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인간도, 엘프도 아닌 (2)
‘……어떻게 온 거지?’
지하실에 쟈린이 찾아왔을 때까지만 해도, 가엘 와이즈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카라니 부족장의 딸이라고는 하나, 이미 연이 끊긴 지 꽤 됐다.
수습할 방법은 충분했고, 꼭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더라도 제압한 뒤 천천히 결정하면 될 거라고 판단했다.
물론 어떻게 이 은밀한 곳까지 찾아왔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일단은 일을 무사히 마치는 게 급선무였다.
‘나중에 물어보면 되겠지.’
그런 생각은, 곧이어 들이닥친 존재로 인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아이른 파레이라!’
가엘 와이즈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이른 파레이라. 황금의 대검을 나뭇가지처럼 가벼이 휘두르는 헤일의 젊은 영웅.
상인으로서 절대 척지고 싶지 않은, 오히려 미래를 위해 친분을 다져야만 할 존재다.
그의 정체가 밝혀진 이후, 어떻게 하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꽤 고민하기도 했다.
허나 지금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기세.
딱딱하게 굳어 있는 표정.
평소의 온화한 모습과는 정반대인 그를 본 순간, 깨달았다.
‘알고 있구나!’
어디까지 아는지는 모르겠다.
허나 대충 낌새는 눈치챈 느낌이었다. 이건 좋지 않았다.
물론 와이즈 상단의 영향력, 그리고 자신이 대륙에서 갖는 위치를 생각하면 큰일이야 생기진 않겠지만…….
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뚜벅뚜벅, 멈추지 않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이른을 보며, 가엘 와이즈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 잠깐…….”
뻐어억-!
“크허……!”
‘공격한다고? 날?’
그것이 가엘 와이즈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우당탕, 그가 쓰러졌다. 받아 주는 이 하나 없이 거칠게 바닥에 나뒹구는 모습.
허나 윗사람을 보필하기 위해 다가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쟈린의 뒤편에 서 있던 두 명의 사내가 생각했다.
‘어떻게 하지?’
‘도망가야 하나? 아니, 그건 안 되는데…….’
쟈린을 상대할 때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했던 둘이었다. 당연했다.
자신들은 엑스퍼트다. 은패 마법사 용병 따위는 순식간에 제압할 실력을 갖췄다는 뜻이다.
허나 강함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
대륙에 200명 밖에 없는 소드마스터의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
“…….”
침묵.
지하실에 내리깔린 어둠보다도 무거운 고요, 그리고 정적. 엑스퍼트들은 감히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었고,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조용히 숨을 이어가는 것 정도밖에 없었다.
쟈린조차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활화산 같은 분노와 증오가 몸 밖으로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지만.
그보다 거대한 무언가가, 금발의 청년에게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아이른 파레이라가 가엘 와이즈를 바라봤다.
쟈린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솔직히 말해서 믿지 않았다.
소문이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나태 공자로 10년을 칩거했던 때조차 그의 이야기가 들려왔었다.
가난한 이를 위해 힘쓰고, 배움의 기회가 없는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교육을 제공하는. 그 밖에도 수많은 도움을 통해 대륙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
하지만, 이곳에 도착한 순간 알 수 있었다.
악의.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짙고 추악한 악의가 성 밖까지 진동했기에,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딱히 집요하게 추적하고 조사한 게 아니었다. 아이른은 그저 하프 엘프가 흩뿌린 어둠을 따라 걸어왔을 뿐이다.
‘……아니, 이자를 하프 엘프라고 할 수 있을까.’
그가 눈을 감고 과거를 떠올렸다.
예전에도 비슷한 이를 본 적이 있다.
이프레인 슬릭.
가진 바 능력과 대륙에서의 위치는 굉장했지만,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성격의 추악했던 노마법사.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진한 복수심을 품고 헤일 왕국을 떠났던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욱 끔찍한 악의를 가슴속에 쌓아 놓고 있었다.
그때 이프레인 슬릭이 연성하고 있던 마법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완성되었다면, 틀림없이 내 가족은 엄청난 화를 입었겠지.’
회상을 끝낸 아이른 파레이라가 눈을 떴다.
