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301화 (301/388)

◈ 98. 영웅의 다짐 (2)

공간과 공간을 이어 주는 아냐 마르타의 포탈은 무척 신비롭다.

통과하는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지만, 온갖 기묘한 감각이 한꺼번에 덮쳐 오다 보니 시간이 길게 늘어나는 듯한 느낌도 든다.

아이른 파레이라를 비롯한 이들 모두가 그러한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에단 파티원들의 반응이 훨씬 격했다.

‘아빌리우스의 왕궁으로 향하는 요술 문’이라는 것 정도야 분위기상으로 파악하긴 했지만, 안다고 해서 신비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마법보다 대단한 게 요술이라더니…….’

마법사들이 들으면 불쾌할 생각을 품으며, 조반니는 황금의 포탈 내부를 유영했다.

다른 이들도 제각각의 감상을 떠올리며 평생에 다시 없을 경험을 만끽하고 있었다.

허나 에단만큼은, 남들과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성왕 폐하라.’

꿀꺽, 절로 마른침이 넘어가는 단어다. 실제로 에단의 속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으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물론, 딱히 죄를 짓거나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수틀리면 신용이고 뭐고 다 내던진 채 도망간다고 놀림받는 용병업계에 종사하지만, 적어도 자신은 지금까지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왔다.

금색의 용병패는 노름판에서 얻은 것이 아니다. 실력과 인성, 책임감과 리더쉽을 동시에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업적이었다.

그야말로 대륙을 떠도는 모험가들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에단의 삶은 지탱하는 가장 큰 자부심.

그래, 자부심…….

‘그 자부심, 지금도 있는 거 맞나?’

에단의 안색이 어둡게 물들었다.

솔직히 말해, 지금의 그에게는 예전만큼의 자신감과 자부심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예전이라면 어깨 쫙 펴고 이야기를 나눴을 만한 대머리 엑스퍼트, 그가 와이즈 상단에 소속된 것을 보자마자 눈치를 보게 됐고.

소드마스터 브루디 샤퍼의 안광을 보는 순간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최강의 검사는 못 되더라도, 그런 존재 앞에서 당당할 만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다짐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 뒤의 일은 어떤가?

이 역시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가엘 와이즈가 악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정황상 확실함에도…… 쟈린과 함께하는 것을 꽤 오래 고민했다.

자신에게 피해가 올까 봐.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질까 봐. 휩쓸려서 날아가 버릴까 봐…….

‘나는,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 아니었어.’

비로소 자신의 현 위치를 자각한 에단에게 있어서, 대륙 최강국의 수장인 성왕을 만나는 자리는 엄청난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핫!”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풍경이 바뀌었다.

넓고 깨끗한 방. 그에 비해 가구가 별로 없어 휑하다는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는데, 테이블만은 커다랬다.

의자도 모두가 앉을 수 있을 만큼 넉넉했다.

허나 에단은 함부로 엉덩이를 붙일 만큼 담이 크지 않았다.

테이블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마을 촌부라고 해도 믿을 법한 평범한 노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현 아빌리우스를 이끄는 성왕이었다.

‘무, 무슨 말을 해야…… 아니, 말을 안 하는 것이 맞나?’

에단이 다시 한번 침을 삼켰다. 아니, 삼키는 시늉을 했으나, 넘어가는 것은 없었다. 이미 입안이 사막처럼 마른 탓이었다.

그가 눈동자만을 움직여 주변을 살폈다.

다른 이들 역시, 심지어 항상 여유로워 보였던 대장장이 불카누스마저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에 비해 노인은, 성왕은 여유로웠다.

아니, 여유로운지조차 모르겠다.

그저 정물화 속에 담긴 사물처럼 미동도 없이,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조금 옆에 떨어져 앉아 있는, 30대 초반 정도의 여성과 함께 말이다.

‘저, 사람은, 누구지?’

말이 아닌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가닥가닥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옆의 여자는 성왕보다도 더욱 분위기가 무서웠다.

화장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상이 진했는데, 평생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눈빛이 강렬했다.

물론 그 눈빛이 자신을 향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른 파레이라.

