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불편한 동행 (3)
생각해 보면, 과거의 자신은 꽤 탓을 많이 했었다.
물론 자신이 잘났다고,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자아가 확립되기도 전인 5살의 나이에 친모의 사고사를 목격한 것은 끔찍한 일이니까. 몇 년을 침실에 틀어박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일이니까.
하지만…….
‘10년 동안이나 방 밖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한 건, 그보다 잦은 바람이 불었던 탓이지.’
10~15살의 아이른 파레이라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어디를 바라봐도 멸시의 시선이 보인다.
어디에 귀 기울여도 조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태 공자. 파레이라의 게으름뱅이.
그것은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너무나도 세차고, 차가워서 고개를 숙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아이른은 더욱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땅굴을 파고 밑으로 들어갔고, 꿈속으로 회피하였다. 언젠가 바람이 잦아들기를 바라면서.
당연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곧바로 깨닫지는 못했다.
전생의 사내가 강제로 검을 쥐여 줬을 때도, 그리하여 처음으로 잠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들었을 때도, 바람은 불어왔다.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고.
이는 크로노 검술관에 입관했을 때까지도.
남부 6가문의 회동이 있었을 때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바람은 계속 분다는 것을. 그 사실을 어찌할 수는 없다는 것을.
대신 그보다 중요한 것은…….
‘바꿀 수 없는 주변 환경에 집착하기보다는, 나 자신이 그러한 바람을 견딜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어찌보면, 아이른 파레이라의 노력은 그때부터가 진짜라고 할 수 있었다.
옅은 바람에도 이리저리 휘둘리던 자신을 바꾸기 위해. 바람이 무서워 숨기만 하던 자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가슴을 펴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조금 더 열심히 육체를 단련했고.
조금 더 열심히 검술을 수련했다. 꼭두각시처럼 꿈속 사내의 등만을 쫓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자 지금까지보다 조금 더 거센 바람이 불어와 마음을 흔들었다.
괜찮았다.
그때부터의 아이른은, 바람에 맞서 나아가는 법을 깨달아가는 와중이었다.
‘쉽지는 않았지.’
알하드 산채에서의 화두.
이그넷 크레센시아와의 강렬했던 만남.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날아들었던 자신에 대한, 자신의 검에 대한 질문들.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그러나 아이른은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 예전만큼 힘들지도 않았다. 그의 주변에는 어느새 꿈속의 사내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믿음직하고 든든한 존재들이 넘쳐나는 상태였다.
마음의 기적을 알려 준 루루가 있었고.
오행의 시작을 알려 준 쿠바르가 있었다.
불꽃 같은 투쟁심의 주디스도, 물과 같은 여유로움의 브랫 로이드도, 너무나도 사랑하는 일리아도.
그 밖의 수많은 이들도 자신을 스쳐 지나가며 교훈을 주었고, 깨달음을 주었다. 사랑을 주었고, 믿음을 주었다.
그렇다.
자신을 흔드는 시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더욱 높이 자라나게 만드는 마음 역시 넘쳐났다.
그로 인해 드높이 줄기를 뻗어 올린 아이른 파레이라에게 있어서, 지금 정도의 바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고마워요.”
“……뭐?”
쟈린이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꽤 추상적인 아론의 말.
허나 이해하지 못할 얘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녀석이 건네는 마음이, 사고가 물이 흘러들어오듯 자연스레 느껴졌다.
언어가 아니라 조금 더 직관적인 무언가를 통해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지금의 감사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궁금했다.
다행히, 답은 곧바로 나왔다.
“저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배려해 줬잖아요.”
“…….”
“그 마음만으로도, 지금의 바람쯤은 충분히 견딜 수 있어요.”
아이른이 슬며시 눈을 감았다.
빈말이 아니었다. 지금 쟈린이 건넨 말은 꽤 의미가 깊었다. 자신을 향한 선의라는 측면에서도 그랬지만, 그 이상의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예전과 비교해 보니…….’
지금의 나, 생각보다 꽤 많이 성장했구나.
속으로 중얼거린 아이른이 더욱 진하게 미소 지었다.
아마 예전의 자신이라면 멀쩡하지 못했을 터였다.
15살 이전의 자신이었다면 조롱과 비난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잠을 청했을 거고.
15살 이후의 자신이었다면 전생 사내가 보여 준 강철의 검에만 의지했겠지. 그 역시 똑같이 도망치는 일인 건 자명하다.
