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무수히 많은 (1)
“같이 가자, 신성왕국.”
“…….”
“왜, 불만이냐?”
“아뇨. 그게 아니라…….”
불카누스의 말을 들은 아이른 파레이라가 말을 흐렸다.
솔직히 의외였다.
그는 그다지 활동적인 드워프가 아니었다.
꼭 필요한 일이 있을 때가 아니면 온종일 대장간에만 있는, 게다가 2년 전의 일이 있고 나서는 그러한 성향이 더욱 심해졌다.
그런 불카누스가 아빌리우스로 가는 여정에 함께하고 싶다니, 의아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소드마스터들이 수십 명이나 모이는 흔치 않은 기회니까, 그들을 보고 영감이라도 얻으려는 걸까?’
그런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라면 꼭 자신과 같이 갈 필요가 없다. 아이른은 오랜만에 세상 구경을 할 겸 유유자적 도보로 움직일 계획이었으니까.
그런 귀찮은 짓을 감당하느니, 나중에 키릴과 함께 그리핀을 타고 이동하는 게 훨씬 편할 터였다.
혹시, 세상을 통해 성장했다는 자신의 말에 영향이라도 받은 걸까?
이를 떠올린 아이른이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외골수에 더해 고집불통인 그가 그럴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헌데, 의외로 그게 맞았다.
“너 따라서 세상 경험도 하고, 이런저런 녀석들과 부딪히고 그러면서 나를 돌아볼 계획이다.”
“…….”
“네 영향을 받은 게 맞다. 나이는 훨씬 어리지만, 너는 충분히 보고 배울 만한 녀석이니까. 이참에 네 방식대로 움직여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
“이 자식, 왜 말이 없어? 표정은 또 뭐야?”
“아니, 그게…….”
아이른의 표정이 더욱 당혹스럽게 물들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남에게도 몹시 깐깐한 기준을 들이미는 불카누스다.
그런 그가 자신의 방식을 미뤄 둔 채 타인의 길을 따르고, 상대의 본받을 점을 순순히 인정하기까지 한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실제로 옆에서 보조를 담당하던 도제 하나가 넋이 나간 모습으로 스승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불카누스는 동요하지 않았다.
“뭐,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네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타입이라는 것을.
그것은 타고난 성격 때문이기도 했고, 자신의 분야에서 정점을 찍었다는 데서 온 자부심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 어떤 대단한 녀석이더라도, 강대국의 왕이나 대륙의 3대 검사쯤 되는 이가 오더라도 자신이 숙이고 들어가는 일은 없을 거로 생각했었다.
남을 칭찬하는 것 역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아이른 파레이라의 대단한 점이었다.
그런 자신조차도, 깐깐하고 성질 더럽기 그지없는 드워프 장인조차도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드는 선하고 순한 영향력.
많은 이들은 아이른의 검술 재능에 더 주목하겠지만……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대장장이 불카누스는 생각했다.
“솔직하게 말하마. 고맙다. 내게 많은 영감을 준 것도, 나만의 좁은 장소에서 벗어나 넓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해 준 것도. 네가 아니라면 무리였을 거다. 그래서 말인데, 그 대가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이참에 재능 기부 좀 할 생각이다.”
“예?”
“용사의 제전에 참가하는 모든 이들. 악마와 마인 토벌을 위해 힘쓰는 검사 전원에게…… 넘버링 소드에 준하는 무기를 지원하마.”
“…….”
“내 이름으로 하는 게 아니야. 아이른 파레이라, 네 이름으로, 네 뜻을 받아서 하는 일이야. 참고로 거절은 거절하니까 허튼소리 하지 마라.”
“어, 어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도제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이젠 입에서 영혼이라도 빠져나갈 듯 위태로운 모습.
그럴 만도 한 것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스승의 자부심이 얼마나 큰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불카누스 본인조차도 이 말을 꺼내기까지는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2년의 시간 동안 더욱 높아진 실력, 그에 따라 더욱 깐깐해진 검의 주인을 고르는 기준.
그것들을 전부 무시한 채, 많은 이에게 자신의 작품들을 제공하는 것은 원래의 그였다면 어림도 없는 일일 터.
그렇다.
이 모든 것은 아이른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함이었다.
남들은 허무맹랑하다고 비웃을 꿈을 위해 노력하는 영웅을 후원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의지가 조금 더 넓게, 조금 더 널리 대륙에 퍼질 수 있도록 응원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마음을 느꼈음인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이내 은은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요.”
“…….”
“지금껏 받았던 그 어떤 것보다도 값진 선물을 받은 기분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 정도로 감사한 표정은 아닌 것 같은데.”
