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불편한 동행 (1)
“아니, 그건 그게 아니라…….”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에이, 됐어!”
“푸흐흐, 네가 그러니까 아직도 동패 용병이지.”
“그러는 자기는. 나랑 똑같은 녀석이…….”
마물과 몬스터로 얼룩진 타모에 숲의 교역로.
평소라면 긴장 가득한 얼굴로, 숨조차 죽이며 이동했을 여행가들이다.
허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대부분이 밝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 수다까지 곁들이며 말이다.
물론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근 200명에 가까운 대규모 파티를 이끄는 구심점이, 그들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믿음직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와이즈 상단의 장남이라면, 마물이나 몬스터 따위는 아무 문제 없지.’
‘또다시 마인이 등장한다고 해도 괜찮아. 우리 쪽에는 무려 소드마스터가 있다고!’
‘너무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한 번쯤은 습격이 있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마스터의 오러 소드를 직접 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대륙 최고인 와이즈 상단의 장남, 가엘 와이즈.
그는 단순히 배경만 타고난 행운아가 아니었다.
굉장한 장사 수완과 훌륭한 인품을 통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고, 인간과 엘프 사이의 화합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밑에는 항상 대단한 인재들이 넘쳐났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잘 훈련된 정규군에 버금가는 상단 호위병들.
무려 다섯이나 되는 엑스퍼트급의 강인한 검사들.
게다가 그들 전부가 덤벼도 웃으며 상대할 수 있을 실력자인, 소드마스터 브루디 샤퍼까지.
그야말로 웬만한 국가 하나의 전력이 움직이는 와중이었으니, 아무리 마물이 가득한 타모에 숲이라 할지라도 두렵지 않은 게 당연했다.
“가엘 와이즈 님도 신성왕국으로 간다고 했지?”
“그렇다는군.”
“혹시 참가도 하시나? 듣기로는 검과 마법, 양쪽으로도 재능이 있으시다고 들었는데…….”
“브루디 샤퍼는? 그쪽 얘기는 없어?”
“에휴, 그 양반은 나이가 70이 넘었잖아. 나이 때문에 안 돼.”
“아, 그렇지. 하하하.”
면박을 주는 이도, 면박을 당한 이도 여유롭게 웃을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가엘 와이즈는 타모에 숲뿐만이 아니라 신성왕국까지 가는 여정 내내 모두를 지켜 주겠다고 했다.
실력이 어정쩡한 용병들로서는 이보다 좋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허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
쟈린, 조반니, 키난 레예스, 에단.
얼마 전부터 급격히 말수가 줄어든 그들을, 아이른이 티 나지 않게 살폈다.
타모에 숲으로 들어온 지 이틀이 지나가는 시점이었다.
* * *
‘괜찮아. 긴장할 거 없어.’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한 파티의 리더, 에단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며칠간 자기 일행에게 있었던 약간의 불편함, 서운함. 그것을 온건하게 말할 뿐이다. 절대 시비를 거는 게 아니다.
‘그 정도를 말하는 것도 어려우면, 리더 때려치워야지.’
와이즈 상단은 현재 대규모 파티의 구심점이다. 그러나 구심점이라고 해서 하나부터 열까지의 일을 모두 처리할 수는 없다.
대신 각 소규모 파티들의 리더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은 뒤, 보다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중앙에서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불침번의 순서를 정하거나, 잠자리 위치를 정하거나, 식사나 잡일 같은 일을 배분하거나…… 당연히 이에 불만을 품는 이는 없었다.
와이즈 상단이 아니면 누가 그런 일을 맡아서 하겠는가.
다만…….
그 과정에서, 에단 파티가 불편함을 느낄 만한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뭐, 큰일은 아니긴 하지.’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었다.
기껏해야 식사 배급이 늦는다거나, 불침번 순번이 꼬여 조금 더 자주 투입된다거나, 마물의 습격에 다소 취약한 장소에 연속으로 잠자리를 배정받는 정도.
깊게 생각하면 심각할 수 있는 문제였지만, 대범한 성격이라면 무시할만한 수준에 불과했다.
실제로 에단도 그냥 넘어가려 했다.
허나 쟈린이 마음에 걸렸다.
‘미안해. 나 때문에 모두가 피해를 보네.’