허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은 잔가지조차 흔들지 못했고.
흘러들어온 선의가 오히려 자신을 살찌웠다. 나무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바람은 불어왔지만, 자신은 이만큼이나 달라져 있었다.
“아, 미안해요. 얘기 중에 갑자기 눈 감아서.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
“하여튼,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정말이에요. 게다가 며칠만 있으면 타모에 숲도 벗어나고, 그다음에는 그렇게까지 위험한 일도 없으니까…….”
“왜 숨겼어?”
“…….”
“아니, 숨긴 게 아니구나. 처음부터 말했었지. 오해한 건 우리였고.”
쟈린이 말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눈앞의 청년이 누구인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자기 일에 충실하고, 타인에게 있어 예의 바르다.
그러면서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데, 그러한 모든 면이 처음에는 연기처럼 느껴졌었다.
타인을 사칭했다는 최악의 첫인상 때문이었다.
허나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젊은 영웅을 상징하는 황금의 요술대검을 보지 못했더라도.
소드마스터를 증명하는 오러 소드를 본 것이 아니더라도, 그래도 확신할 수 있었다.
“아이른 파레이라.”
“…….”
“정체를 숨기는 이유라도 있는 거야?”
“어…….”
아이른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있기야 하다. 하지만 그리 거창한 이유는 아니다.
그저 조용하고 여유롭게 다니고 싶었을 뿐이다. 자신이 없는 동안 바뀐 대륙의 분위기를 느끼고, 정서를 파악할 겸 말이다.
‘어쩌다 보니, 대륙이 아니라 나의 변화에 집중하게 되긴 했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았다.
영지를 떠나기 전, 정화단의 노인이 말했을 때보다 더욱 큰 자신감이 자신을 감싸고 있었으니까.
“아이른? 아니, 이제 아이른 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 그러지 마세요.”
“그럼 빨리 말해. 왜 숨겼어?”
“아니, 그냥 어쩌다 보니…… 중간에 말할 기회를 놓쳤어요. 조용히 다니고 싶기도 했고…….”
“그렇구나. 뭐, 이해 못 할 건 아니네. 유명인은 피곤하니까.”
“하하…….”
“하지만, 이런 상황이면 이제 말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음…… 아뇨.”
잠시 고민하던 아이른이 고개를 저었다.
쟈린은 또다시 물었고, 압박에 약한 그는 또다시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지금 밝히면, 사람들이 많이 민망해하지 않을까요?”
“…….”
“저도 민망하고요. 이제 와서 말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순박한 성격이었구나.
피식 웃은 쟈린이,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 * *
5일의 시간이 더 지났다.
다행히 그사이에도 습격은 없었다. 사람들은 신이 난 모습으로 타모에 숲을 빠져나왔고, 와이즈 상단에 감사를 표했다.
직접적인 전투를 치르지는 않았지만, 상단의 존재는 모두에게 큰 안정을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역할을 한 셈이었다.
“후우, 이제 끝났군.”
“그러게. 도시에 도착하면 일주일쯤 쉬자.”
“그러니까. 지금 녀석들하고 따로 움직이는 편이 좋겠어.”
에단과 조반니가 말을 주고받았다.
신성왕국이 아닌 다른 장소에 볼일이 있는 몇몇을 제외하면, 지금 모인 여행가 대부분은 가엘 와이즈와 함께 이동할 터였다.
에단 파티로서는 굳이 그들과 함께할 필요가 없었다. 몸은 안전했어도 정신은 앓기 직전이었다. 푹 쉬면서 심력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 녀석들도 오래 쉬고 갈지도 모르는데. 차라리 먼저 움직이는 게 낫나?’
에단이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곁눈질했다. 대놓고 바라보진 않았다. 여전히 그들의 이미지는 좋지 않았으니까.
특히 아론이 그랬다.
점점 와전된 소문 때문일까?
이제는 대부분이 그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던졌다.
대놓고 시비를 거는 이는 없었지만, 누가 봐도 조롱이 담긴 말을 툭툭 내뱉고 갈 정도였으니 젊은 청년의 고충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안 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까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쟈린이 신경을 써 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정겹게 얘기를 나누는 인간과 엘프, 드워프 쪽을 쳐다보던 그가 푹 한숨을 내쉴 때였다.
“도, 도와주십시오!”
