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영웅의 다짐 (1)
신성왕국 아빌리우스의 권력 계파는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는 당연히 성기사 계파다.
왕국 최강자인 율리우스 휼을 중심으로 한 백, 적, 흑의 기사단원들은 중부를 넘어 대륙 전체에 위명을 떨치고 있다.
최고위 사제인 애쉬린 고데베르타를 필두로 한 사제 쪽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다.
신도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고민을 해결해 주고, 일상을 함께한다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그들이야말로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집단이라 볼 수도 있었다.
가엘 와이즈가 믿는 쪽은 바로 후자였다.
‘지금까지 낸 기부금이 얼만데!’
와이즈 상단이 신성왕국에 기부한 돈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액수.
그로 인해 혜택을 받은 이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대륙에 퍼진 신전 대부분이 한 번씩은 도움을 받았고, 몇몇 곳은 상단의 기부금 없이는 운영이 안 되는 곳도 있을 정도였다.
모든 이들이 가엘 와이즈를 칭송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즉, 사제들은 웬만하면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이다.
여기에 하프 엘프로서 가지는 특수한 입장까지 생각하면, 아무리 이번 사건이 크다 해도 어찌어찌 무마될 가능성이 컸다.
기사단 쪽이 악마 토벌에 온 정신을 팔고 있는 때이기에 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퀸시 마이어스가 등장한다고?’
퀸시 마이어스.
이미 십 년도 더 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전대 적기사단의 수장.
허나 그는 살아 있었고, 여전히 건재했다.
끊임없이 대륙을 위해 힘쓰고 있었음은 물론이고, 지금도 최전선에서 악마들을 토벌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
이미 야인이 되어 버린 그다. 그 누구보다 높았던 권세는 이미 과거의 일일 뿐이다.
허나 모든 것을 내려놓음으로 인해, 퀸시 마이어스는 대륙의 누구보다도 숭고한 존재로 거듭났다.
성기사 계파와 사제 계파, 그 어느 쪽도 무시할 수 없는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과장된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군.”
……그 대단한 존재와, 아이른 파레이라가 정겹게 인사를 나누었다.
부드럽기 그지없는 표정. 누가 봐도 친분이 있는 듯한 모습이다.
위험했다.
좋지 않았다.
가엘 와이즈는 지금의 상황을 분석하고, 계산하고, 해결책을 만들어 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그 전에 일이 어디로 흘러갈지조차 가늠이 안 갔다.
셈에 밝은 그조차 그럴진대, 다른 이들은 어떤 상황이겠는가?
하나같이 입을 쩍 벌린 채로, 혹은 멍한 표정을 지은 채로 퀸시 마이어스와 아이른 파레이라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오직 불카누스만이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술을 홀짝였다.
탁
그때, 퀸시 마이어스가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저벅저벅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의아한 건, 등 뒤에 메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는 점이다. 와이즈 상단과 에단 파티는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120세가 넘은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기세가 말도 안 되게 진했다.
슈슉
그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아이른만이 여유로웠다.
트레이드 마크가 된 황금의 대검을 손에 쥐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도 멈추지 않고, 단단한 걸음걸이로 나아간다.
그리고 율리우스 휼만큼이나 위대한 성기사, 퀸시 마이어스와 마주한다.
그가 웃었다.
노인도 웃었다.
미소를 교환한 둘의 검에서, 동시에 오러 소드가 치솟았다.
우우우웅-
우우우우웅-!
“아니!”
“아!”
“……!”
좌중이 깜짝 놀랐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만으로도 정신을 차리기 힘든데, 갑자기 전투태세를 갖추다니? 오러 소드를 뽑아 내다니?
심지어 평범한 오러 소드가 아니었다.
일반적인 마스터가 뽑아낼 수 있는 것보다, 와이즈 상단의 최고수인 브루디 샤퍼가 평소 보였던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드높은 광휘가 퀸시 마이어스의 검으로부터 자라났다.
그야말로 신화 속의 거인이 들고 다닐 법한 빛줄기!
그것이 젊은 영웅의 상반신을 향해 휘둘러졌다.
꽈아아아앙!
“큭!”
“끄윽-!”
엄청난 굉음과 함께, 충격파가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기가 약한 이들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고, 그렇지 않은 이들조차 인상을 찡그리며 힘든 기색을 보였다.
