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불편한 동행 (2)
꿀꺽
에단이 마른침을 삼켰다. 손에는 어느새 땀이 맺혀 있었다.
소드마스터, 브루디 샤퍼.
서부의 유서 깊은 검술관주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알려진 이다. 그야말로 저 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셈이다.
그런데, 왜일까?
이상하게 그에게 눈길이 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의 옆에 있는 존재에게 시선이 쏠렸다.
가엘 와이즈.
장차 대 와이즈 상단의 미래를 책임질 사내를 보는 순간, 에단은 절로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당연하지.’
소드마스터는 대단하다.
허나 소드마스터를 부릴 수 있는 존재는 더 대단하다.
강대국의 주인 정도가 아니고서야 그만한 초인을 휘하에 둘 수 없는 법. 즉, 가엘 와이즈의 영향력은 웬만한 왕 이상이라고 볼 수 있었다.
“말소리가 들려서 나와 봤습니다만…… 무슨 일일까요?”
그런 대단한 존재의 입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중하고, 예의 바르다.
에단은 그것이 더 무서웠다.
진정으로 높은 이는 시끄럽게 짖지 않아도, 화난 표정을 짓지 않아도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 가엘 와이즈가 그러했다.
오러나 마력 따위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압박감.
그는 적잖은 압박감 속에서 어떤 말을 골라 담아야 할지를 고민했다.
허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와이즈 님. 아론이라고 합니다. 밤중에 소란을 일으켜 죄송하지만,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그렇군요, 아론 씨. 중요한 일인가요?”
“사소한 건의입니다만, 시간을 내어주신다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바쁘시다면 나중에 찾아오겠습니다.”
조금의 동요도 없이 할 말을 이어가는 금발의 청년.
이를 본 에단도, 대머리 엑스퍼트도,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주변인들도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가엘 와이즈는 처음부터 귀하게 태어난 존재인 듯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전과 다름없는 태도를 유지하는 젊은이를 보며, 소드마스터 브루디 샤퍼가 눈매를 좁혔다.
오직 가엘 와이즈만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보였다.
그가 말했다.
“그렇군요. 마침 일이 끝났으니, 이야기를 들어 보도록 할까요?”
“감사합니다.”
그리하여 시작된 아론의 이야기는, 대머리 사내에게 말한 것과 한 치의 다름도 없었다.
사소하지만 충분히 불만이 생길 수 있는 부분들을 조리 있게 설명한다. 그러면서 청자의 기분이 나쁠 만한 표현은 최대한 자제한다.
능변까지는 아니었지만, 누가 듣더라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정리된 말이었기에 주변인들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물론 아무리 옳은 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항상 통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하다.
메시지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메신저기에, 상대적으로 낮은 쪽에서 높은 쪽으로 향하는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허나 가엘 와이즈는 속 좁은 이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많은 이가 합류한 와중에 일정이 꼬이다 보니, 아론 씨 말처럼 자잘한 문제들이 생긴 것 같습니다.”
깔끔하게 사과한 하프 엘프가 직원 하나를 불러 몇 가지를 지시했다.
고개를 끄덕인 직원이 빠르게 사라졌고, 이를 확인한 그가 아론을 쳐다봤다.
“다시 한번 미안합니다. 본의 아니게 실례를 범했군요.”
“아닙니다. 불쾌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이렇게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아론 씨는 와이즈 상단의 손님이었을 수도, 손님이 될 수도 있는 분 아닙니까. 아! 물론 손님이 아니라고 함부로 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하하.”
가벼운 농담을 건넨 가엘 와이즈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이에게, 연극배우의 그것처럼 명료한 발성으로 말을 전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생각보다 많아진 인원과 함께하다 보니 실수가 나왔는데, 고의가 아니니 양해를 부탁한다는 점.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자신부터 앞장서서 노력하겠다는 점.
마지막으로 와이즈 상단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으니, 부담 갖지 말고 어떤 것이든 편하게 건의해 달라는 점.
이를 들은 여행자들의 표정이 더없이 밝아졌다.
“과연 와이즈 상단이야.”
“인물만큼이나 성격도 좋으시군.”
“그렇게까지 큰일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정성껏…….”
“그러니까 말이야.”
그야말로 온갖 찬사가 쏟아지는 상황.
그 속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에단이 눈치를 보며 파티원들에게로 돌아갔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는데, 옆에 있는 아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자네, 그렇게까지 담이 큰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그런가요? 이상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나서지 않는 게 좋았을까요?”
“에이, 무슨 그런 말을. 잘했어, 잘했어. 우리 쫄보 대장이 벌벌 떨고 있는 거 구해 준 건데, 당연히 잘했지.”
“아무렴!”
“뭐? 이 자식이…….”
에단이 눈을 부라렸다. 허나 키난 레예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대장을 놀렸다.
조반니는 배를 잡고 낄낄거렸고, 불칸과 아론은 피식 웃으며 이를 지켜봤다.
오로지 쟈린만이 불편한 기분을 숨기지 못한 채, 가엘 와이즈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그렇게, 타모에 숲에서의 3일 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 * *
나흘의 시간이 더 흘렀다.
