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인간도, 엘프도 아닌 (1)
악마가 토벌되었다. 악마 휘하의 마인과 마물들 역시.
어둠에 물든 대지가 여전히 역겨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긴 했으나, 이 역시 아이른 파레이라의 신비로운 힘으로 대부분 정화되었다.
와이즈 상단 역시 급한 대로 성수를 아낌없이 사용했고, 나머지는 추후에 파견될 사제가 해결할 터였다.
납치되었던 이들 역시 구출되었다.
소식을 들은 악마 소굴 주변 영주는 아이른 파레이라와 와이즈 상단에 무한한 감사를 표했고,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극진히 대접했다.
그들을 따라 움직였던 모험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표정이 당당한 이는 거의 없었다.
“흠, 크흠.”
“…….”
그들이 신성왕국으로 향하던 이유는, 그저 재미난 구경거리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결코 숭고한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와이즈 상단을 따라갔던 향했던 이유도, 마인을 벌하기 위함이 아니다.
따로 떨어져 행동하기가 무섭기 때문이었다. 또 아이른 파레이라의 눈치를 보기 위함이기도 했다.
몰랐다고는 하나, 그들 대부분이 그를 무시했다. 조롱했고, 비웃었다. 가장 우호적이었던 이들조차 분위기에 순응하고 침묵했을 따름이었다.
그들이 목소리를 높인 건 그래서였다.
잠시 후.
영주로부터 술과 고기를 대접받은 모험가들로부터 젊은 영웅에 대한 칭송이 흘러나왔다.
“대단했지. 아주 대단했어.”
“그러니까 말이야. 인질들을 지키면서도 마인들을 모조리 쓰러뜨리다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 요술대검도 대단했지. 어둠을 물리치는 황금의 빛…… 보고 있는 나조차도 용기가 샘솟을 정도더군.”
“맞아. 마치 고위 사제께 축복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네.”
“20대에 소드마스터가 될 정도의 검술 재능에, 마기(魔氣)를 걷어 낼 정도로 신비로운 힘을 다루는 요술 재능이라니…….”
“대륙의 축복이지. 암, 그렇고말고!”
처음 말을 꺼낸 이의 표정은,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허나 그것은 잠시였다. 마음이 불안한 이들은 과거의 과오를 지우려는 것처럼 앞다투어 아이른의 이름을 읊었고, 그의 업적을 칭송했다.
이해 못 할 행동은 아니었다.
허나 절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술 한 잔을 넘긴 에단이 투덜거렸다.
“쯧, 저렇게 순식간에 바뀌는 모습이라니.”
“그러니까. 와이즈 상단 눈치 보면서 은근히 꼽줄 때는 언제고?”
“웃기는 놈들이야 진짜. 마인들 상대하기 싫어서 움직이는 것도 느릿느릿하더니, 주는 술은 잘 받아먹네, 또.”
조반니와 키난 레예스도 에단의 말에 동조했다.
물론 그들 역시 당당한 처지는 아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들 역시 아이른 파레이라를 몰라봤다.
그가 하는 이야기를 모조리 농담으로 취급했고, 어느 정도 막대했던 면도 있다.
그래서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체가 밝혀지기 전에도 아이른은 반듯한 모습을 보여 줬다.
정체가 밝혀진 후에도 아이른은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검술 실력만 훌륭한 게 아니었어.’
‘소문보다 훨씬 좋은 사람…….’
‘용사의 제전 때 꼭 활약했으면 좋겠군.’
셋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런 그들의 귓가에, 또다시 다른 모험가들의 이야기가 들렸다.
“그건 그렇고, 와이즈 상단도 대단해.”
“그렇지. 냉정히 말하면 자기 일도 아닌데, 그렇게 큰 액수를…….”
“지역 정화에 쓴 성수만 해도 어마어마한 값어치일걸?”
화제의 중심이 된 인물은 어디까지나 아이른 파레이라였다.
허나 가엘 와이즈의 이야기 역시 심심치 않게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지역 정화를 위해 소모한 돈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상단은 납치되었던 이들, 특히 엘프들의 치유와 몸 관리에도 발 벗고 나섰다.
마기에 영향을 받은 이들을 안전히 신성왕국으로 이송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 사이에 있을 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지를 생각하면 이는 정말로 대단한 일이었다.
저런 모습이야말로, 가엘 와이즈가 어째서 양 종족 간의 허브 역할을 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었다.
“흠.”