그런데도 눈만은 부릅뜬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은 금발의 청년, 아이른 파레이라가 반격을 이어 갔다.
꽈아아앙!
꽈앙!
꽈아앙-!
기교도, 기술도 없었다.
퀸시 마이어스와 아이른 파레이라의 검은 몹시 정직했다. 좌우 사선으로 번갈아 가며 떨어져 내리는 검이 중간에서 맞부딪혔다.
맨손 싸움으로 따지자면 격투가 아니라 손을 맞잡고 악력을 겨루듯, 단순하기 그지없는 양상이었다.
허나 이를 무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루함을 느끼는 이도 아무도 없었다.
정직하고 투박하기에, 온전히 느낄 수 있는 힘.
괴력!
그것이 두 검사로부터 전해졌다.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로 강렬하게!
쾅!
콰앙! 콰아앙!
쩌적, 쩌저저적-!
검과 검의 충돌로 인한 파열음, 그 사이에 또 다른 소리가 더해졌다.
둘이 발을 딛고 있는 지면에서 나는 소리였다. 충격을 견디다 못해 지진이 난 듯 균열이 생기는 것이었다.
힘의 차이가 있는 듯, 아이른 쪽의 지반이 더욱 거칠게 부서졌다.
그러나 퀸시 마이어스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하게, 사납게 검을 휘둘렀다.
그 증거가 점차 짧아지는 오러 소드였다.
점차 힘이 빠져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러의 밀도를 압축하여 더욱 위력을 높인다.
넘치도록 많은 성기사의 오러를 극도로 활용하는 기술로, 그야말로 아빌리우스식 검술의 정수를 보여 주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아압!”
콰아아앙!
허나, 이에 맞서는 아이른 파레이라는 꺾이지 않았다.
그를 지탱하는 지반이 박살 났다.
균열이 일다 못해 밑으로 움푹 꺼져, 이제는 동일 선상이 아니라 위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아래에서 받아 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도 이겨 냈다.
밑으로 내리꽂힐지언정, 뒤로 물러나진 않았다.
그 말은, 아이른 파레이라의 오러 소드 역시 평범한 소드마스터의 오러 소드를 넘어섰다는 뜻이었다.
이를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같은 소드마스터인 브루디 샤퍼였다.
‘어떻게!’
그가 속으로 소리쳤다.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퀸시 마이어스의 경우야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현존하는 최강의 검사들인 이안, 쿤, 율리우스 휼에 더해 그를 추가해 ‘4대 검사’라고 부르는 게 맞지 않느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그런 그라면 저런 말도 안 되는 오러 보유량도, 그런 막대한 오러를 검의 형태로 정제하는 것도, 그것을 전투 중에 유지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른 파레이라까지 그것이 가능하다고?
그의 나이가 이제 겨우 25살인데?
“……하.”
분노조차 일지 않았다.
그저 황당했다. 그리고 납득했다.
아이른의 경고를 들었을 때마다 어째서 자신이 위축되었는지, 그 비밀을 이제야 깨달았다.
‘수준이 달라.’
지금 이 순간.
브루디 샤퍼는 와이즈 상단의 일원이 아니라, 검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 두 검사에게 순수하게 경탄했다.
콰아아아아앙-!
잠시 후, 둘의 대결이 끝났다.
사실, 대결이라 하긴 뭐 했다. 그들이 한 짓이라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직하게 검을 맞댄 것밖에 없으니.
허나 이 단순한 싸움에 놀라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에단의 경우는 턱이 빠질 정도로 벌어진 입에서 침까지 줄줄 흘리고 있을 정도였다.
“……생각보다 훨씬 잘 익혔군. 신성왕국의 검술.”
“감사합니다.”
“컨트롤이야 그렇다 치고, 오러의 양은 어떻게 된 일이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주변의 도움이 있었죠.”
“그게 뭔…….”
“하하. 짧게 설명하기는…… 조금 어렵네요.”
아이른이 빙긋 웃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물의 검을 깨달은 이후, 많은 인연으로부터 신세를 졌다.
그들의 사랑을 얻고, 마음을 얻고, 신념과 뜻과 감정을 얻고. 이를 다시 돌려주고, 또 받아 오고…….
그러한 순환의 과정을 통해 쌓인 기운이.