원래라면 교역로의 끝에 거의 다다랐을 시기지만, 파티는 여전히 숲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많은 인원이 더 안전하게 나아가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이는 여행자들을 적잖이 불안케 할 만한 점이었다.
그런데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상단의 총책임자인 가엘 와이즈가 솔선수범해서 파티를 돌아보고, 불만과 건의를 수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양반이야. 존경할 만해.”
“같이 움직여 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하는데, 직접 나서기까지 하시고 말이야.”
“그러니까. 아랫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니까?”
누구보다 빨리 일어나고, 누구보다 늦게 잠자리에 든다. 그렇게 아낀 시간 대부분을 파티를 위해 쓰면서도 싫은 내색 하나 보이지 않는다.
어찌나 열심히 뛰어다니는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에단 파티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었다.
“그렇게 대놓고 그럴 필요가 있었나?”
“없었지. 사실 그리 큰 문제도 아니었잖아? 그냥 우연이 몇 번 겹친 정도인데, 너무 까탈스러웠지.”
“자네, 그거 아나?”
“뭘?”
“저기 저 청년, 듣기로는 아이른 파레이라를 사칭했다는…….”
“아아, 들었지. 쯧,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아직도 그런 악질 짓거리를 하고 다니다니.”
에단으로서는 서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참고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 말은 짚고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처음의 여론도 그러지 않았는가. 충분히 얘기할 만한 것을 얘기했다고.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던 광경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했다.
물론 그런 그조차도 아론보다 억울하지는 않았다.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청년을 바라보며, 에단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조반니 녀석, 우리끼리만 할 농담을 다른 녀석들한테까지 해서…….’
사실 그만의 잘못은 아니긴 했다. 처음 와이즈 상단에 합류했을 때, 그러니까 그가 다른 여행가들에게 아이른과 관련된 농담을 던졌을 때.
자신 역시 함께 웃고 떠들었던 기억이 있으니까. 그때의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그냥 지금의 분위기 자체가 이해가 안 갔다.
에단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모르겠다.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자신들이 그렇게까지 큰 잘못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 하지만 이 억울함을 들어줄 이들은 아무도 없다는 것.
그렇기에, 타모에 숲에서 벗어나자마자 와이즈 상단을 떠나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아니,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힐끗, 쟈린 쪽을 쳐다본 에단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다. 너무 큰 억측이다. 쟈린과 가엘 와이즈 사이의 악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을 거라는 사실은.
솔직히 말해 믿기 조금 어렵기도 했다. 대륙을 쥐락펴락하는 상단의 장남과, 은패 용병 마법사 사이의 격차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직접 보니, 그리 나쁜 양반 같지도 않고.’
“……에휴, 모르겠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정말 모르겠다. 쟈린이 못 믿을 엘프는 아니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만으로 와이즈 상단과 척을 지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었다. 그러기에는 상대의 덩치가 너무 컸다.
그냥 잊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다가, 타모에 숲만 나오면 떨어져 나오자.
이 생각을 마지막으로 에단은 잠에 빠졌다.
그렇기에, 잠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난 쟈린이 아론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미안.”
“네?”
“미안하다고. 네가 지금 욕먹는 거…… 전부 나 때문이야.”
“그게 무슨…….”
앉은 채 명상을 하고 있던 아론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알고야 있었다. 자신이 다른 여행가들로부터 아이른 사칭범이라 욕을 먹고 있다는 것 정도는.
하지만 그것은 쟈린의 잘못이 아니었다.
1차적으로 오해의 소지를 보인 자기 잘못이고, 2차적으로는 상단 합류 때 그 사실을 말한 조반니의 잘못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엘프는 지금의 일을 자기 잘못이라 말하는 걸까?
대답은 곧바로 나왔다.
“가엘 와이즈랑 나는 사이가 안 좋거든.”
“네?”
“못 믿겠지? 근데 진짜 그래. 아, 어떤 일인지는 말 못 해. 알게 되면 위험할 수 있거든. 얘기해 봤자 믿지도 않을 테지만.”
“……?”
“후우, 역시 그런 표정…… 아니, 내 잘못이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
“하여튼 지금의 과하게 부정적인 분위기는…… 나 때문이야. 그래서 미안하고…… 그냥, 그 말을 하고 싶었어.”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쟈린이 입을 닫았다.
아론은, 아니 아이른은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야 대충 알겠다지만, 그녀의 말을 믿을 만한 근거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아이른이 쟈린의 눈을 바라봤다.
그는 검사였지만, 동시에 요술사이기도 했다. 일반인보다 타인의 마음에 민감하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그런 그의 힘은, 물의 기운을 깨달은 이후 더욱 깊어졌다.
서로의 감정과 마음, 의지를 교류하는 과정에서 체득한 능력이 말해 주었다.
쟈린의 마음은 진짜라고.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그 마음에 답하는 뭔가를 말해 주는 게 맞는데…….’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무슨 이야기를 해야, 이 엘프가 걱정을 내려놓고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을까?
다행히, 고민은 길지 않았다.
빙긋 웃은 아이른 파레이라가 입을 열었다.
“잠깐, 제 옛날이야기 좀 들어 볼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