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96화 (296/388)

◈ 96. 불편한 동행 (4)

“…….”

“…….”

“…….”

할 말을 잃었다.

모두가 그랬다. 황금빛 꼬리를 늘어뜨리며 멀어져 가는 청년을 바라보며, 여행자들은 넋이 나간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른 파레이라.

대륙이 주목하는 크로노 검술관의 신성이자, 헤일 왕국의 신성.

허나 너무 많은 사칭범 때문에 누구도 ‘진짜 아이른’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지 못했다. 특징으로 구별할 뿐이었다.

항상 함께 다니는 말하는 고양이, 루루의 존재.

찬란한 황금빛을 뿜어 내는 요술대검.

아론은 둘 다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자동으로 조롱과 비웃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아이른이 사라진 방향을, 혹은 그가 발을 굴러 생긴 균열을 바라보던 여행자들의 안색이 하나둘씩 질려 갔다.

‘내가…… 무슨 짓을…….’

‘아니, 진짜 본인이었으면 왜 티를 안 냈던 거야?’

‘나는, 그래도 나는 별말 안 했던 것 같은데!’

‘괜찮겠지? 별일 없겠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허나 와이즈 상단의 위세에 짓눌려 있던, 과하게 그들의 눈치를 보던 이들은 속이 타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가엘 와이즈만큼은 아니더라도, 젊은 소드마스터의 영향력은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와 연이 깊은 크로노 검술관, 린제이 가문, 로이드 가문을 생각하면……!

“우리도 움직여야 합니다.”

그때, 모두의 상념을 끊어 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엘 와이즈였다. 마법으로 소리를 증폭시킨 그가 이어서 말했다.

“소드마스터인 아이른 파레이라 공이 발 벗고 나선 건 분명 호재이나, 마인 측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되지 않은 이상 안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뒤에 악마가 도사리고 있을 수도 있는 노릇이니 말입니다.”

“…….”

“그, 그러면…….”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와 상단은 젊은 영웅의 의지를 따를 생각입니다. 뜻을 함께할 생각이라면 채비를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끝으로 가엘 와이즈는 재차 패잔병들을 불렀고, 유의점들을 파악하는 한편 전력을 정비했다.

여행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로 있다가 하나둘씩 상단에 붙었다. 마인을 상대하기 위해서.

용기를 내거나 숭고한 뜻을 내비친 것은 아니다.

그저 거대한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기 두려웠던 이도 있었고, 아이른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았던 이도 있었다.

일단 뒤따르며 지켜보다가,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면 그때 도망가도 늦지 않다고 판단하는 이도 많았다.

“당장 가엘 와이즈부터 그럴 생각이겠지.”

“네?”

“아이른이 단독으로 인질을 구출하겠다고 달려갔는데, 마스터까지 있는 상단 전체가 도망가면 모양 빠지잖아. 따라가는 시늉은 보여야지. 그 대신 좀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면서 간을 좀 보다가…… 혹시 악마라도 있는 것 같으면 도망치겠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면서.”

“…….”

“불칸…… 아니, 불카누스?”

“불카누스 맞다.”

“불카누스 님도 별로 안 좋아해요, 가엘?”

“뭐 아시는 거라도…….”

에단과 조반니가 조심스레 물었다.

불카누스가 손을 대충 휘저으며 말했다.

“저 엘프한테 대충 들었을 거 아니야. 너희들이 아는 거랑 대충 비슷하겠지.”

“그럼, 그게 진짜 있는…….”

“아, 몰라.”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기색인지, 불카누스는 입을 다물었다.

에단이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정체를 밝힌 아이른을 전처럼 대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드워프 역시 편하게 대하기가 힘들었다.

명색이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이자 넘버링 소드의 제작자가 아닌가.

생각해 보면 걸리는 게 많았다.

혹시나 말실수를 한 건 없을까?