그것을 온전히 담아 내기 위해 형성한 지반이.
그 위에 단단히 뿌리 내리고, 조금씩 성장해 나간 나무가…… 지금의 아이른을 만들었다.
이를 말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물론 못 할 건 없었다.
아주 친하다고 할 순 없지만, 친분보다 더 깊은 존경의 마음을 품은 존재다. 그런 이와의 대화가 꺼려질 리 없는 아이른이다.
그가 말했다.
“따로 시간을 내어주신다면, 그간의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흥미롭군.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네?”
“널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신다.”
아이른, 그리고 장내의 모든 이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퀸시 마이어스가 누구인가.
신성왕국의 최고기사인 율리우스 휼, 그리고 최고위 사제인 애쉬린 고데베르타조차 존칭을 쓰는 존재다.
욕심만 있다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런 그가 높임말을 쓰는 사람이라니?
설마…….
“성왕께서 네게 관심이 많다.”
“…….”
“온화하신 분이니 강요는 않겠지만, 웬만하면 초대에 응했으면 하는군.”
“어, 어…….”
아이른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성왕.
신의 가장 신실한 종으로서 자신의 이름조차 버린, 그렇기에 가장 거룩한 인물.
사실 잘 알지는 못한다. 그는 대외적으로 나서는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왕을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아이른 역시 갑자기 차오른 긴장으로 인해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무엇보다 가엘 와이즈의 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를 처리하기 전까지는 마음이 편치 않을 듯싶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알았음인가?
퀸시 마이어스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와이즈 상단의 일과 관련해서도,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들었다.”
‘젠장.’
가엘 와이즈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안 좋아졌다. 그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지만, 차마 이를 표출하진 못했다.
뜨거운 숨을 억지로 삼킨 채, 그가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알겠습니다.”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마주 고개를 끄덕인 퀸시 마이어스가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인파에 숨어 있던 귀여운 소녀, 아냐 마르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외쳤다.
“얍!”
지이이잉-!
허공에 열린 황금색 포탈.
휴우, 하면서 이마의 땀을 닦은 시늉을 한 아냐가 얌전히 말했다.
“들어가세요, 아이른 파레이라 공.”
“…….”
“왜 그렇게 봐요?”
“아니, 음…….”
하긴, 이제 14살이던가?
예전보다 성숙해질 나이긴 하지.
속으로 중얼거린 아이른이 포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성왕께서 날 보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이번 와이즈 상단의 일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 전에, 그가 행했던 악행들을 정말 모르고 있었을까?
대륙에 퍼진 악마들에 대한 생각은?
그보다 더 끔찍한, 악마보다 못한 인간들에 대한 생각은?
또…….
“그만 생각하고, 들어가지.”
상념이 끊어졌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불카누스가 그의 옆구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성왕께서 계신 곳이라면, 아빌리우스의 수도겠구만.”
“그렇죠.”
“나도 같이 가면 안 되나? 움직이기 귀찮은데.”
“…….”
“아이른 외의 손님을 꺼리신다면, 나는 대충 수도 아무 데나 떨궈 주면 되는데.”
몹시 당돌한 태도였지만, 아냐 마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아마도.”
“아마도?”
“네. 성왕께서 그렇게 빡빡한 분은 아니니까요. 아, 그쪽 언니오빠들도 올래요?”
“어? 우리?”
에단이 얼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아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차피 한 명 들어가나 여러 명 들어가나, 포탈 값은 똑같으니까.”
요술금화가 아까워서 그런 거였구나.
속으로 납득한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고, 마지막으로 퀸시 마이어스에게 인사했다.
“반가웠습니다.”
“또 보지.”
“그럼…….”
그 말을 끝으로 아이른 파레이라가 포탈로 들어갔다.
뒤이어 불카누스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고, 쟈린이 뒤따랐다. 망설이던 에단과 조반니, 키난 레예스 역시 주춤주춤 움직였다.
우우우웅-!
이윽고 닫힌 포탈.
여전히 평원에 서 있는 퀸시 마이어스와 에스테반 프리차드 백작가, 그리고 와이즈 상단.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하지.”
“…….”
거대한 노기사의 말에, 가엘 와이즈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 * *
그 시각.
아이른 파레이라를 비롯한 이들의 앞에, 두 명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