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무수히 많은 (2)
앞서도 언급했지만, 대중은 엘리트의 보장된 성공보다 밑바닥 출신의 인생역전 스토리를 더욱 좋아한다.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이야기가 대륙 전체에 빠르게 퍼졌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
녀를 차세대 최강의 자리로 올려놓은 것은 검술 실력이지만, 유명세 측면에서는 이러한 배경 역시 큰 몫을 했다.
아이른 파레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귀족 출신, 허나 오랫동안 괄시와 무시를 당해 왔던 유년 시절을 극복하고 증명의 땅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심지어 상대는 대륙 최고의 엘리트라 할 수 있는 5대 검술명가의 천재, 일리아 린제이였다.
거기에다 모두가 죽고 못 사는 로맨스가 곁들여지고, 수석 기자 힌츠를 필두로 수많은 기자가 관련 기사들을 쏟아냈다.
가십거리에 목말랐던 이들은 아이른이 가문에 복귀한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의 이야기를 쏟아냈고, 궁금해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사칭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또 하나의 아이른 사칭을 마주한 모험가 파티의 리더, 에단이 미소를 머금었다.
대륙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던 그의 행적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고위 귀족들에 비해 따라 해도 뒤탈이 적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이른 파레이라는 유독 사칭이 많았다.
지금은 조금 시들하지만, 1년 전만 해도 20대, 금발, 잘생긴 외모의 용병들이 너도나도 자신을 아이른이라고 소개했었다.
몇몇 진지한 녀석들은 어디서 검은 고양이까지 데려오기도 했다.
물론 사람 말을 할 수는 없기에 금방 들통이 났지만.
‘그래도, 이제까지 봤던 녀석들과 비교하면 꽤 괜찮은 느낌이긴 하네.’
그가 금발의 청년을 바라봤다.
햇살이 내려앉은 듯 따사로운 금발, 흰 피부, 선해 보이는 외모와 거칠지 않은 말투.
최근 봤던 아이른 파레이라 중 가장 오리지널에 가깝기는 했다.
심지어 용병패의 디테일도 상당했다.
알칸트라는 크로노 검술관이 있는 곳이니, 정보 수집에 꽤 진심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봐, 젊은 친구. 아무리 다른 부분을 잘 따라 했어도, 고양이가 없으면 안 되는 거잖아.”
“예? 고양이?”
“그래! 요술 고양이, 루루! 검은 고양이도 없이 아이른이라고 하고 다니면 누가 믿겠어?”
“에이, 없는 게 낫지 않나? 있어 봤자 말 시키면 바로 들통나잖아.”
“그거야 뭐, 그렇긴 하지만…….”
“으음, 그건 뭐 어떻게 둘러댈 방법이 없으려나?”
“…….”
아이른이 멍한 표정으로 모험가들을 쳐다봤다.
질문에 대한 답은 들을 생각도 없이, 자기들끼리 ‘어떻게 해야 더 오리지널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에 대해 토론하는 세 남자.
그리고 이 상황 자체가 피곤하다는 듯한 엘프 여성.
‘기분이 뭔가…… 뭔가 좀 그런데.’
정체가 탄로 나지 않은 건 다행이다. 저렇게 알아서 착각해 준다면 환영해야 마땅하다.
헌데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칭이 그렇게까지 많아졌다는 부분?
그것도 그렇지만, 자신이 진짜일 거로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도 약간은 섭섭했다.
“저기…….”
“응?”
“왜 그러나, 젊은 친구?”
“그, 루루는, 요즘 요술 수련에 집중하고 있어서…….”
“…….”
“…….”
“그래서, 같이 안 다니고 있는 겁니다.”
타닥, 탁
정적.
고요.
몹시 무거운 침묵이 주변에 내려앉았다.
파티의 리더인 에단도, 신나게 말을 쏟아내던 이들도, 엘프도, 누구도 말이 없었다.
오로지 모닥불 타는 소리만이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물론 영원히 그러고 있지는 않았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드워프 불카누스가 나직이 말했다.
“아이른의 말대로다. 저 녀석은 진짜 아이른 파레이라고, 나는 더 멋진 넘버링 소드를 만들어 주기 위해 세상 공부에 나선 불카누스다.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 불카누스.”
“……풉.”
“푸, 크흐, 푸흐흐…… 푸흐흫헣!”
“흐흐헣, 아니, 이 양반들, 유머 감각이 아주 대단하시구만. 아아, 그렇지! 아이른 그 친구, 넘버링 소드의 주인이라는 소문도 있었지?”