허나 얘기를 듣는 불카누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못마땅한 기색으로 연거푸 술을 마시는 깐깐한 대장장이.
그런 그를 보며 에단이 뭐라 말을 걸까 하다가, 이내 관뒀다.
아까도 말했지만, 자신 역시 그들에게 실수한 면이 있다 보니 예전처럼 살갑게 대하기가 힘들었다.
“쟈린은 어디 간 거야?”
“그러게.”
“몰라. 화장실이라도 간 거 아니야?”
“그런가?”
대신 만만한 쟈린을 찾았지만, 그녀는 어디 갔는지 통 보이질 않았다. 물론 크게 신경 쓸 건 아니었다.
쩝 하고 입맛을 다신 그가 재차 술에 빠져들었다.
* * *
인간, 오크, 엘프, 드워프.
대륙에서 살아가는 네 지성종족은 원래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악마라는 강력한 적을 상대하며 점차 가까워졌다.
가장 먼저 친해진 건 인간과 드워프였다. 드워프는 인간이 원하는 물건들을 만들어 줬고, 인간은 드워프의 결과물들이 가지는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아봐 줬다.
더는 드워프를 보기 위해 부족을 찾을 필요 없다. 그들은 인간 세상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과 오크의 관계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호전적이고 성격 급한, 허나 상대를 인정할 줄도 아는 오크는 인간 전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꾸준히 친분을 쌓아 왔다.
드워프만큼은 아니지만, 대륙 북부를 여행하다 보면 그들 역시 충분히 자주 볼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엘프는 아니지.’
엘프는 다른 두 종족에 비해 성격이 온화하다. 오크처럼 투쟁심이 넘치지도, 드워프처럼 고집이 세지도 않다. 하지만 불과 100년 전까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바로 그들의 미모 때문이었다.
인간의 미적 기준으로 우월한 엘프의 외모와, 이를 노린 불법 노예 상인들.
종족 간 갈등에 민감한 신성왕국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엘프와 인간의 사이는 여전히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을 터였다.
그리고…….
‘그런 두 종족의 사이를 급속도로 가깝게 한 게, 바로 가엘 와이즈지.’
가엘 와이즈.
인간과 엘프의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 하프 엘프.
그는 몹시도 특별한 자신의 태생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였다. 두 종족의 가교 역할을 하며 신성왕국의 비호를 받았던 것이다.
대륙의 혼란이 줄어들고, 평화가 이어지면 차원이 안정된다. 벌어지던 마계의 문 역시 닫히고, 그것이야말로 모두가 바라는 미래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종족 간 평화에 앞장선 가엘 와이즈는 일국의 왕보다도 대단한 영향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였다.
인간 세상이 궁금한 엘프들은 와이즈 상단의 문을 두드렸고, 가엘 와이즈는 그들 모두를 너그러이 품었다.
엘프들이 인간 세상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이 인간의 언어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들이 인간의 문화를 알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들이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더 나아가, 가정을 꾸리길 원하는 이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
거기서부터가 문제였다.
어둠에 휩싸인 성의 지하로 내려가며, 쟈린이 옛 지인의 말을 떠올렸다.
‘이상해. 너무 부자연스러워.’
‘뭐가요?’
‘인간 귀족들과 연을 맺는 엘프들이 너무 많아. 특히 여성들만, 그것도 와이즈 상단을 통해서만 말이야.’
처음에는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엘프가 인간 세상으로 나가는 창구가 얼마나 되겠는가. 대부분이 와이즈 상단을 통한다.
그들을 통해 연을 맺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엘프가 경직된 귀족 사회로 편입되는 건 조금 이해가 안 가긴 했으나, 없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성 쪽으로 편중되었다는 부분 역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허나 시간이 이어지고, 지인의 조사가 깊어지고, 그녀로부터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듣게 되고. 결정적으로…… 세상에서 지워진 것처럼 그녀의 종적이 묘연해졌을 때.
‘그만해라.’
‘아버지?’
‘위험하니까…… 그만해라. 그만둬.’
그런 지인의 유지를 이어 조사를 이어 가는 자신에게, 부족의 지도자인 아버지가 은근한 압박을 가했을 때.
쟈린의 의심은 더는 의심이 아닌, 확신으로 변하였다.
벌써 7년도 전, 그녀가 부족을 뛰쳐나왔을 때의 일이었다.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그랬다. 무작정 부족을 뛰쳐나와 대륙으로 나오긴 했지만, 쟈린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녀가 가진 힘은 와이즈 상단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만도 못했으니까.