‘아니, 아니야. 설마 너 때문에 그러겠어? 그냥 우연의 일치일 뿐이야.’
‘하지만…….’
내내 어두운 표정을 짓는 엘프 마법사, 쟈린.
그런 그녀를 신경 쓰느라 덩달아 분위기가 처지는 파티.
거기에 생각보다 더딘 이동속도가 더해지자 에단의 생각이 바뀌었다.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슬며시 건의 정도는 해 보는 쪽으로.
‘사실, 쟈린이 너무 과민반응하는 것 같긴 해.’
예전에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느낌의 사건이 아니긴 했지만, 쟈린이 어째서 불편해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었다.
허나 그로 인해 지금 겪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건 조금 억측이지 않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저 우연의 일치일 것이고, 재수가 없었을 뿐이다.
그러니 괜찮다. 가벼운 건의 정도로 해결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마침내 마음을 다스린 에단이 카드놀이를 하는 용병들 쪽으로 다가갔다.
혼자 불쑥 찾아가는 것보다는, 다른 파티의 리더 몇과 함께 가서 말하는 것이 더 잘 먹힐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 아, 미안. 지금 중요한 내기 중이라. 나중에…….”
“응? 아아, 그렇지. 그래, 같이 가기로 했었…… 음! 근데 지금, 배가 갑자기 아파서. 미안, 다음에 가자.”
“아이고, 내가 지금 술을 마셔가지고, 얼굴 붉어진 상태로 찾아가면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
“…….”
에단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주 친하지는 않지만, 십 년가량 용병 일을 하면서 꽤 안면이 익었던 이들이다.
여러 번 도움을 준 적도 있었다. 이 정도 부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허나 그렇지 않았다. 자신만의 생각인 모양이었다.
잠시 씁쓸함을 느낀 그가 후,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뭐 그리 큰일이라고. 혼자 가도 돼. 암, 그렇고말고.”
짝!
에단이 자신의 뺨을 찰싹 때렸다.
그렇다. 정말 별일 아니다. 자신은 사소하고도 정당한 항의, 아니 건의를 하러 갈 뿐이다.
켕길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그냥 가볍게 마실 가듯 하면 되는 일이다.
‘게다가 내가 누구야. 황금빛 용병패에 빛나는 소드 엑스퍼트, 에단이잖아.’
그가 미소 지었다.
항상 생각한다. 자신은 최고의 검사는 아니지만, 최고의 검사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인생을 살아왔다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걸리는 것을 아무것도 없다.
상대가 소규모 상단이든, 대륙을 들었다 놨다 하는 대 와이즈 상단이든, 자신과 자신이 하고픈 말에 찝찝한 구석이 없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이다.
“후우.”
마침내 마음을 다스린 에단이 몸을 움직였다.
야영지의 중앙에 자리한 대형 막사로. 파티의 총 책임자로 자리매김한 가엘 와이즈가 있는 곳으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이상하게 발이 무거웠으나,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살짝 배어 나오는 땀도 괜찮았다.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느지막한 걸음걸이로 나아가던 그의 앞에, 한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는 얼굴이었다.
“용건이 뭐지?”
“……업무 배분 문제로, 사소한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그 얘기를 하고 싶어서 왔는데.”
에단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허나 그의 표정도, 목소리도 결코 자연스러운 느낌이 아니었다.
‘이상해.’
기분이 이상했다. 이상하게 평소보다 입이 안 떨어지고, 마음이 무거웠다.
눈앞에 있는 대머리 엑스퍼트 녀석은 예전부터 잘 알던 자다. 친한 사이는 아니다.
여러 번 시비가 붙었던 전적이 있으니까.
허나 그 대부분이 자신의 승리로 끝났기에, 언제 어디서 만나더라도 부담 없이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았다.
가슴께에 있는 와이즈 상단의 문양을 보는 순간.
대형 천막을 뒤로한 대머리의 여유로운 표정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 힘이 빠졌다.
녀석은 크게 보였고, 자신은 난쟁이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중요한 문제도 아닌데, 굳이?”
“……그래도, 얘기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렇지. 얘기 정도는 할 수 있지. 나한테 말해.”
“어?”
“나한테 말하라고. 전해 드릴 테니까.”
“…….”
“싫으면 말고.”
