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훨씬 기대되었다.
조금이지만 세상에 자랑하고 싶다는 마음마저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뛰어난 재능을 가졌는지, 얼마나 대단한 노력을 쏟아붓고 있는지를…… 자신보다 잘 아는 이는 없을 테니까.
“이 자식, 뭔 말을 하다가 말아?”
“아, 죄송해요. 잠시 옛날 생각을 하다가…….”
“뭔 서른도 안 먹은 놈이 늙은이 같은 말을…… 됐다. 그냥 잠이나 자야겠다.”
불카누스가 투덜거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른이 픽 웃었고, 다시 바닥에 몸을 뉘었다.
도시의 숙소에 비하면 거칠고 불편하기 그지없었지만, 문제없었다. 지금의 그는 나름대로 경험 많은 여행자였으니까.
그렇기에, 방금 전의 대화를 누군가 엿듣고 있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나한테 별로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뭐, 상관없었다. 키릴이 준 아티팩트를 사용해 잠시 소리를 차단했으니, 정체를 들킬 일은 없었다.
굳이 계속 숨길 필요가 있나 잠시 고민해 보긴 했지만, 역시 이대로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끌벅적하게 이동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지금의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앞으로는 말도 조금 더 조심해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는 아이른 파레이라를 곁눈질하며, 엘프 마법사 쟈린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 * *
며칠의 시간이 더 지났다.
그 사이에도 몬스터와 마물은 꾸준히 파티를 괴롭혔지만, 문제 될 건 하나도 없었다.
경계야 엘프의 예민한 귀, 그리고 알람 마법으로 충분했고, 전투 역시 엑스퍼트인 에단을 필두로 수월하게 흘러갔다.
그러한 과정에서 아론은 더욱 자연스레 일행에 녹아들었다.
단순히 뛰어난 검술, 훌륭한 요리와 같은 능력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러한 장점들은 파티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지만, 그보다는 사람 자체에서 풍겨 나오는 선한 분위기가 모두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생각보다 더 괜찮은 친구였어.”
“그러게 말이야. 눈치 보고 움직이는 느낌도 아니고, 그냥 타고난 성격 자체가 온화한 것 같은데?”
“그런 것치고 또 소심하거나 주눅 든 느낌도 아니라서 더 좋아. 자기 할 말은 하면서도 남 기분 안 상하게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신기하단 말이지.”
“그러게.”
“그러니까.”
에단의 말에 조반니, 키난 레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재미있을 것 같아서 데리고 다니던 청년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스스로 당당하면서도 남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 아론의 모습은 조금씩 그들의 마음을 열고 있었다.
단순히 흥밋거리가 아니라 믿을 만한 사람으로서, 동료로서 눈에 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아닌 이도 있었다. 쟈린이 그랬다. 다른 파티원들과 달리, 그녀는 가끔 드러나는 아론의 당찬 모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뭔가 후달리는 게 있어서 사칭까지 했던 놈이, 왜 사칭한 걸 들킨 다음에도 당당한 거야?’
이런 생각이 여전히 머리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그 때문에 평소라면 ‘소신 있다’ 정도로 생각했을 아론의 말과 행동도 무척 건방지게 보였고, 별로인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다투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친해지고 싶지 않다 정도고, 웃고 떠들기 힘들다 정도일 뿐이다.
매끼 맛있는 밥을 해 주는 건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용사의 제전까지 같이 구경하는 건 조금 고민을 해 봐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조용히 걸어가던 에단이 한마디를 툭 뱉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있으면 타모에 숲이네.”
“그러네. 아! 그런데 거기 요즘 위험하지 않아?”
“예전처럼 편하게 못 다니긴 하지.”
대륙 중부에 무성하게 자라 있는 타모에 숲은, 원래라면 지나다니기에 아무런 불편도 없는 장소였다.
교역으로 먹고사는 다섯 나라가 힘을 합쳐 길을 깔았기 때문이었다.
통행료가 적진 않았지만, 잘 관리된 길과 중간마다 있는 휴게소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 아까운 금액은 아니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었다. 타모에 숲에서 두 차례 마인이 출몰한 이후, 다섯 왕국은 교역로의 관리에서 손을 뗐다.
신성왕국의 힘을 빌려 토벌을 끝내긴 했지만, 또다시 어둠이 몰려올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당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무법천지가 된 길을 안전히 통과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실력자가 힘을 합쳐 나아가야만 했다.
‘알하드 산맥 때랑 비슷하네.’
아이른이 생각했다.
4년 전에 여행에 나섰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대규모 산적 집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상인들이 힘을 모았었지.
아마 이번에도 비슷할 터였다. 물론 상대가 산적보다 더욱 끔찍한 마인, 마물 녀석들이라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은 충분할 것 같은데?”
“그렇지. 우리 같은 파티가 많을 테니까.”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모를까, 지금은 정말 많은 이들이 아빌리우스를 향해 몰려가고 있다.
