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영웅의 다짐 (3)
“후우…….”
“아, 어지러워. 아…….”
“……확실히, 숨이 막히긴 했네.”
“성왕 폐하를 뵌 분들은 대부분 그렇게 말씀하셔요. 아냐도 여전히 긴장돼요.”
성왕과 아이른 파레이라 사이의 짤막한 대담이 끝나고, 마침내 방에서 나온 일행이 제각기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불카누스와 아냐 마르타는 그나마 여유가 있었으나, 에단을 비롯한 모험가 파티원들은 하나같이 힘든 전투라도 벌인 듯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래서…… 아이른이 더 대단하게 느껴져.’
안정을 되찾은 엘프 마법사, 쟈린이 아이른을 바라봤다.
무슨 일 있냐는 듯 평온한 얼굴로, 예의 부드러운 미소로 자신을 쳐다보는 청년.
자신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랬다.
저런 순해 보이는, 평범한 귀족 가문에서 가출한 것 같은 느낌의 녀석이…… 성왕의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이해가 안 됐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멋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용사의 제전에서 우승하겠다는 포부 때문이 아니었다.
그 말의 안에 내포된 신념과 뜻 때문이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대륙인 모두를 위해 마음을 쏟는 그의 모습은…… 진정으로 ‘영웅’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혹시 모르지. 진짜 우승할 수 있을지도.’
원래는 턱도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아론이 아니라 진짜 아이른 파레이라라고 한들, 용사의 제전은 만만한 대회가 아니다.
나이 제한이 있다고는 하나, 아이른보다 두 배 이상 살아온 괴물들이 득실거렸기 때문이다.
당장 5대 검술명가 출신인 캄린 레이만 하더라도 차세대 10대 검사로 유력한 인물이었으니, 20대 중반의 검사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너무 과한 바람이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
쟈린이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방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와이즈 상단의 최고수인 브루디 샤퍼를 일검에 제압하고.
그것도 모자라 대륙의 3대 검사에 버금간다고 알려진 퀸시 마이어스를 상대로 거의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줬다.
물론 그가 100퍼센트의 실력을 보여 준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은 아이른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어쩌면 진짜 우승할지도 몰라.
아니, 진짜 우승했으면 좋겠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른의 열렬한 팬이 된 쟈린이 속으로 중얼거릴 때였다.
“대단하지 않아?”
“응? 아, 그렇지. 대단하지. 성왕 폐하 앞에서 할 말 다 하는 사람이라니, 당연히…….”
“아니. 그거 말고. 아니아니…… 물론 그것도 대단하지만.”
에단이 턱짓으로 동료들을 가리켰다.
자신이 언제 긴장했냐는 듯 허세를 부리는 키난 레예스와 고래를 절레절레 젓는 조반니, 그런 그들을 상대로 농담을 건네는 아이른의 모습을 보였다.
그야말로 평범한, 친한 소규모 용병단다운 광경.
이를 지켜보던 파티의 리더가 조용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거든. 아, 아론이 아니라 아이른이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원래 엄청난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놀릴 때도 주눅 든 모습을 안 보인 거고, 브루디 샤퍼나 가엘 와이즈 앞에서도 자기 할 말 다 했던 거고. 성왕 폐하 앞에서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
“잘 생각해 보면, 아이른은 항상 똑같았더라고. 상대가 어떤 위치에 있든,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든, 반대로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더라도…… 똑같이 웃으면서 얘기하고, 예의 바르게 말하고. 남 기분 상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자기 얘기는 당당하게, 자신 있게 하고. 봐, 지금도 그렇잖아. 아이른한테 우리들은 진짜 아무것도 아닌 용병 나부랭이들일 텐데, 그런 느낌이 전혀 없지. 조반니는 조반니로 보고, 키난은 키난으로 보고. 나도,너도 마찬가지고. 그런 걸 보니까, 아이른은 마치…….”