“맞아. 들은 적이 있어. 요술대검과 넘버링 소드, 두 검을 번갈아 사용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래? 나는 요술대검이 대장장이의 도움을 받아 만든 검이라는 쪽으로 알고 있었는데.”
“둘 다 틀렸다. 나는 아직 아이른 녀석의 검을 만들어 주지 못했어. 요술대검보다 더 뛰어난 검을 만들기 위해 수행 중이거든.”
“그렇군요!”
“와, 그것까진 미처 몰랐습니다.”
“모를 수밖에 없지. 나는 사람들하고 교류가 적은 편이니까.”
“와, 이 청년도 나쁘지 않지만, 드워프 양반 쪽이 더 대단한데?”
“그러니까. 연기력이 아주 훌륭하십니다.”
장단을 맞춰 주던 모험가들이 감탄을 토해 냈다.
들킬 것이 뻔한 요술 고양이는 배제한 채, 대장장이 불카누스 흉내를 내며 컨셉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라니!
그야말로 지금까지 봤던 사칭들 중에 가장 훌륭했다.
딱히 나쁘게 보이지도 않았다.
이를 통해 무언가 이득을 취하려 했다면 모를까, 빵빵 터지는 농담거리로만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기가 막힌 수준의 농담으로!
“이거 안 되겠군. 이렇게 재밌는 자리에 술을 빼놓을 수는 없지.”
“이야, 에단! 아끼는 술 꺼냈는데?”
“이 자식이, 나 쪼잔한 사람 만들면 넌 안 준다?”
“형님, 잘못했습니다.”
“흠, 술맛이 괜찮다면 이따가 자네 검 좀 봐주지.”
“아이고! 감사합니다, 불칸 씨.”
“불칸이 아니라 불카누스. 이쪽도 아론이 아니라 아이른.”
“아, 맞다. 죄송합니다. 착각하지 않도록 유의하겠습니다.”
“…….”
자기들끼리 신나서 술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며, 아이른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미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자신은 가짜 아이른 파레이라가 되었고, 불카누스도 가짜 불카누스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들이 딱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니, 한 명은 아닌가.’
아이른이 엘프를 힐끗 쳐다봤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뭇가지로 모닥불만 뒤적이고 있는 모습.
‘……그래도 별문제는 없겠지.’
시선을 돌린 아이른이 웃었다.
이내 자신을 놓아 버린 그 역시 모험가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증명의 땅에 가기 전, 101번째 검사와 함께 수련했던 이야기부터 해 드릴까요?”
* * *
‘같이 다닐 필요까지 있어?’
‘그럼 같이 안 다닐 이유는 있냐? 너 딱히 낯 가리는 성격도 아니잖아?’
‘남을 사칭이나 하고 다니는 녀석들을 뭘 믿고?’
‘아니, 너도 봤으니까 알 거 아니야. 딱히 나쁜 의도로 그런 것도 아니잖아. 그냥 농담하려고 컨셉 잡고 다니는 여행가들이잖아?’
‘그건…….’
‘그리고 알잖아. 요즘은 대륙 중부도 남부나 서부에 뒤지지 않게 위험해. 내가 볼 때 저 양반들, 요즘 여행길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그냥 용사의 제전이 보고 싶어서 영지 바깥으로 처음 나와 본 것 같은데, 저 상태로 몬스터라도 잘못 만나면 그냥 가는 거야. 너, 저 사람들 객사하는 거 보고 싶어?’
‘…….’
‘어차피 목적지도 같은데, 같이 가자. 알았지? 혹시 중간에 문제 생기거나, 이상한 느낌 들면 그때는 바로 쫓아낼게.’
“쳇.”
모험가 파티의 엘프 마법사, 쟈린은 지금의 동행이 편치 않았다.
에단의 말이야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100퍼센트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단순히 농담거리로만 써먹을 거였다면 그리 정교한 위조 용병패를 갖고 다니지는 않았을 거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긴 하지만, 속은 모르는 거니까.’
조금 경계할 필요는 있겠어.
물론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자신은 어중이떠중이에게 뒤통수를 맞을 정도로 만만한 엘프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드 엑스퍼트인 에단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두 명도 은 등급의 용병패를 소지했을 정도로 훌륭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너무 걱정이 심한 걸지도.’
힐끔.
쟈린이 금발의 청년을 바라봤다.