이유야 당연히 용사의 제전을 구경하기 위해서였고, 그들 중에는 에단 이상의 실력자도 꽤 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타모에 숲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에는 길을 돌파하기 위한 파티가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심지어 파티를 모으는 이는, 경험이 부족한 아이른 파레이라마저 알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가엘 와이즈? 와이즈 상단주의 아들?”
대륙의 모든 부를 한 손에 쥐었다고 알려진, 거부 토비 와이즈의 장남.
엘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 엘프(Half Elf).
이것만으로도 모두의 뇌리에 남기에 충분하지만, 그가 대단한 것은 배경뿐만이 아니었다.
선한 영향력.
가난한 이들을 위해 곡식을 제공하고, 배우지 못한 이들을 위해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최근에는 악마와 싸우는 영웅들을 위해 무기와 방어구까지 몹시 저렴한 가격에 지원하고 있었다.
그전에도 인간과 소수종족 사이의 분쟁 해결에 힘쓰는 등, 좋은 일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능력도 대단하다고 들었어. 다른 상단들이 놀랄 정도로 퍼주는데도, 오히려 예전보다 재산이 더 불어났다고.’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부모님이 부러워할 만한,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아들.
그런 이가 인원을 모으고 있다니 마음이 놓였다. 불카누스 역시 고개를 끄덕여 그의 생각에 동의했다.
“…….”
“…….”
헌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이른이 일행의 얼굴을 살폈다.
에단, 조반니, 키난 레예스, 그리고 쟈린.
앞의 셋도 표정이 별로였지만, 마지막이 가장 좋지 않았다.
덩달아 얼굴이 굳은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니, 별거 없어.”
쟈린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기껏해야 일주일 정도인데, 별일이야 있겠어?”
* * *
“진짜 같이 안 가요?”
“그래, 이 자식아. 몇 번 말해야 알아들어? 거기 갈 시간에 수련이나 하는 게 나한테는 이득이다.”
“아니, 제자가 말이야, 어? 세상 사람들 전부가 지켜보는 검투 대회에서 활약 좀 하겠다는데, 그거 봐줄 여유도 없어요?”
“없어, 없어. 그런 거 다 챙겼으면 내가 이 자리까지 왔겠냐? 이안 발뒤꿈치나 핥고 있었겠지.”
“…….”
“왜, 뭐.”
“하아, 알았으니까 응원이나 한마디 해 줘요.”
“장하다, 주디스. 이그넷이든, 아이른이든, 브랫이든 모조리 도륙 내고 오거라.”
“에휴…… 다녀오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주디스가 쿤의 거처를 떠났다. 뒤를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잠깐의 외출일 뿐이니까. 다시 돌아와 지겹도록 볼 얼굴인데, 질척거릴 것까진 없지 않나.
‘……그래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서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참았다. 저 영감탱이의 고집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다.
에휴, 한숨을 쉰 그녀가 빠르게 북동쪽을 향해 달려갔다.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멀어지는 제자를 쿤은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웨엑!”
피를 쏟아냈다.
“하아, 하아, 후…….”
몸이 좋지 않았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최근에는 더 좋지 않았다.
병인지, 수명 때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서 끝낼 수 없다는 것이 중요했다.
‘살고 싶다.’
쿤이 검을 들었다.
그리고 휘둘렀다. 끊임없이, 계속해서 휘둘렀다. 여태까지의 열망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베고, 긋고, 찔러 갔다.
예로부터 내려온 전설이 있다.
엑스퍼트를 넘고, 마스터를 넘고. 그리하여 검으로 닿을 수 있는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면, 새로운 육신을 얻을 수 있다고.
늙고 병든 몸뚱이로부터 탈피하여 또 한 번의 기회를 거머쥘 수 있다고.
‘예전에는 믿지 않았지만…….’
이제는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그럴 이유가 있었다.
물론 방법은 모른다.
이안은 25세에 도달했던 마스터의 경지조차, 70세의 늦은 나이에 도달했던 자신이 아닌가.
하지만…….
‘언제는 내가 알고 도전했나.’
하하하, 웃음을 터뜨린 쿤이 또다시 검을 휘둘렀다.
몰라도 한다. 알 때까지, 닿을 때까지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그것이 그를 여기까지 달려오게 한 원동력이었다.
“…….”
그렇듯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르던 쿤이,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봤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림자에 파묻힌 듯 어두운 느낌의 복장. 가면이라도 쓴 듯 딱딱하게 굳어 있는 얼굴. 잿빛인지 은빛인지 잘 구별이 되지 않는 휘날리는 머리카락.
……낯선 인물이다.
그런데도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쿤은 자신의 형편없는 기억력을 탓하다가, 이내 포기하고는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온 상대에게 물었다.
“우리 만난 적 있나?”
“…….”
“말을 못 하나?”
“…….”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어린놈의 새끼가 건방진 태도하고는.”
쿤의 입에서 끊임없이 비아냥이 쏟아졌다.
평범한 이라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질 정도로 저급한, 3대 검사의 위엄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언사였다.
허나 신경 쓰지 않았다.
스르릉, 사내가 검을 뽑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태연히 자세를 잡고, 우묵한 눈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다.
“후배 칼 린…… 칼이, 쿤 선배님께 한 수 배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