의 성씨.
이를 이름처럼 사용할 수 있는 존재는, 대륙에서 단 한 명뿐이 없었다.
지아 룬텔.
모든 마법사들의 왕.
그녀의 출현에 냉철하고 침착한 조슈아마저 마른침을 삼킬 때였다.
“말해라.”
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물건을 얻게 된 경위를, 하나도 빠짐없이, 꼼꼼하게 말해라.”
마력도, 기세도 담기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른이 느끼는 압박감이 적지 않았다.
마치 3대 검사를 처음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감각.
다행인 점은, 그녀가 강압이 아닌 거래를 제안했다는 부분이었다.
“그리 한다면, 네가 원하는 소원 하나를 들어주마. 물론 내가 들어줄 수 있는 한계 내에서 말이야.”
“…….”
“다만, 그 한계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을 것이다.”
자, 어서 말하거라.
마법사의 왕이 재촉했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음을 느낀 조슈아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배려의 행동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아이른이 느끼는 중압감은 배로 늘어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괜찮았다.
짧게 숨을 내쉰 그가 지아 룬텔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윽고, 아이른 파레이라의 입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