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99화 (299/388)

◈ 97. 인간도, 엘프도 아닌 (3)

“큭큭크, 그때 저 자식 얼마나 웃겼는지 알아? 완전…….”

“아니, 그 일은 꺼내면 안 되지! 그렇게 따지면 너는 재작년에…….”

“닥쳐! 그 얘기는 안 하기로 했잖아!”

“뭐야? 그런 일이 있었어? 좋아, 둘 다 계속해 보라고.”

“하하, 병신들. 잘들 논…….”

벌컥

“이봐, 큰일 났어!”

“엉? 무슨 일이야?”

“뭔데, 갑자기. 설마 마인이라도 쳐들어온 건 아니겠지?”

하하하, 용병 하나가 농담을 하자 주변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는 없지만, 실제로 마인이 나타났다 하더라도 아무 문제 없었다.

이곳에는 무려 소드마스터가 둘이나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들을 받쳐 줄 엑스퍼트 역시 다섯, 아니 와이즈 상단 외의 전력까지 생각하면 더 많으니, 걱정하는 게 바보였다.

이상한 점은, 말을 전하러 온 이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거였다.

“뭐야?”

“뭔데? 도대체 뭐가 문제야?”

여전히 심각한 표정의 사내를 보며 하나둘씩 표정이 굳어졌다.

이 좋은 분위기에 썰렁한 농담을 던졌다간 맞아 죽을 수도 있으니, 아무 일도 없는 건 아닐 터였다.

“설명은 힘들고…… 나와 봐. 분위기가 안 좋아.”

“분위기가 안 좋다고? 무슨…….”

“와이즈 상단하고, 아이른 파레이라.”

“…….”

“많이, 안 좋아.”

“…….”

“…….”

정적이 감돌았다. 흥겨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그들 모두는 와이즈 상단의 은혜를 입고, 아이른 파레이라에게 빚을 진 이들이었다.

둘의 다툼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었다. 술이 확 깬 여행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밖으로 나왔고, 말을 전한 이를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접했다.

무장해제된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는 네 명의 엑스퍼트.

분노와 자괴감이 가득한 얼굴로 아이른을 노려보는, 부러진 검의 주인 브루디 샤퍼.

얻어맞은 기색이 역력한 와이즈 상단의 총 책임자, 가엘 와이즈와…… 그 어느 때보다 화난 표정으로 모두를 쳐다보고 있는 아이른 파레이라.

좌중을 압도하는 분위기에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을 때, 그의 입에서 단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와이즈 상단의 비호 아래 아빌리우스의 수도로 향하길 원했던 분들. 그런 분들껜 죄송하지만, 여기서 이별입니다. 그들은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

“…….”

“굳이 동행하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결코, 예전과 같은 분위기는 아닐 겁니다. 유념하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사라지는 아이른 파레이라.

그런 그를, 가엘 와이즈의 뒷목을 잡은 채로 떠나가는 뒷모습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멍하니 지켜봤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얼마나 큰 다툼이 있었기에, 와이즈 상단의 장남이 저런 꼴이 된 것인가?

게다가 브루디 샤퍼는?

마스터가 된 지 20년도 더 된 존재가,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이게 뭔…… 아! 쟈린!”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상태였던 에단의 눈에 쟈린이 들어왔다.

조반니, 키난 레예스도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평온한 것은 오직 불카누스뿐이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여유로이 맥주 맛을 음미하는 데 집중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술 먹고 싸움이라도 났나?”

“머저리야, 아론이, 아니 아이른이, 아니, 아이른 님이? 아 씨, 뭐라고 불러야…… 하여튼! 그럴 사람은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가엘 와이즈도 그럴 성격은 아니고.”

“그럼 도대체 뭔…….”

“납치됐던 엘프들.”

“…….”

“…….”

“그리고…… 내가 예전에 말했던, 가엘 와이즈의 구린 짓.”

여기까지 이야기한 엘프 쟈린이, 속이 시원하단 얼굴로 나머지 말을 쏟아 냈다.

“전부 까발려졌어.”

* * *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와이즈 상단과 동행했던 이들은 전부 떨어져 나갔다.

그들의 원했던 것은 자신들의 안전이었을 뿐, 갈등의 한가운데에 끼어드는 것은 절대로 바라지 않았다.