노인과 여성의 시선은, 전부 젊은 영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오랫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쟈린도, 조반니도, 키난 레예스도, 에단도.

불카누스와 그들을 인도했던 아냐 마르타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적지 않은 압박감에 땀을 몇 방울씩 흘리며,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강자의 기세 때문에?

그렇지 않았다.

성왕과, 성왕의 옆에 나란히 있을 수 있는 존재. 그만큼 대단한 이들이 등에 업은 ‘위치’ 때문이었다.

그러한 높은 위치로 말미암은 ‘위세’ 때문이었다.

그때, 에단이 느꼈다.

여기서 유일하게 태연한 안색을 하고 있는 아이른 파레이라.

그만이 상대의 신분과 위세에 주눅들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그것이야말로 그가 가진 검술 실력과 인맥, 배경 따위보다 그를 더욱 빛나게 한다는 것을 말이다.

“저를 보고 싶다고 들었습니다.”

“…….”

“…….”

“따로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

“…….”

“그렇다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을 먼저 하겠습니다. 바로…….”

와이즈 상단, 그리고 가엘 와이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서두를 연 아이른 파레이라가, 막힘없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빠지는 것도 없었고, 조잡한 면도 없었다. 마치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준비했던 것처럼 매끄럽게 내용이 정리된 상태였다.

가엘에 관한 이야기라면 할 말이 산더미였던 쟈린조차 첨언할 생각이 안 들 정도로, 깔끔하고 명확하고 자세했다.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이 흘러갔다. 공허했던 공간이 아이른의 단단한 목소리로, 정의로운 신념으로 가득 채워졌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꼈고, 전보다 편안한 자세로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허나 젊은 영웅의 말이 끝났을 때.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던 성왕의 무거운 입이 열렸을 때, 모두는 다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와이즈 상단이, 가엘 와이즈가 옳지 못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

“아무렴. 그 영악한 하프 엘프 녀석이 아무리 치밀하다 해도 아빌리우스의 눈을 피할 수는 없지. 한 번은 피할 수 있어도 두 번, 세 번 악행이 이어지면 결국 꼬리가 밟히는 법. 그래도…….”

성왕이 늙수그레한 외모와 달리 투박한 손을 들어 아이른을 가리켰다.

“너 같은 애송이에게까지 봉변을 당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알고 계셨다면, 왜 지금까지 가만히 놔두셨습니까.”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였다.”

“무고한 엘프들을 세뇌하고, 정신을 무너뜨려 추악한 인간 귀족들에게 팔아넘기는 것이…… 이를 통해 상단의 영향력을 넓히는 것이, 그런 집단을 방치하는 것이 진정 대륙의 평화를 위한 길입니까?”

“와이즈 상단이 한 해에 내는 헌금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고 있나?”

“…….”

“정확한 액수를 말해 줘 봤자 제대로 감이 오지 않겠지. 너무나도 많은, 상식을 초월한 액수일 테니. 내 너를 위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마. 조금 더 이해하기 편하도록 말이다.”

여기까지 말한 성왕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설명에 들어가기에 앞서 머릿속으로 정리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야기를 시작할 수 없었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한 발 먼저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듣고 싶지 않습니다.”

“……!”

“……!”

“……!”

“그 어떠한 이유가 있더라도, 핑계를 대더라도, 변명을 하더라도. 엘프들의 희생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단호하기 그지없는 그의 말에, 모든 이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단의 경우는 비명이 나오려던 것을 간신히 참을 정도였고, 이번 일에 가장 민감한 쟈린도 안색이 새파랗게 질릴 정도였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던 성왕 옆의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하하, 어깨가 들썩임에 따라 화려한 귀걸이와 목걸이가 차르륵 소리를 냈다. 그것이 그 외의 고요함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알고 있습니다. 성왕 폐하의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와이즈 상단이 대륙에 얼마나 많은 후원을 하는 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매년 기근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식량을 베풀고, 배움에 목마른 평민, 고아 아이들을 위해 장학금을 베풀고, 도서관을 건립하죠. 최근에는 악마, 마인들에 저항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 무기와 방어구까지 싼값에 지원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정말이군. 정말로 잘 알고 있어.”