그러자 어두운 지하실의 풍경이 다시 들어왔다.
그 안을 자욱하게 채운 꽃의 향기도.
그사이에 눅진하게 스며들어 있는 어두운 악의도. 이를 알면서도 거리낌없이 동조한 두 명의 엑스퍼트들도.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계획한 하프 엘프.
아니.
인간도, 엘프도 될 수 없는…… 악마와도 같은 존재도.
‘어떻게 해야 할까.’
후우,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악마나 마인, 마물을 상대할 때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냥 죽이면 된다. 그들을 처리한다고 해서 문제가 생길 일은 단언컨대 없다.
유일한 두려움은, 자신이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강대한 악마가 등장했을 때뿐이다.
허나 이럴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악마보다 끔찍한 마음을 품은 이프레인 슬릭.
인간과 엘프 사이의 평화를 가져온다고 믿었던 존재인, 그러나 그 누구보다 추악한 방법으로 이득을 얻어 왔던 하프 엘프 가엘 와이즈.
이들은 사회의 구성원이고, 마음대로 처벌할 수 없다.
자신에게 자격이 있고, 없고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여기서 가엘 와이즈를 벌했을 경우 생기는 외교적인 문제, 종족 간의 갈등, 사회적인 혼란.’
그것을 생각하면, 쉽사리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마치 알하드 산채에서와 비슷했다.
어떠한 길을 가도 후회가 남는, 명확한 정답 따위 없는 괴로운 질문이 아이른의 머리를 무겁게 만들었다.
“…….”
“…….”
“…….”
고민.
고뇌.
그리고 고찰.
악마를 마주했을 때보다도 더욱 갑갑한 마음을 품고서, 아이른은 끝이 없는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검 한 자루만을 들고서.
하지만, 평소라면 찬란하게 빛났을 황금의 검 역시…… 횃불 이상의 역할을 하진 못했다.
그때였다.
“괜찮으십니까, 와이즈 님!”
세 명의 사내가 지하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범상치 않은 기세였다. 앞서 있던 두 명보다 기세가 짙은 것을 보니, 엑스퍼트 중에서도 수준급의 실력인 것으로 보였다.
허나 그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셋 중 가장 앞에 위치한 노인.
소드마스터, 브루디 샤퍼.
그의 얼굴을 확인한 두 엑스퍼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반면 쟈린의 표정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이런, 빨리 처리하고 나갔어야 했는데!’
아이른 파레이라의 실력을 얕잡아 보는 것은 아니다. 소드마스터를 무시할 수 있는 이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허나 상대도 마스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더군다나 경지에 오른 지 20년도 더 된 존재라면.
그녀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아이른 파레이라, 그리고 브루디 샤퍼.
양쪽을 수차례 곁눈질하는 쟈린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둡게 물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스터가 된 지 5년도 안 된 아이른이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물론 그의 활약을 못 본 것은 아니다.
늦게나마 목격했다. 마인들을 모조리 무찌른 것도 모자라, 신비로운 황금의 기운으로 대지를 정화하고 있던 모습.
그 광경은 평생토록 쟈린의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을 충격이었다.
하지만, 엑스퍼트 수준에서 상대할 수 있는 마인과 소드마스터는 전혀 다르다.
더군다나 브루디 샤퍼의 뒤에는 4명의 조력자까지 있었다.
그도 이 사실을 알았음인가.
걱정으로 인해 표정이 좋지 않았음에도, 눈빛 한구석에는 자신감이 가득한 상태였다.
“아이른 파레이라 공, 그만하시오.”
“…….”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진정하시오. 그리고 걱정하지 마시오. 여기서 멈춘다면 우리도 대화로 풀 용의가 있소. 그러니…….”
브루디 샤퍼의 말은 사실이었다.
생포까진 무리더라도, 상대를 꺾을 자신은 충분히 있었다. 경험의 차이를 생각하면 당연했다.
그가 신경 쓰는 부분은 아이른 파레이라가 대륙에서 차지하는 위상이었다.
‘린제이 가문, 로이드 가문, 크로노 검술관을 적으로 돌리는 건, 우리 입장에서도 굉장한 타격…….’