타모에 숲 말고는 그리 위험한 곳도 없었으니,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하여, 함께하는 것은 아이른 파레이라와 불카누스를 비롯한 에단 파티원뿐이었다.

사실 에단 역시 이런 일에 끼어들고 싶진 않았지만, 쟈린과의 인연을 생각하면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5년간 함께하면서, 쟈린한테 목숨을 빚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쟈린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쟈린을 형제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에 그녀의 말을 온전히 믿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더해지자, 도저히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그래, 시바꺼! 와이즈 상단이 대수야?”

“그러니까. 아니, 애초에 잘못한 녀석들이 어깨 당당히 펴고 살면 안 되는 거잖아! 안 그래?”

“그렇지. 근데 네 목소리 왜 그러냐. 거의 모기 만한데?”

“그러는 지는.”

“큭큭큭…….”

쟈린이 쿡쿡 웃음을 흘렸다.

크게 말하지 못하는 것쯤은 충분히 이해했다. 아무리 죄가 밝혀졌다 한들, 그들은 대 와이즈 상단이었으니까.

따라올 자가 없는 거부이자, 전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거대 집단. 그 힘은 웬만한 강대국에 비견될 정도다.

‘아이른이 대단한 거지.’

쟈린이 앞을 바라봤다. 와이즈 상단의 사이에 있는 아이른의 뒷모습이 보였다.

에단과 조반니, 키난 레예스가 불편할 것을 생각해 거리를 두고 따라가는 탓이었다.

허나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그의 모습만은 크게 느껴졌다. 어떤 압박이라도 견뎌 낼 수 있을 것 같은 신뢰가, 믿음이, 든든함이 전해졌다.

‘그래도 마냥 의지만 하는 건 좋지 않겠지만…….’

쟈린의 시선이 다른 쪽을 향했다.

여전히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는 엑스퍼트들과 와이즈 상단의 직원들.

허나 그들 전부를 합한 것보다 무서운 것은 마스터 브루디 샤퍼였다.

아이른과 마찬가지로 뒷모습만 보이는, 허나 그것만으로도 섬뜩한 기분을 자아내는 그를 주시하며 그녀가 생각했다.

‘별 탈 없이 도착할 수 있겠지?’

쟈린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에단을 비롯한 파티원 모두가 품은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마땅한 도시가 없어 노숙에 들어간 일행들 사이에서, 조용히 몸을 움직이는 존재가 있었다.

브루디 샤퍼였다.

일주일 내내 마음속으로 칼을 갈며, 아이른의 빈틈만을 주시했던 그가 비로소 행동에 나서려는 와중이었다.

허나 그러한 시도는, 몇 초도 이어지지 못하고 깨져 버렸다.

“네가 무슨 짓을 하든.”

“……!”

우뚝

……브루디 샤퍼의 몸이 정지했다.

움직일 수 없었다. 날카로운 비도를 쥔 손도, 은밀하게 움직이던 발걸음도. 꿈틀거릴 수조차 없었다.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눈동자만을 겨우 움직인 그의 시선에, 어느새 정좌해 있는 아이른의 눈빛이 들어왔다.

“어느 틈을 노리든, 어떤 방법을 취하든. 나는 다 대처할 수 있다.”

“…….”

“궁금하면 시도해 봐도 좋아.”

그 말을 끝으로 아이른은 눈을 감았다. 정적이 찾아왔다. 야영지의 밤이 다시 깊어졌다.

허나 잠을 잘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직원들도.

엑스퍼트들도.

그리고 브루디 샤퍼도,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젠장!’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오러 소드를 최대한으로 끌어 올려 녀석의 목덜미에 박아 넣고 싶었다.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재수 없는 저 엘프의 팔다리라도 썰어 버리고 싶었다.

목숨만을 간신히 붙여 놓은 채 저 건방진 녀석을 조롱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쯤은.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얌전히 비도를 내려놓고 잠자리에 몸을 기대는 것뿐이었다.

“아이른 파레이라.”

그때, 정적을 깨고 말을 하는 이가 있었다.

가엘 와이즈였다.

모두가 두려움에 떠는 와중에도, 심지어 에단 파티원마저도 숨을 죽이고 있는 분위기에도 그는 태연했다.

지하실에서의 일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린 듯 평온한 모습에, 쟈린이 황당함을 느꼈다.

아이른이 다시 눈을 떴다.

어둠이 흩어질 정도로 강렬한 그의 시선을, 가엘 와이즈는 주눅 들지 않고 받아 냈다.