불카누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좋아하는 인간이지만,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더욱 훌륭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런 담담한 모습을 볼 때마다 애늙은이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애늙은이조차 아니었다. 이건 숫제 몇십 년 묵은 고위 사제와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하긴, 이 녀석에게 20대 청춘의 발랄함, 풋풋함을 바라는 건 무리겠지.’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불카누스는 꾹 참았다.
대신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용건을 입에 담았다.
“아, 그리고 말이지. 일리아 린제이의 검이 완성됐…….”
“예? 진짜로요? 정말입니까?”
“…….”
“그, 저, 볼 수 있을까요? 아니, 일리아가 먼저 보기도 전에 내가 먼저 보는 건 그런가? 아, 하지만 궁금한데. 으으, 그래도 참는 게 맞나? 어쩌지? 음, 아…….”
“…….”
“그런데, 검의 품질은 어떤가요? 훌륭하겠죠? 아니, 물론 불카누스 씨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뭐냐, 어…… 그러니까, 아니 그게…… 으음, 왜 이렇게 말이 정리가 안 되지?”
“……됐어. 그만 말해.”
불카누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도제 역시 슬금슬금 고개를 저었다.
조용히 시선을 교환한 둘이, 동시에 생각했다.
‘그래, 이런 녀석이었지.’
‘맞아, 이런 분이셨지.’
다른 모든 면에서는 담담하고 초연한, 그야말로 수십 년 마음 수련을 이어 온 구도자 같은 태도를 보이면서도.
자신의 연인과 관련된 일에서는 순식간에 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그런 사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만들었으니, 앞으로 더 물어보지 마.”
“음, 예. 아니, 하지만…….”
“닥쳐.”
“예…….”
“네 검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안 궁금하냐?”
“딱히…….”
“…….”
“…….”
“그만 얘기하지.”
고개를 돌린 불카누스가, 싸늘하게 축객령을 내뱉었다.
* * *
대장간을 찾아가고 열흘 뒤, 아이른 파레이라는 신성왕국으로 향하는 여정을 떠났다.
일행은 불카누스가 전부였다.
원래도 가문 차원에서 대규모로 이동할 생각은 없었고, 키릴은 세자르 공국에 일이 있었다.
아마 가족들은 용사의 제전이 열리기 직전, 그리핀을 타고 움직일 생각인 듯싶었다.
게다가, 원래 함께 가기로 했던 루루마저 이탈했다.
“미안! 요즘 요술 수련이 잘 되는 와중이라. 영지에 남고 싶어.”
“미안하기는. 편할 대로 해.”
“응! 나중에 키릴이랑 따라갈 테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마! 그때 멋진 모습 보여 줘!”
2년간의 여정을 마친 이후로 꽤 독립적으로 변한 루루였다.
예전과 달리 말수도 조금 줄어들고, 혼자만의 상념에 잠겨 있는 때가 잦아졌다.
그러한 모습이 오래도록 이어지니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봐도 시원하게 대답을 해 주지 않아 더욱 그러했다.
‘괜찮을 거야.’
허나 큰 걱정은 아니었다.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서로를 향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음을. 요술사라서가 아니라 가장 친한 친구기에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괜찮았다. 정말로 큰 문제가 있다면 말을 해 줄 터였다.
실제로 혼자서 감당키 힘든 일이 생긴다면 기대겠다고, 의지하겠다고 약속을 받아 내기도 했고.
‘어쨌든, 빨리 기운 차렸으면 좋겠다.’
그러한 생각을 품은 채, 아이른 파레이라는 영지를 떠나 대륙으로 나아갔다.
“오랜만이네요.”
“나도 오랜만이다.”
“힘들면 말하세요. 말이라도 빌리게.”
“나를 무슨 노인네로 아는군. 몬스터가 나와도 끄떡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라.”
불카누스가 팔을 굽혀 알통을 만들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아이른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대장장이 일로 단련된 그라면 웬만한 풋내기 용병보다 훨씬 실력 좋을 게 분명했다.
등에 걸려 있는 전투 망치도 장식품이 아니었다.
그렇게 둘은 도보 여행을 시작했고,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예전과 분위기가 다르네요.”
“그러냐?”
“예, 확실히…….”
지나쳐 온 도시, 마을 주민들의 표정이나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 역시 예전보다 어두워 보이긴 했지만, 그저 착각일 수도 있으니까.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는 부적절했다.
허나 이전보다 훨씬 많아진,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몬스터는 확실한 증거였다.
지금의 세상은, 전보다 확실히 어둠에 가까워져 있었다.
“이래서는 소상인들은 죄다 위축된 상태겠어.”
“예. 아무래도 용병들을 더 많이 고용해야 할 테니…… 소규모 여행자들도 많이 줄었다고 들었습니다. 위험하니까요.”
물론 그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웬만한 용병쯤은 맨손으로 접어 버릴 수 있는 근육질의 드워프.
