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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92화 (292/388)

◈ 95. 불청객 (2)

“……흠.”

쿤이 검은 옷의 사내를 바라봤다.

칼 린제이. 꽤 그리운 이름이었다. 한때 세상을 들썩이게 했던 천재이자, 이그넷을 만난 이후 형편없이 몰락한 얼간이.

그래, 사람들은 더는 그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조롱과 멸시, 비아냥만을 건넬 뿐이었다.

‘나는 이해하는 쪽이지만.’

어떻게 고작 한 번의 패배로 좌절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범인의 생각일 뿐, 천재는 다르다.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느꼈을 것이다.

합을 나눴을 때는 확신했을 터였고, 패배가 확정됐을 때에는 미래까지 그려졌겠지.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

1년을 노력해도, 10년을 노력해도. 아니, 살아 숨 쉬는 내내 검을 수련해도 결코 좁힐 수 없는 재능의 차이.

‘범인은 볼 수 없는 이그넷의 진짜 재능과 잠재력, 그리고 미래…….’

칼 린제이가 훨씬 심하게 망가진 것은, 그 역시 빛나는 재능을 갖췄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빨리 상대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말이다.

‘그래서 바보가 좋은 거야.’

쿤이 웃으며 생각했다.

정말이었다. 자신은 바보였고, 그래서 포기하지 않았다.

이안과 자신의 사이에 얼마나 불합리한 재능의 차이가 존재하는지,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몇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칼 린제이였다면 곧바로 포기했을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됐을 시간을 멍청하게 날려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바보 같은 마음가짐이야말로 상식을 뒤엎을 수 있다.

확률이니, 가능성이니 생각 않고 인생을 때려 박을 수 있는 멍청이만이 0.0001%의 기적에 닿을 기회를 거머쥔다.

자신처럼.

그리고 주디스처럼.

여전히 어두운 길을 헤쳐가고 있는 수많은 무명 검사들처럼.

“다시 레이스에 오른 것은 칭찬해 주마. 그런데…….”

칼 린제이, 아니.

이제는 린제이를 버린 사내를 보며 쿤이 웃었다.

대충 알 것 같았다.

이안을 꺾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신처럼, 그 역시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고 여기까지 올라온 것 같았다.

자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예전에는 그런 감 따위 없었지만, 100살을 넘고 나니 이안이 말하는 ‘안목’이라는 것이 생긴 모양이었다.

허나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어째서 나지?”

“…….”

“네 상대는 내가 아니라 이그넷 아니었나? 여기는 신성왕국이 아니야. 빨리 움직여. 가다가 내 제자 만나면 한 수 가르쳐 주기도 하고. 아, 누군지 모르나? 주디스라고, 너만큼의 재능은 없지만 꽤 괜찮은…….”

“가르침을 청합니다.”

후우우욱-!

칼의 몸에서 강렬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투기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욱 날카롭고 서슬 퍼런, 얌전히 가르침만 청할 목적이라면 절대로 드러내지 않았을 기운.

살기(殺氣).

이를 느낀 쿤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껄껄껄 웃음을 터뜨린 뒤 물었다.

“날 죽일 생각인가?”

“제 목숨도 걸겠습니다.”

“그럴 실력은 있고?”

“예전의 당신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아, 그렇군. 만만해 보였다, 그 말이군. 이그넷을 치기 전의 중간 점검, 몸풀이, 경험치…… 뭐 그런 건가.”

피식, 쿤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대체로 어이가 없었다.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원래 말주변이 없는 그였는지라 명확하게 지금의 감정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굳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이유가 뭔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취해야 할 행동은 정해져 있다.

한참을 큭큭대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가슴을 폈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 제자를 놀릴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칼도 그것을 느꼈다.

촘촘하게 퍼져 있는 자신의 기감, 그것을 일점으로 돌파하는 송곳처럼 날카로운 기운!

그것을 막아 내기 위해서 검을 치켜드는데.

꽈앙-!

바닥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쿤의 모습이 눈에서 사라졌다.