남의 위치와는 상관없이, 자기 중심이 단단하게 서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잠시 혼잣말을 섞은 에단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음, 말뜻이 제대로 전달됐는지 모르겠네. 하여튼, 그, 뭐냐…… 대단한 사람인 건 맞아. 근데 그게 능력이 대단하고, 이미 높은 위치에 올라 있고, 그래서 대단하다기보다는…….”
“……마음 자체가 강한 사람이지.”
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것 같았다. 에단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역시 리더는 리더였다.
자기보다 더 본질적인, 진짜 중요한 점을 곧바로 파악하고 배우는 지금의 태도가 증명했다. 에단 역시 썩 괜찮은 녀석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럼, 이제 안내를 시작해도 될까요?”
어수선한 분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그러자 지금껏 잠자코 있던 왕성의 안내인이 입을 열었다.
조반니와 키난 레예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긴장감이 사라진 탓에 너무 풀어져서 오래 떠들어 댔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쟈린이 그런 그들을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에단은 그저 웃었다. 아이른과 시선을 교환한 그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이었다.
대장장이 불카누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잠깐.”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음, 있네. 안에서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다 보니 깜빡 잊었군. 미안하지만, 성왕 폐하께 대신 전해 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아, 그러면 저도…….”
“음? 너도?”
불카누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아이른을 쳐다봤다.
무려 최강대국의 수장인 성왕 폐하 앞에서, 눈 똑바로 뜨고 ‘용사의 제전 우승’을 언급했지 않은가.
그런데 또 할 말이 있다고?
할 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공간 주머니에 쑤욱 손을 넣은 아이른이 이런저런 물건들을 꺼냈다.
도대체 뭘까, 궁금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주변인들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웬만한 것에는 흥미가 없는 아냐 마르타조차 눈이 동그래졌고, 내내 침착한 모습이던 안내인 역시 흠, 하는 신음과 함께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음, 이것들을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냥 전해 드리기만 하면 될까요? 따로 하실 말씀은 없습니까?”
“음…….”
안내인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아이른 파레이라.
그가 이내 미소를 짓고는, 이렇게 말했다.
“교단에 내는 헌금입니다.”
“…….”
“와이즈 상단이 매해 기부하는 금액에 비하면 약소하겠지만, 그래도 대륙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 * *
“허허, 허허허. 허허허허.”
“그만 좀 웃어, 노친네야.”
“허허, 어떻게 안 웃을 수 있나. 그런 모습을 봤는데. 젊은이의 그런 패기 넘치는 모습을 봤는데! 허허, 하하하하…….”
성왕은 진심으로 기분이 좋았다.
마주한 순간 바로 알았다.
아이른이 단순히 검만 휘둘러온 멍청이가 아니라, 오랫동안 자신의 뜻과 꿈을, 신념과 의지를 갈고 닦아 온 진짜 영웅이라는 사실을.
그렇기에 더 짓궂게 대했다.
단순히 신성력을 발휘해 압박한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는 거대하고도 복잡한 문제를 말하며 그에 대한 답을 구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 곤란한 상황을, 이런 식으로 돌파하다니.’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한다.
허나 이 과정이 비굴하고 구차하지 않다. 그렇다고 뻔뻔하지도 않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자신감까지 내비쳤으니, 성왕으로서는 젊은이의 앞날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 정말 기대되는구먼. 검에 조예가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야. 과연 어느 정도의 성과를 보일까? 8강? 4강? 어쩌면 결승까지 갈지도 모르겠군. 벌써 궁금해. 저 친구와 이그넷 경을 상대로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네가 애냐? 싸움 구경이 그렇게 재밌어?”
“재밌지. 재미있고말고. 대륙의 새로운 희망이 피어나는 자리를 지켜보는 게 어찌 재미있지 않을 수 있겠나? 자네야말로 이상하군. 왜 이렇게 삐딱해?”
“그야, 내 기대에는 못 미쳤으니까 말이지.”