너무 선 넘는 장난을 쳤다거나, 기분 나쁠 만한 말을 했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으로 다가온 쟈린이 질문을 던졌다.

“불카누스 님 말대로 움직이는 게 많이 느린데, 괜찮을까요?”

“뭐가?”

“아이른 말이에요. 본거지로 바로 쳐들어간 것 같은데, 혼자서 괜찮을까요?”

에단, 조반니, 키난 레예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렇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그게 가장 중요했다.

아무리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마인이 다수 있다면, 혹은 그 뒤에 악마가 도사리고 있다면 문제가 커질 수 있다.

이렇게 미적대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물론 그들끼리 따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엑스퍼트가 포함된 파티라고는 하나, 지금 상황에서 단독으로 뭔가를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괜찮아.”

허나 불카누스는 태연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 그가 불을 붙인 뒤, 깊게 빨았다.

후우, 연기를 내뱉은 그가 이어 말했다.

“이따가 고생했다고 말이나 한마디씩 해 줘.”

* * *

현재 인간계에서 깨어난 악마들, 그중에서도 과거를 어렴풋이 기억하는 이들은 대부분 당황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인간들의 힘이 생각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이다.

뭔가 해보지도 못하고 토벌된 녀석들이 두 자릿수를 넘어갔고, 그것도 모자라 집요한 추적이 이어졌다.

악마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더 은밀히, 더 교활하게 보금자리를 숨겨야만 했다.

허나 그렇지 않은 존재도 있었다.

최근 모습을 드러낸 장막의 악마가 그러했다.

그는 성기사들을 피해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느니, 화려하게 인간계를 만끽하다가 장렬하게 산화할 생각이었다.

‘최대한, 정말 최대한 즐겨 보자고!’

그렇다고 대놓고 이곳저곳을 쏘다니지는 않았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멀어지는 것은 선호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인간들과의 계약에 집중했고, 휘하로 거둔 마인들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하는 쪽을 선택했다.

장막의 군대로 하여금 주변을 혼란에 빠뜨리고, 힘을 얻는다.

쓸모 있는 인간들을 납치하여 타락시킨 뒤, 더욱 쓸모있는 수하로 탈바꿈한다.

장막의 악마로서 다행인 점은, 최근 성기사 전력이 아빌리우스의 수도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부분이었다.

원래라면 순식간에 토벌되었어야 마땅한 그가 조금 더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던 것은, 더 나아가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어 ‘마왕’의 자리에 오르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빠른 확장세에서 온 자신감!

그런 장막의 악마에게, 단신으로 달려드는 인간 남자 하나는 그야말로 모기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흠, 흠흠.”

처음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마물 녀석들이 빠르게 쓰러지고 있긴 했지만, 어차피 소모품일 뿐이다.

곧 침입자를 감지한 마인들이 움직일 터였고, 그러면 상황 종료다.

장막의 악마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종류별로 늘어놓은 고문 도구들을 세심하게 닦고, 또 닦았다.

위잉- 위잉-

“으음? 뭐야?”

“그것이, 침입자가 꽤 실력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

“고, 곧바로 처리하겠습니다.”

황급히 예를 표하고 나가는 마인 대장을 보며, 장막의 악마가 화를 누그러뜨렸다.

마음 같아서는 머리통을 터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계약한 녀석 중 가장 쓸 만한 놈이기도 했고, 잠시 후에 있을 일에 집중하느라 봐준 것도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번에 잡아들인 네 엑스퍼트를 어떻게 타락시키고, 어떻게 거둬들일까 하는 생각만 가득 들어차 있었다.

대처가 늦은 것은 그래서였다.

얼마 후, 이변을 느낀 장막의 악마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와자작!

섬세하게 정비되던 고문 도구가 와작 일그러졌다.

허나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악마가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보금자리 내의 풍경이, 자신에게 종속된 계약자들의 상태가 명료하게 전달되었다.

없었다.

절반이 없었다!