체격은 훌륭하다.
컨셉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진짜 아이른이 쓸 법한 대검을 등에 메고 다니는데, 무게가 상당할 텐데도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허나 약간의 독기도 없어 보이는 순한 외모를 보고 있자면, 저 녀석이 누군가를 등쳐먹을 만큼 경험이 많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어리바리하게 있어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 주고 그래야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스트레스일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런 걱정은 자칭 아이른과 동행한 지 사흘이 지난 시점에서는 대부분 사라졌다.
“여기는 와 본 적이 있어요. 카탄의 식탁이라는 곳이 음식 맛이 괜찮은데, 괜찮으시면 거기로 갈까요?”
“마른 장작 좀 주워 오겠습니다.”
“저녁은 제가 할게요.”
“……?”
미숙한 느낌이 거의 없었다.
물론 도시에서야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중부 태생이라면 남부 위주에서 활동했던 그들에 비해 아는 게 많은 게 당연할 테니.
허나 도시 밖, 그러니까 길거리 노숙을 할 때조차 알아서 자신의 역할을 찾고, 파티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음식의 맛도 꽤 좋았다. 파티의 요리 담당인 조반니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적지 않은 걱정을 품고 한입 삼켰던 에단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이야, 뭐야? 이렇게 잘할 줄은 몰랐는데? 따로 배우기라도 한 거야?”
“예. 한 2년 전부터 조금씩요.”
“조금 한 수준이 아닌데? 따로 향신료 챙겨 다닐 정도면 열심히 한 거 아니야?”
“열심히 하긴 했어요. 맛있게 먹어 주는 사람이 있어서요.”
“누구?”
“일리아요.”
“일리아? 아…… 푸흡! 아니, 풉, 크흐헣…… 아니, 먹는 와중에 그런 농담을 하면 어떻게 해? 다 흘렸네, 이거.”
“농담 아닙니다. 여기 한 그릇 더 드릴게요. 아, 쟈린 씨도 드릴까요?”
“……난 됐어.”
은은한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는 가짜 아이른을 보며, 쟈린이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 파티의 발목을 잡지 않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뻔뻔하게 튀어나오는 저 농담은 불편했다.
아예 재미가 없다면 모를까, 가끔 생각지도 못할 타이밍에 튀어나와 웃음을 참기 힘들어서 더 그랬다.
‘저런 농담을 어떻게 저리 정색하고 할 수 있지?’
여러모로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였다.
쫑긋, 쟈린의 귀가 움직였다. 표정을 굳힌 그녀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조명 마법을 쏘아 올렸다.
그러자 그림자로부터 저주받은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켈레톤(Skeleton).
죽었기에 움직일 수 없어야 마땅한, 허나 마기(魔氣)로 인해 안식을 얻지 못하고 이승을 배회하는 마물이다.
예전에는 거의 없었으나 최근의 흉흉한 대륙에서는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녀석들이기도 했다.
‘이 자식들이. 밥도 다 못 먹었는데…….’
슈욱-
슉, 슈욱, 슈욱-
쟈린이 지팡이를 휘둘러 화염 구슬 네 개를 만들어 냈다. 다른 이들은 그녀보다 빨랐다.
어느새 앞으로 돌격하는 파티원들의 얼굴에는 긴장 하나 엿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마물이라고는 하나, 스켈레톤의 전투력은 그리 높지 않다.
엑스퍼트까지 낀 베테랑 전력이 동요할 상황은 절대로 아니었다.
문제는 최근에 합류한 둘이었다.
몬스터와는 질적으로 다른 마물 특유의 부정적인 기운.
이에 익숙지 않은 이들이 돌발 행동을 벌이는 것을 여럿 봐 왔다. 쟈린 한줄기 걱정을 품고 뒤쪽을 쳐다봤고.
“…….”
드워프 양반 혼자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나도 긴장감 없는 분위기에 그녀가 뭐라 소리치려는 순간이었다.
콰드드득-!
엘프 마법사의 고개가 재차 돌아갔다. 이번에는 전방이었다. 신나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 파티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퍽!
퍼억!
퍼걱-!
한 번에 한 마리.
검을 잘 모르는 그녀조차 놀랄 정도로 깔끔하고 절도있게 마물을 처리한다. 사칭범의 이야기였다.
그런 그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여전히 일어날 생각을 않는 드워프가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뭘 놀라? 그럼 마스터가 저 정도도 못 할까?”
쟈린은 할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