히죽, 치아가 드러날 정도로 희게 웃는 대머리의 앞에서, 에단은 오랫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그냥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녀석은 자신의 말을 전하지 않을 터였다. 그간의 트러블을 생각하면 확실했다. 그렇다면 기다리면 된다.
가엘 와이즈의 바쁜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직접 이야기를 꺼내면 된다.
헌데 그럴 수 없었다.
전하고 싶은 말도, 자신에게도. 어느 것 하나 문제없다고 생각했건만…… 마치 마인(魔人)을 마주한 듯한 압박이 느껴졌다.
아니, 그보다도 더 심한 무력감이 피어올랐다.
“뭐 해?”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거야?”
“언제까지 그럴 거야?”
대머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이죽거림이었고, 조롱이었다. 에단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오랫동안 망설였다.
별것도 아닌 일인데, 그냥 돌아가도 되지 않을까.
아니. 그런 별것도 아닌 일에 왜 이렇게까지 부담을 느끼는 걸까.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결정을 내린 에단이 푹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마음을 접은 그가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제가 대신 이야기해도 될까요?”
“…….”
웃는 얼굴로 다가온 금발의 청년, 아론의 얼굴을 본 에단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딱히 사정을 얘기한 적은 없는데?
아니, 그 전에, 이런 분위기에서 말을 하겠다고?
자신들을 꺼리는 느낌이 역력한 이런 상황에서?
“뭐야, 너는?”
“아, 안녕하세요. 아론이라고 합니다. 에단 님의 모험가 파티 소속인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와이즈 님은 바쁘시다.”
갑자기 등장한 청년에 대머리가 당황했다.
너무나도 여유롭게 다가와 할 말을 하는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조금 눈치가 없는 타입인가?’
물론 문제 될 건 없다.
우웅, 그가 오러를 끌어올려 기세를 발현했다.
수준이 높지 않아 실제적인 압박을 주긴 힘들지만, 날 선 분위기를 만드는 정도는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런 애송이는 충분히 쫓아낼 수 있었다.
아니었다.
청년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자신의 할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뒤에서 들었는데, 이야기를 대신 전해 주신다고요?”
“어? 어…….”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에단 님이 말했던 것처럼 업무 배분 과정에 사소한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요.”
이윽고, 아론이라는 애송이의 입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처음에 한 말대로였다.
그리 큰일은 아닌, 사람에 따라서는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정도의 문제.
그렇다. 신경 쓰이는 것은 내용이 아니었다.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가는 금발의 청년을 보며, 대머리의 표정이 점차 굳어 갔다.
‘뭐 하는 녀석이야?’
생긴 것은 한없이 순하다. 건장한 체격만 아니었다면 학자나 학생이라고 해도 믿었을 정도로 여린 모습이다.
허나 말하는 태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와이즈 상단의 명성에 위축되지도 않고, 발현했던 기세는 느끼지조차 못한 듯하다.
그렇다고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느낌도 아니었다.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주눅 들지도 않고, 거들먹거리지도 않고. 자신의 할 말만을 명료하게 전달하는 아론을 보며, 그는 묘하게 자신의 마음이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뭐야? 불만 있을 법 한데?”
“그렇네. 한 번이면 그러려니 하는데, 연달아 겹치니까 좀 그러네.”
“얘기 잘 전달해야 할 것 같은데.”
이야기가 길어졌다. 그에 따라 주변의 이목도 집중되었다. 꽤 많은 이들이 금발 청년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고, 대머리를 쳐다봤다.
그는 자신을 지켜 주고 있던 갑옷이 벗겨진 듯한 착각 속에서,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분위기를 뒤바꾼 이는, 천막 안에서 나온 두 사람이었다.
스르륵
“무슨 일이지?”
“그, 저기……!”
대머리가 바짝 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용사의 제전 같은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면 평생 가도 보기 힘든 존재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으니까.
소드마스터 브루디 샤퍼의 눈빛은, 엑스퍼트가 감당하기 힘든 기운을 품고 있었다.
허나 아론이, 아니 아이른 파레이라가 집중한 건 그쪽이 아니었다.
‘저자가…….’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 그리고 부드럽기 그지없는 미소로 무장한 와이즈 상단의 총 책임자.
하프 엘프, 가엘 와이즈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