“……무슨 일이오?”
“와, 와이즈 상단! 와이즈 상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마, 마인이 나타났습니다!”
“……!”
말을 타고 헐레벌떡 달려온, 패잔병의 행색을 갖춘 두 사내.
그들의 말을 들은 모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마찬가지로 신성왕국을 향해 움직이던 파티가 습격을 당해 마인의 소굴로 잡혀갔다는 이야기였다.
“이걸 어쩌지?”
“허어…….”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봤다.
원래대로라면 고민할 가치도 없다.
그들 대부분은 자기 한 몸 건사하기 힘든 모험가, 혹은 돈을 받고 일을 해주는 용병이다.
마물도 아니고 마인과 싸울 용기를 가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자연스레 와이즈 상단의 총 책임자 쪽으로 이목이 쏠렸다.
침착한 표정의 가엘 와이즈가 앞으로 나섰고, 예의 부드러운 미소로 병사들에게 물었다.
“마인 측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습니까?”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목소리.
적지 않은 여유가 느껴졌다.
당연했다. 현재 와이즈 상단의 수준은 웬만한 왕국 하나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
마스터 하나에 엑스퍼트 다섯은 그 어떤 마인을 상대로도 겁먹을 이유가 없는 전력이었으니, 브루디 샤퍼를 필두로 한 상단의 정예들은 느긋한 얼굴로 사내의 보고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오면 흘러나올수록, 그들의 표정에는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건…….’
‘마인 하나가 아니야. 다수의 마인, 어쩌면…….’
‘악마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습격당한 파티의 전력이 형편없었다면 모를까, 엑스퍼트가 무려 넷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형편없이 밀리는 것을 넘어, 몇몇은 납치까지 당했다고 한다면…….
일개 마인의 소행이라고 보는 건 힘들었다.
가엘 와이즈의 생각도 자연스레 바뀌었다.
원래라면 거침없이 진격했을 터였다.
대륙에 희망을 주기 위한 행사에 참여하려는 이들이 누군가의 불행을 외면하는 건 절대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잡혀간 이들 중에 엘프 여성이 있다는 것도 문제였다.
허나 악마의 짓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엑스퍼트는 물론이고, 소드마스터와 고위 사제가 페어를 이루어도 쉬이 감당하기 힘든 두려운 존재.
‘어쩔 수 없어. 그들을 상대하는 건 아빌리우스의 성기사단에 맡겨야…….’
여기까지 생각한 가엘 와이즈가 막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한 청년이, 좌중들 사이를 헤치고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뭐야? 저 녀석.”
“와이즈 님께서 말씀하려는데…….”
“아니, 지가 왜 나서? 뭐라도 돼?”
“착각하는 거 아니야? 자기가 아이른이라고.”
“푸흡, 정말 그런 건가?”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고운 시선도, 고운 말도 없었다.
누군가는 소문에 휩쓸렸고, 누군가는 와이즈 상단의 위세에 눌렸다.
다른 누군가는 건드려도 만만한 이를 향해 자신의 감정을 풀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여기 모인 이들에게 있어서, 아론이란 청년의 위치는 딱 그 정도였다.
아닌 이도 있었다.
쟈린이 그러했다.
금발의 청년을 뒤쫓아간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밝히려고?”
“예.”
“계속 숨기려는 거 아니었어?”
“말하는 편이, 조금 더 안심하지 않을까요?”
알 수 없는 대화.
그리고 알 수 없는 여유.
기묘하기 그지없는 분위기에 모두의 표정이 굳어 가고, 몇몇 성질 급한 이들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오려던 찰나였다.
슈욱-
“…….”
“…….”
“…….”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황금의 대검이 나타났다.
우우우우웅-!
연이어서, 그보다 찬란한 오러 소드가 피어났다.
화려함보다 따스함이 먼저 떠오르는, 보는 이의 마음을 절로 평안케 하는 기운이었다.
“방향만 말해 주십시오.”
“어, 네?”
“방향만 가르쳐 주시면, 지금 바로 달려나가겠습니다.”
“어어, 저, 저기…….”
두 병사가 동시에 한 곳을 가리켰다.
아론이, 아니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쟈린 쪽을 쳐다본 그가 다시 고개를 돌린 뒤,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로노 검술관 27기 졸업자 아이른 파레이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터엉!
이윽고, 황금의 빛이 대지를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