그리고 그런 드워프가 수백이나 달려들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인간 검사.
그들에게 있어서 그 어떤 존재가 위협으로 느껴질까?
예전에 패퇴하여 도망간 광대 악마쯤은 나타나야 긴장감이 생길 터였다.
덕분에 늦은 밤, 마을이 아닌 노상에서 야영을 준비함에도 그들의 얼굴에는 아무런 걱정도 없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뒤늦게 모닥불의 불빛을 발견하고 다가온 모험가 파티가 그러했다.
“아니, 이런 위험한 시기에 둘이서 노숙을…….”
“…….”
“아, 이런. 우린 위험한 사람 아닙니다. 그저 불빛이 보이기에 반가운 마음에 왔는데, 단촐한 인원에 조금 걱정이 되어서…….”
“에단, 소개부터 해.”
“아아, 이런. 죄송합니다. 여기…… 정말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모조품 같진 않은데, 꽤 대단한 양반이군.”
상대의 용병패를 확인한 불카누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빈말이 아니었다. 금패. 물론 통짜 금이 아니라 금박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재물로서의 가치보다는 신분과 실력 증명 수단으로서의 가치가 더욱 컸으니까.
어느 강대국을 가더라도 능히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는 이들만이 금패를 받을 수 있었다. 실적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 말은, 이 에단이라 불리는 인물이 엑스퍼트 급의 실력과 베테랑의 신용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뜻이었다.
비로소 경계심을 푼 불카누스가 자신을 소개했다.
“보다시피 드워프다. 이름은 불칸.”
“아, 그렇군요. 혹시 대장장이 일을…….”
“모든 드워프가 대장간 일을 한다는 편견은 좋지 않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이라 할 말은 없군. 그래도 조심해.”
“아, 이거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유념하겠습니다. 어이, 너희들도 자기소개들 하라고.”
“음, 어. 오랜만에 하는 거라 어색한데? 하하…….”
넉살 좋게 모닥불 주위로 앉는 세 명의 인간과 한 명의 엘프.
그들은 자연스레 신분을 증명할 만한 물건을 보여 주며 소개에 나섰다. 불카누스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장인의 눈으로도 위조한 부분을 찾을 수 없었으니, 전부 믿을 만한 이들일 터였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자연스레 아이른 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소개를 하지 않은 것은 그뿐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마찬가지로 용병패를 꺼내보였다. 동시에 이름을 말했다.
“반갑습니다. 아이른 파레이라라고 합…….”
그리고, 말을 마치기 전에 자신의 실수를 눈치챘다.
‘이런, 가명을 쓰기로 했었지.’
불카누스도 그렇지만, 최근 아이른 파레이라의 유명세는 굉장한 수준이었다.
20대 초반에 마스터가 된 것도 그렇지만, 일리아 린제이와의 관계 덕분에 더 뜨거워졌다.
둘의 관계는 이제 아단 왕국을 넘어 대륙 전체가 알고 있을 정도로 널리 퍼진 상태였다.
거기에 더해 어렸을 때 나태 공자로 불리며 많은 이들에게 무시를 당했었다는 사실까지 더해지자, 남녀노소와 신분을 막론하고 그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많아졌다.
예부터 그랬다. 엘리트 코스를 착실히 밟아 나가는 이보다, 밑바닥에서 시련과 역경을 이겨 내고 정상에 오르는 이에게 더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는 법이다.
문제는, 이러한 유명세 때문에 정체를 대놓고 드러내면 여유로운 여정을 이어 갈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아이른 대신 아론이라는 이름을 쓰기로 한 것은, 불카누스가 자신을 불칸이라고 소개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용병패도 다른 걸 냈어야 했는데, 알칸트라에서 만든 은패를 그대로 내보였네…….’
아이른이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됐다. 허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눈이 휘둥그레진 이들의 입에서 여러 질문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자네, 저, 정말로 아이른 파레이라인가?”
“그 소문의…… 맞나?”
“21살에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증명의 땅에서 린제이 가의 천재를 꺾은, 바로 그?”
“어, 으음…… 예.”
결국, 아이른은 솔직하게 자신의 정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거짓말을 잘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분위기에서 시치미를 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헌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푸, 푸흡, 푸하하하하!”
“크큭…… 아니, 이거 뭔데.”
“와…… 자네, 진짜 연기 잘하는군. 내가 만났던 아이른 파레이라 중에서 최고인데?”
“예?”
“머리색도 똑같고, 용병패도 정교하고…… 이야, 꽤 공을 많이 들였어?”
“어? 어어…….”
생각지도 못한 모험가 파티의 반응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아이른 파레이라.
그런 그를 조용히 지켜보며, 불카누스가 고개를 저었다.
‘안 믿는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