“와이즈 상단이 어떻게 대륙 최고의 상단으로 자리매김했는지, 알고 있습니까?”

“…….”

“친구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시기, 질투하는 적들보다 훨씬 유능하고, 힘 있는 친구들 말이죠. 당연한 말이지만, 아빌리우스에도 있습니다.”

“…….”

“말씀이 없으시군요.”

후후, 후후후.

가엘 와이즈의 웃음소리가 넓게 퍼져 나갔다.

모두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몇몇은 경악에 가까운 눈초리로 하프 엘프를 쳐다보았다.

분명 와이즈 상단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지만, 지금 당장은 아이른 파레이라가 자신의 목줄을 거머쥔 상황이 아니던가.

그런 상황에서조차 이런 담대함을 보일 수 있다고?

‘보일 수 있지.’

가엘 와이즈가 미소지었다.

그는 안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어떤 성향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아빌리우스까지의 동행을 수락한 이상, 그사이 어떤 말을 지껄여도 자신을 해하지 않을 것이다.

정직한 성격이니까.

누구보다 선한, 영웅의 마음씨를 지닌 청년이니까.

‘이런 타입은 회유는 불가능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도 없지. 결국 정해진 선 안에서만 움직이니까.’

만약에 그가 이그넷 크레센시아 같은 성향이었다면, 가엘 와이즈는 침묵했을 터였다.

만약에 그가 쿤과 같은 다혈질의 성격이었다면, 역시 가엘 와이즈는 침묵했을 터였다.

허나 그는 아이른 파레이라였다.

누구보다 선하고 정의로운, 그렇기에 절대로 선을 넘지 않는 존재.

더 진하게 미소 지은 하프 엘프가 한마디를 더했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인맥 역시 대단하다는 것쯤은. 크로노 검술관과 로이드 가문, 게다가 5대 검술명가 중 최고라 평가받는 린제이 가문까지…… 굉장하죠. 우리 와이즈 상단이라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상대입니다. 하지만.”

“…….”

“그 모두를 더한다 해도 신성왕국의 아성을 넘을 순 없습니다.”

그들이 주도하는 질서와 대륙법의 가치 역시, 훼손할 수 없고요.

가엘 와이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할 말을 마친 그는 다시 잠자리에 누웠고,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허나 잠에 든 이는 없었다.

누군가는 웃음을 머금었고.

누군가는 분함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머리가 어지러운 이들도 여럿 있었다.

“…….”

그 사이에서, 아이른 파레이라는 여전히 평온했다.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그는 정좌를 풀지 않았다.

* * *

장막의 악마를 토벌하고 보름 뒤.

마침내 아이른 일행은 아빌리우스에 도착했다.

물론 수도까지는 닷새 정도가 더 걸리지만, 신성왕국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묘했다.

당장이라도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는 현실이 되었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말을 탄 무리.

아빌리우스, 그중에서도 프리차드 가문의 깃발을 확인한 가엘 와이즈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프리차드 백작가, 약속대로 빠르게 움직였군.’

에스테반 프리차드는 와이즈 상단의 오랜 고객으로, 신성왕국 아빌리우스에서 무시할 수 없는 권세를 뽐내는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그런 그들이 움직인 이상, 문제의 절반은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씨익 미소 지은 하프 엘프가 아이른을 바라봤다. 반달처럼 휜 눈매가 조롱을 품고 있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가엘 와이즈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다.

‘……선두에 선 인물이, 프리차드 백작이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깃발은 프리차드 백작가다. 가신만 보낸 것도 아니다. 멋지게 콧수염을 기른 그의 얼굴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가까웠으니까.

그렇다면 저자는 누구인가.

백발을 휘날리며, 그 누구보다 당당하기 그지없는 체격으로. 바늘 하나조차 들어가지 않을 분위기로 무겁게 다가오는 저 노인은, 도대체…….

“……!”

가엘 와이즈의 몸이 경직됐다.

상대의 정체를 파악했다. 예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허나 악마가 횡행하면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전 세대의 강자.

전대 적기사단장, 퀸시 마이어스.

허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의 정체가 아니었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군.”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나누는 아이른 파레이라와 퀸시 마이어스.

친분이 두터워 보이는 둘을 바라보며, 가엘 와이즈를 비롯한 상단원들이 멍한 눈빛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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