쾅! 쾅! 쾅! 쾅!

퍼엉! 펑!

“……!”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멀쩡하던 지면이 움푹 가라앉고, 단단하기 그지없던 바윗덩이가 박살이 나서 무너져 내렸다.

칼이 정신을 집중했다. 감각 개화. 극한으로 예민해진 오감이 자욱해진 흙먼지 속을 샅샅이 살폈다.

허나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느낄 수 없었다.

세상의 상식을 초월한 듯 무지막지한 빠르기로 움직이는 최속의 검사!

옷의 끝자락조차 볼 수 없는 답답한 상황 속에서, 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려운 것은 안다.”

“…….”

“힘들고, 괴롭고, 무섭겠지. 마주하는 것은커녕 떠올리는 것만으로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을 거다. 그래도 돌아가지 마라. 네가 찾아가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다. 이그넷이다.”

칼의 감각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바늘 끝에 내려앉는 먼지의 소리조차 들릴 수 있을 정도로, 허공을 부유하는 흙 알갱이의 숫자를 셀 수 있을 정도로.

허나 여전히 쿤의 자취를 좇을 순 없었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

쒜에엑-!

퍼석!

흑색의 오러가 바람을 일으켰고, 흙먼지를 걷어 냈다.

허나 실패였다. 쿤 대신 매끈하게 잘려나간 나무 한 그루가 칼을 반겼다.

여전히 목소리는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소음 속에서 그가 이를 악물었다.

“너는 꽤 노력했다. 알고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승산이 없는 건 아니다. 충분히 해 볼 만한 위치까지 올라왔어.”

“패배하면 어떠냐. 또 져도 뭐 어때. 어차피 그 녀석 성격상, 네가 얼마든지 찾아가도 다 받아 줄 거다. 그러니까…….”

“……!”

칼의 눈이 부릅떠졌다.

전방에서 들리는 목소리.

아니었다. 쿤은 앞에 있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검 끝이 자신의 뒤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하늘 위에서 지면을 내려다보듯 명료한 감각이었다.

그가 신형을 돌렸다. 자연스레 회전하는 움직임으로, 원심력을 담은 검이 상대의 공격을 막기 위해 거칠게 휘둘러졌다.

허나 한발 늦었다.

어느새 명치에 닿은 쿤의 검.

시간이 정지한 듯 우뚝 멈춘 그를 바라보며, 노인이 말을 마쳤다.

“……봐줄 때 꺼져라, 애송이.”

“…….”

“아! 한 가지. 왜 내 목숨을 노렸는지, 그것만 말하고 가라.”

정적이 감돌았다.

적지 않은 시간이었다.

피어오른 흙먼지가 다시 내려앉을 동안, 내려앉은 흙먼지가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동안 청년도, 노인도 아무런 말 없이 서로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러한 교착 상태를 끝낸 것은 쿤이었다. 허나 그것은 그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쿨럭!”

왈칵!

또다시 쏟아지는 피.

가슴이 흥건해질 정도로 흐르는 붉은 물결에, 쿤의 신형이 흔들렸다.

검 끝이 흔들렸고, 이를 바라보던 칼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우우우웅-!

그가 검을 휘둘렀다.

쿤도 마주 검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 했다. 허나 그러지 못했다.

꽈드드득……!

흑색의 검을 타고 흘러나온 어두운 오러, 그것이 동아줄처럼 쿤의 무기를 옭아매고 있었다.

평범한 오러가 아니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그리고 거대한 힘.

도저히 빼낼 수가 없었다. 마치 수백 년을 뿌리내린 거목처럼 안간힘을 써도 무리였다.

허탈한 웃음을 지은 노인이 청년을 바라봤다.

검게 물든 눈동자. 거기에 비친 자신의 쇠약해진 모습.

이를 멍하니 바라보던 쿤의 몸뚱이로, 칼의 검이 휘둘러졌다.

쩌어엉!

콰콰콰콰콰콰

퍼어어어어어엉-!

강렬한 타격음, 지면을 분쇄하며 생긴 마찰음, 그리고 또다시 터져 나오는 굉음.