웬만하면 온건한 방식으로 풀어야만 한다.
그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허나 브루디 샤퍼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아이른 파레이라의 진정한 실력이었다.
뒤늦게 도착한 탓에 보지 못했던 광경.
마인이 아니라 악마를 꺾은 것도 모자라, 악마의 질척한 사후 의지까지 단번에 파훼해 버렸던 그의 경지를…… 그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꽈악-!
아이른이 돌연 왼팔을 들어 올렸다. 모두가 깜짝 놀랐으나, 신경 쓰지 않고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방 안에 잔뜩 퍼져 있던 꽃의 기운이 소용돌이처럼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콰아아아아아아-!
“……!”
브루디 샤퍼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은 검술인가? 아니면 요술인가?
하나 분명한 것은, 이대로 상대를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안 된다는 점이었다.
빠드득, 어금니를 깨문 그가 자신의 애검을 검집에서 꺼냈다.
그때,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른이 그에게 시선을 보냈다.
화아아악-!
“끕!”
브루디 샤퍼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두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믿을 수가 없었다.
기세만으로, 눈빛만으로 자신이 물러서다니?
허나 꿈이 아니었다.
거짓도 아니었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눈빛은, 여전히 인두와 같은 열기를 품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가오지 못하도록 뒤로 밀어내고 있었다.
화아아아아악-!
그러는 동안에도 신비로운 현상은 계속되었다.
달큰한 약초 향이 모조리 빨려 들어가고.
그사이에 녹아들어 있던 어둠이 빨려 들어가고.
악마의 파괴 욕구에 비견될, 추악한 악의도 빨려 들어갔다.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그렇게 아이른의 주먹에 모인 구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인상을 찡그리게 만드는 불쾌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우우우웅-
금발의 영웅은 이를 자신의 목걸이에 가져갔다.
오래 전, 두르칼리의 보물 창고에서 얻었던 오행 목걸이.
그 끝없는 잠재력에 대해 100퍼센트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부분적으로는 활용이 가능했다.
요술사 루루와 정령사 고르하가 머리를 맞대고 연구한 결과였다.
이윽고, 다섯 정령의 힘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불, 물, 땅, 금속, 나무.
세계를 이루는 기초들이 만든 새로운 공간, 새로운 차원.
그 안에 악의를 봉인한 아이른이 와이즈 상단 쪽을 쳐다봤다.
브루디 샤퍼가 자신을 향해 짓쳐들고 있었다.
파팟-
당황하지 않았다.
봉인 작업을 멈추지 않은 채, 아이른이 오른손을 뻗었다.
그러자 황금의 대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실 전체를 가득 채울 정도로 밝은 빛도 뿜어져 나왔다.
압권은 오러 소드였다.
순식간에 덩치를 불린, 놀라울 정도로 높은 밀도의 기운!
아이른이 이를 휘둘렀고, 바닥이 그어졌다.
브루디 샤퍼가 발을 내디디려는 곳의 바로 앞부분이었다.
서걱
“…….”
노검사가 걸음을 멈췄다.
앞으로 쏠린 중심을 회복하고, 가만히 서서 베어진 바닥을 주시했다. 한참이나 주시했다.
……그리고, 더는 덤벼들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쟈린이 무언가 말을 하려 할 때였다.
“설마, 여기서 모두를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어느새 정신을 차린 가엘 와이즈.
아이른이 시선을 돌렸고, 그는 피하지 않았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
거칠기 그지없는 숨소리.
허나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듯한, 강렬한 눈빛.
젊은 영웅을 노려보던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받아야 할 벌이 있다면, 신성왕국에서 달게 받지. 엘프의 처벌은 엘프족, 혹은 아빌리우스가 아니면 금지되어 있으니 말이야.”
“…….”
“설마 이조차 어기고 제멋대로 할 생각은 아니겠…….”
“그러지.”
휙
챙강-!
까가가강-!
아이른이 검을 휘둘렀다.
그에 따라 검사들의 검이 반으로 쪼개졌다. 브루디 샤퍼의 것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엘 와이즈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런 그에게, 아이른 파레이라가 한마디를 추가했다.
“가는 길은, 나와 동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