“애초에 자네 기대는 좀…… 검사에게 마법사의 재능을 바라는 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그건 그렇지만.”
룬텔의 왕, 지아 룬텔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가 검사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검과 마법, 양쪽으로 대성하는 것이 힘든 걸 넘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더군다나 아이른 파레이라는 이미 요술에까지 재능을 보이는 상황.
두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인 이에게 한 가지를 더 기대하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마력의 흐름을 눈으로 지켜보는 것 같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겠어?’
그렇다.
자신이 평생을 찾아 헤매던 천부적인 마법 재능.
룬텔 가문의 뒤를 이을, 자신의 후계자로 손색이 없을 하늘이 내린 재능!
그것이야말로 지아 룬텔이 확인하고자 했던 부분이었다. 그녀가 30년 만에 외출에 나선 이유이기도 했다.
허나 직접 관찰한바, 아이른은 마법에는 재능이 없었다.
그것이 룬텔의 왕을 시무룩하게 만들었다.
“아이고, 괜히 왔다. 괜히 왔어. 할 일도 많은데 괜히 시간만 날렸네.”
“할 일이 많기는. 재작년인가? 이프레인 슬릭이 난장 피우던 것도 안 막은 주제에.”
“이봐, 룬텔은 말이 왕국이지, 그냥 세 가문의 연합체라니까? 알잖아? 왕이라고 해도 다른 가문의 일에 개입하기 힘들어.”
“그러면 왕 자리에서 내려오게.”
“싫어.”
“왜?”
“칭호가 멋있잖아.”
“그거 아나? 가끔 자네의 정신 나간 모습이 부러울 때가 있네.”
“부러우면 너도 꼴리는 대로 살든가.”
“그럴 순 없지. 하여튼 아쉽겠군. 자네가 찾는 인재가 아니어서.”
여기까지 말한 성왕이 곧바로 서류 작업을 시작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는 지아 룬텔과 달랐다. 책임감이 있었고, 사명감이 있었다.
아이른에게 말했던 것과 달리, 와이즈 상단 사건도 이미 계산이 서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몸이 두 개, 아니 세 개여도 모자랐다.
‘부디 더 곤란한 일이 터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아이른의 안내를 맡았던 사제가 다시 돌아오자 가슴이 철렁했던 성왕이었다.
다행히도 큰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 불카누스가 자발적으로 무구를 제공한다는 소식에 그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최근에 들은 소식 중 가장 반갑군.”
“참으로 그렇습니다.”
불카누스 넘버링 소드.
무덤에서 가끔씩 발견되는 영웅의 유품, 성스러운 힘이 담긴 신화 속의 물건, 혹은 고대 던전에서나 찾아볼 법한 마법 아티팩트들……
이에 비견될 정도로 대단한 성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그의 창조물이었다.
그런 대단한 물건을 단장, 부단장급이 아니라 일반 단원들에게까지 지원한다니.
‘무구의 질도 질이지만, 그 상징성만으로도 사기진작에 큰 보탬이 되겠어. 매우 좋은 일이다.’
더군다나, 좋은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아이른의 헌금이었다.
물론 불카누스의 것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건넨 금은보화가 값비싸다고 해도, 넘버링 소드에 비할 수는 없다. 와이즈 상단의 헌금에 비할 수는 더더욱 없다.
하지만, 그가 어떤 마음으로 눈앞의 재화를 기부했을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성왕은 자신의 마음 한편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당혹스러운 일은, 잠시 후에 벌어졌다.
“……지아?”
성왕이 지아 룬텔의 이름을 불렀다.
허나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의 목소리를 듣지조차 못한 것 같았다.
벌떡
룬텔의 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테이블 바로 앞까지 다가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황금의 잔을 들었다.
몹시도 진중한 표정.
그 모습을 본 성왕조차 덩달아 긴장한 기색을 보일 때, 그녀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잔의 무늬…… 아니, 문자. 이거…….”
……고대 문자인데?
직후, 무늬에서 푸른색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