성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 역시 전과 달리 은은한 미소를 품고 있었는데, 아이른이 어떤 결론을 낼지 몹시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가 물었다.

“그래. 그렇다면 네 생각은 무엇이냐. 말해 봐라. 와이즈 상단은 작금의 어지러운 대륙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하나의 커다란 축이다. 이를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 정도면서, 어찌 가엘 와이즈를 처벌해야 한다는 말을 할 수 있지?”

“엘프들의 피해를 묵인하고 얻는 지원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소중한 것을 희생하여 이득을 얻는 행위는 악마와의 계약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건 너만의 생각이겠지. 세상엔 너 같은 사람들만 있지 않아. 자신이 먹을 빵 한 쪽을 위해 남의 목숨을 앗아갈 준비가 된 이들이 대륙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런 이들마저 모두 포함한 게 인간이고, 세상이다. 네 말대로라면 그들 전부는 악마와 계약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살 가치가 없는 이들인가?”

“비약입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상론은 집어치워라. 그리고 말해라.”

“…….”

“혼란으로 점철된 세상 속에서, 네가 생각한 해결책은 무엇이냐?”

우우웅, 성왕의 몸에서 은빛 휘광이 피어났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달랐다. 진정으로, 직접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아이른을 압박했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을 칠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었다.

“흡.”

허나 물러서지 않았다.

배에 힘을 주고, 전신의 오러를 끌어올리고 가까스로 견뎠다.

한 걸음, 두 걸음.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는 아이른의 입에서, 황당하리만치 허무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모릅니다.”

“……?”

“오랫동안 고민해 봤지만, 모르겠습니다.”

“…….”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부디 현명하신 성왕 폐하께서, 지금의 어지럽고 복잡하게 꼬인 일을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날 놀리는 거냐?”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의 일을 해결하기에 제 능력이 너무나도 모자란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할 따름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아이른이 후우, 심호흡을 한 뒤 재차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갔다.

이번 와이즈 상단의 일은 어찌 보면 4년 전, 아이른이 처음 여정을 떠났을 때부터 이어져 온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건이었다.

알하드 산채에서 겪었던 일.

두르칼리 부족에서 배웠던 역사.

그 밖에 여행을 다니며 보고, 듣고, 느꼈던…… 정답이 없는 일.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버려야만 하는 어렵고도 괴로운 사건들.

여기에 매몰되어 늪에 빠졌던 적도 있다.

혼자서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도저히 깨부술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부조리의 벽에 가로막혀 괴로워했던 때가 겨우 2년 전이었다.

그런 자신이, 대륙 전체를 들었다 놨다 할 만큼의 문제를 홀로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로이드 영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잠깐의 노력만으로, 개인의 노력만으로, 한 세대의 노력만으로 이룰 수 없는 꿈을…… 당장 거머쥘 수 없다고 괴로워하지 말라고. 집착하지도, 떼를 쓰지도 말라고.”

“…….”

“그 말대로입니다. 억지 부리지 않겠습니다. 경험도 일천하고 지식도 부족한 애송이인 제가, 지금처럼 커다란 사건의 해결책을 내는 것은 역부족입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말은, 누군가의 희생을 토대로 쌓은 평화는, 부유함은……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누구나 입에 담을 수 있는 이상론 정도입니다. 그렇기에 염치없지만…… 이에 관해서는 성왕 폐하의, 혹은 저보다 훨씬 현명하신 분들의 도움을 청하고 싶습니다. 부디 모자란 저를 노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대신,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성왕의 말을 끊었다.

몹시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누구도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 대신, 찬란한 금빛 기운을 뿜어 내는 아이른의 모습을 뇌리에 새길 듯이 지켜봤다. 응시했다.

우우우우웅

강렬하게 피어나는 오러 속에서, 영웅이 말했다.

“이번 용사의 제전, 우승하겠습니다.”

“……!”

“……!”

“그에 합당한 실력을 만방에 선보여, 대륙 모든 이들의 가슴에 희망이 피어날 수 있도록, 두려움이 사라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노력입니다.

말을 끝맺은 아이른 파레이라의 얼굴은, 결연한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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