쿤이 만든 소리였다. 형편없이 날아간 그는 자신의 거처와 충돌해 버렸다.

풍비박산한 돌과 나무, 그 밖의 자재들을 바라보며 칼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베지 못했다.

두드렸을 뿐이다. 마지막 순간, 검을 놓은 쿤이 양 손바닥으로 검을 막아 냈다.

엄청난 반발력 덕분에 검을 잡은 손아귀에 피가 흥건했다.

하지만.

스르륵……

그 상처는 숨 몇 번 고르는 짧은 시간 만에,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이를 복잡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칼이 폐허 쪽을 바라봤다.

먼지구름 속, 건장한 체격의 인영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빈사 상태일 거야.’

대륙의 3대 검사라 불리는 쿤이다.

하지만 그를 그만한 위치에 올려놓은 건 어디까지나 속도 때문이지, 다른 부분을 떼어놓고 보면 그렇게까지 대단하지는 않다.

자신과 상대의 오러량을 생각해 보면, 방어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상반신 대부분이 박살 났을 터였다.

그런 칼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후우웅-!

그가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먼지가 걷히고 상대의 모습이 드러났다.

형편없었다. 손가락이 없는 왼팔은 어깨에 달려만 있을 뿐이었고, 오른쪽 팔은 아예 없었다.

검은 여전히 자신이 갖고 있었다. 패배할 가능성은 없었다.

심지어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다가오던 걸음을 멈춘 그의 입에서, 또다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웨에에엑

울컥, 울컥……

쏟아져 나왔다.

터져 나왔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어떻게 사람의 몸에서 저렇게 많은 피가 흐를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쿤의 표정이 나쁘지 않다는 부분이었다.

“흐, 흐허, 이제 좀 개운하군. 시원해. 아주 시원해. 마치…….”

“…….”

“오랫동안 막혀 있던 무언가가, 뚫린 느낌이야.”

쿤이 비틀거렸다. 비틀거리며 위를 바라봤다. 그런 그의 모습을, 칼이 긴장한 눈으로 주시했다.

여전히 엉망이었다.

안색은 파리했고, 기세는 줄어들었다. 새하얬던 의복은 붉은 망토를 두른 듯했고, 오러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건장했던 체격조차 왜소해진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약해 보이지 않았다.

마치…….

‘기운이 줄어든 게 아니라, 가벼워진 느낌이…….’

“칼 린제이. 아니, 칼.”

흠칫, 쿤의 목소리를 들은 칼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나왔다. 자신이 물러났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다.

노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피로 물들어 새빨개진 치아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은 뒤, 자신이 할 말을 했다.

“지금이라도 마를 끊어라.”

“…….”

“할 수 있다. 늦지 않았어. 부정하게 쌓은 것을 걷어 내고, 새로 시작해라. 70세에 겨우 마스터에 오른 내가 보장한다. 할 수 있어.”

“…….”

파강!

듣지 않았다.

칼이 쿤의 검을 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고 오러가 잔뜩 실린 발로 부순 뒤, 재차 자세를 취했다.

허허허, 쿤이 웃었다. 이전과 달리 씁쓸하고 슬픈 느낌으로.

“어쩔 수 없구나.”

어쩔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낯익은 모습에 의아했을 때도.

생각보다 더 강한 모습에 의심했을 때도, 모든 것이 밝혀진 직전에 이르러서도. 선을 넘지 않기를 바랐건만.

이제는 안 될 것 같았다. 되돌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직접 끊어 줄 뿐.’

후우, 숨을 몰아쉰다. 입안 잔뜩 감도는 쇠 맛을 잊고, 고통을 잊고 앞으로 나아간다.

왼팔을 늘어뜨린다.

오른팔을 늘어뜨린다.

있을 리 없는 오른손의 감각이, 검의 감각이 온전하게 느껴졌다.

전보다 가벼운 느낌이었다.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

속으로 중얼거린 쿤의 오른편에, 새로운 검이 자라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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