잠깐 사이에 쓸려버린 마인들을 보며 장막의 악마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콰콰콰쾅-!

“으윽!”

악마가 인상을 찡그리며 연결을 끊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부하의 시점으로 관찰한 인간 사내를 떠올렸다. 그의 일격을 떠올렸다.

그 무엇으로도 망가뜨릴 수 없을 것 같은 황금의 대검.

그런 대검의 겉을 단단하게, 예리하게 감싸고 있는 오러 소드(Aura Sword).

소드마스터의 존재를 확인한 그의 눈에서, 칠흑처럼 어두운 분노가 흘러나왔다.

“감히 이놈이, 나의 왕국을……!”

우우우우웅-!

장막의 악마가 양팔을 좌우로 뻗었다.

그러자 보금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던 어둠이 장막처럼 그의 몸에 휘감겨 왔다.

순식간에 덩치가 세 배는 커진 악마가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영역 확장에 탄력을 받고 있는 와중이었는데!

이대로라면 성기사 놈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충분히 힘을 키울 수 있었는데!

그런데, 웬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다. 자신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이는 죽음으로도 갚을 수 없는 죄였다.

‘어떻게든 마인으로 만들어 주마.’

장막의 악마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 의지가 강한 인간은, 능력이 뛰어난 인간은 타락시키기 힘들다.

무언가를 희생하지 않고도, 스스로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계약을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 간절한 염원, 그리고 혼자서는 절대로 그 염원을 이룰 수 없다는 좌절감이 필요하다.

장막 악마의 특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타인의 마음에 어둠의 장막을 드리워서, 극심한 좌절감과 박탈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생각해 보니, 오늘의 일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드마스터 하나가 악마의 소굴로 단독으로 들어오는 일은.

그러니까, 저만큼 뛰어난 재료가 자신이 유리한 장소로 무작정 들이닥치는 건 웬만해선 벌어지지 않는 일이니까.

……하지만.

“…….”

비로소 자신의 앞에 나타난 인간 검사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 안에 담긴 의지를.

그가 굳건히 세운 검을, 그리고 신념을 마주한 순간.

장막의 악마는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터엉

콰콰쾅-!

악마가 강하게 발을 굴렀다. 수직으로 쏘아진 그의 몸뚱이가 천장을 부수고도 한참이나 위로 날아올랐다.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등을 휘감은 어둠의 장막이 날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승산이 없음을 간파한 것이다.

도망치는 속도가 키릴의 그리핀에 비견될 정도로 빨랐다.

‘따라잡긴 힘들겠어.’

괜찮았다.

하늘을 올려다 본 아이른이 자세를 취했다.

정수리 위로 치켜올려진 대검.

태양 빛에 녹아내리면서도 더욱 높이, 더욱 멀리 도망치고 있는 검은색의 존재.

고민은 없었다.

망설임도 없었고, 놓치면 어쩌나 하는 염려도 없었다.

이윽고, 확신에 가득 찬 아이른의 검에서 황금의 오러가 쏘아져 나갔다.

“……!”

퍼어어엉-!

퍼어어어어엉-!

그것으로 끝이었다.

악마의 본체는 물론이고,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사후 의지마저 깔끔하게 지워 버린 아이른이 검을 거둬들이려다, 바닥에 박았다.

콱-

자신이 여기에 온 것은 악마를 퇴치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고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한 것.

선의를 담은 기운이 요술대검을 통해 흘러나왔다.

악마의 소굴이 천천히 정화되는 것을 본 아이른이, 인질들의 몸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

일 처리가 너무나도 빨랐다.

그렇기에 와이즈 상단을 비롯한 여행자들은 누구도 아이른 파레이라의 활약상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강함을 의심하지 못했다.

“…….”

“…….”

“…….”

밀려오는 땅거미조차 저 멀리 걷어 내는 밝고, 따스한 빛.

그 중심에서 인질들을 돌보고 있는 영웅을, 사람들은 말없이 지켜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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