딱히 증거도 없었다.
‘가엘 와이즈가 엘프 여성들을 정치적, 사업적 수단으로 사용한다’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조차 알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이상해.’
후우, 쟈린이 조심스레 숨을 내쉬었다.
이상했다. 정말로 이상했다.
이유는 몰랐다. 근거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쟈린은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발을 움직였다.
요술사의 감이라는 것이 이러할까. 머리가 복잡했다. 그러나 움직임을 멈추지는 않았다.
몇 분이 지났다.
확신이 더 진해졌다.
자신을 충동하는 감각도.
코끝을 스치는 인공적인 냄새도.
그 외의 설명할 수 없는 모든 정보가 이곳을 가리켰다. 굳게 닫힌 지하실의 문 너머를 가리켰다.
망설임은 없었다.
지팡이를 꺼내든 쟈린이 마력을 집중했다.
퍼엉-!
퍼석-
“크윽!”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당연했다. 아끼는 마법 지팡이가 박살 날 정도로 강하게 마력을 집중시켰으니까. 진탕된 속 때문에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런데도 소음은 크지 않은 것이, 그 기묘함이 쟈린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불안은 곧 현실이 되었다.
“…….”
안락한 침상에 누워 있는 다섯의 엘프.
그들 중앙에 놓여있는 정체불명의 꽃과 거기에서 풍겨 나오는 진한 향기.
그 아찔함에 어지러움을 느낀 쟈린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설 때, 마스크를 쓴 인물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엘 와이즈였다.
“안녕하세요, 쟈린.”
“…….”
“할 말이 있으신 것 같군요.”
“…….”
“마침 시간이 괜찮습니다. 안에서 이야기할까요?”
“……닥쳐.”
쟈린이 힘겹게 말했다.
입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뒤섞은 약초에 달큰한 무언가를 곁들인 듯한, 푸른 꽃에서 나는 향기가 자꾸만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정신을 잃어선 안 돼.
속으로 다짐한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당장 멈춰.”
“뭘 말이죠?”
“이 짓거리. 저 빌어먹을 꽃도 치우고, 여기 있는 엘프들도 풀어줘.”
“풀어주다니, 확실히 오해가 있군요. 전 이들을 강제한 적 없습니다. 해코지한 것도 없고요. 오히려 빠른 회복과 안정을 위해 힘쓰고 있을 뿐입니다. 엘프에 대해 잘 모르는 인간에게 동족을 맡길 수는 없습니까요.”
“넌 엘프가 아니야.”
“반은 엘프죠.”
저벅저벅
가엘 와이즈가 다가왔다. 그에 따라 쟈린도 뒤로 물러났다.
허나 도망칠 수는 없었다. 어느새 뒤에서 나타난 인간 남성 둘을 본 그녀가 생각했다.
‘젠장. 엑스퍼트들이잖아.’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마스크를 쓴 상단원들과 달리 쟈린은 계속해서 향에 노출된 상태였고, 이제는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비틀, 균형을 잃은 그녀를 누군가가 부축했다. 엑스퍼트들 중 하나겠지. 그녀는 의지가 꺾이는 것을 느꼈다.
허나 잠시 후.
화아아악-!
“……!”
뜨거운 기운을 느낀 쟈린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자신을 내려다봤다. 그러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멀쩡했다. 먹먹하게 움직이지 않던 몸 구석구석이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잔뜩 쌓인 먼지를 불로 정화한 듯한 기분이었다.
“…….”
여전히 말은 나오지 않았다.
허나 눈은 움직일 수 있었다. 쟈린의 시선이 자신을 부축했던,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청년을 향해 꽂혔다.
아론.
아니.
아이른 파레이라가, 가엘 와이즈를 향해 뚜벅뚜벅 다가가고 있었다.
“자, 잠깐…….”
하프 엘프가 말을 더듬었다.
쟈신을 마주했을 때와는 달랐다. 마스크로 얼굴 대부분이 가려졌으나, 눈만은 감출 수 없었다.
숨길 수 없는 당혹스러움.
불안, 그리고 설마 하는 감정.
그 끝에 기다린 것은.
뻐어억-!
“크허……!”
평생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격통.
주먹 한 방에 정신을 잃은 가엘 와이즈가, 공격한 이의 품을 향해 스르르 쓰러졌다.
휙
우당탕-!
아이른은 받아 주지 않았다.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괴물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