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나무를 키우기 위해 (2)
“허허, 그럼 가 볼까.”
아이른 파레이라와 조우하고 하루 뒤.
비교적 이른 시간 만에 두 성기사는 영지를 떠났다.
일이 바빠서는 아니었다. 변명은 그렇게 하긴 했지만, 사실은 그를 배려한 것이다.
아이른이 용사의 제전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수련 시간을 뺏지 않기 위해 빠르게 사라져 주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렇다.
바람대로, 파레이라의 젊은 영웅은 참가를 결정했다.
스승이 이처럼 즐거운 모습을 보이는 건 그러한 이유 덕분이었다.
‘정말로 행복해 보이시는군.’
아마 예전이라면, 스승의 이런 모습에 언짢은 감정만 품었을 터였다.
그 녀석이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
얼마나 잘난 녀석이기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먼 길을 온 것도 모자라, 며칠 쉬지도 못하고 곧바로 돌아가냐고 툴툴댔을지도 모른다.
허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이른의 검을 본 순간 깨달았고.
그와 대화를 나누며 확신했다.
석 달 만에 다시금 검을 든 스승님의 모습을 보면서는 조금이지만 눈물마저 흘렸다.
미소 지은 그가 마부에게 말했다.
“출발하게. 흔들리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고.”
“예, 나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하, 게랄드. 괜찮다. 정말로 괜찮아. 그렇게까지 배려해 주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정말이야. 올해 중에 가장 상태가 좋구나. 마음 같아서는 풍경을 즐기며 도보로 움직이고 싶어.”
물론 그러지는 못했다.
여독이 쌓인 탓일까, 정화단의 노인은 순식간에 잠에 빠졌다.
마차의 약한 진동이 그의 몸을 흔들었지만, 깰 정도는 아니었기에 게랄드는 가만히 있었다.
대신 행복한 표정의 스승을 지켜보며 상념에 빠졌다.
이그넷 크레센시아.
아이른 파레이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 둘을 비교하던 그가, 흠칫 놀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내가…….’
두 사람을, 함께 떠올린 건가.
* * *
후웅-
후우웅-!
신성왕국의 성기사들이 자신을 찾아온 뒤, 아이른 파레이라는 지금까지보다 조금 더 검에 매진했다.
그간 수련을 놓고 있었던 건 절대 아니지만, 오행신공에 더욱 치중했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기왕 출전하기로 한 거, 잘하고 싶으니까.’
그러고 보니, 아이젠마르크트에서도 이와 비슷한 행사에 참가했던 적이 있었지.
잠시 과거를 떠올리던 그의 생각이 이번에는 일주일 전의 만남으로 흘렀다.
사실, 그들이 찾아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용사의 제전에 참가할 생각이 없었던 아이른이었다.
굳이 나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대륙 전체에 이름을 알리고, 자신의 명성을 만방에 떨칠 기회?
그런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딱히 관심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급격히 높아진 명성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여전히 넘고 싶은 벽인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만날 기회?
그 역시 문제가 아니었다. 조금 건방진 말이지만, 자신이 원한다면 그녀는 언제든 대련에 응해 올 터였다.
꼭 특별한 날과 특별한 무대를 받아 놓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나마 신경 쓰이는 부분이라면, 용사의 제전의 취지가 자신의 신념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었는데.
‘나 말고도 마스터가 스물이 넘게 나온다는데, 그만하면 충분한 거 아닌가.’
자신의 참가로 인해 메시지가 더욱 진해진다면, 참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는 했다.
허나 이미 훌륭한 검사들이 많이 출전할 예정이었다. 빈자리 하나쯤은 티도 나지 않을 정도로 쟁쟁한 인물들이.
그렇다면 조금 더 오행신공에 매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무에 집중하여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것이, 2년 전 퀸시 마이어스에게 양해를 구했듯 자신을 가꿀 시간을 가지는 것이 조금 더 나은 선택이지 않을까?
그것이 현재 아이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허나 그러한 생각은, 잠시 못 본 사이 안쓰러울 정도로 왜소해진 정화단 노기사에 의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형한 눈빛만은 여전한, 무명의 영웅에 의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자네는 비범하네.’
‘네?’
‘바보가 아니니 이미 알고 있겠지. 적지 않은 명성을 얻었으니 달라붙는 이들도 많을 테고,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꿀 같은 말도 계속해서 들었을 테고. 그 맛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도 많이 했을 거야. 자만은 나태를 낳고, 나태는 영웅을 망가뜨리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러지 말게. 애써 자신을 낮출 필요는 없어.’
‘…….’
‘자네가 자기를 얼마나 높게 생각하든, 자네는 그것보다도 훨씬 대단한 사람이니까 말이야.’
‘저기…….’
‘아, 변명할 필요 없네. 그냥 입 다물고 있어.’
‘…….’
‘아니, 말로 할 필요 없겠군. 그냥 따라오게.’
‘예? 어디를…….’
‘연무장. 검으로 보여 주지. 내가 자네에게 느낀 것. 자네에게 받은 것. 자네가…… 대륙에 전할 수 있는 것.’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다.
말을 마친 노기사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응접실을 나와 연무장을 걸어간다. 그 모습이 굉장히 불안하게만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노인은 더는 소드마스터가 아니었으니까.
죽을 날을 받아 놓은 듯, 무너져 내린 육신을 오러로 겨우 떠받치고 있는 위태로운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가 연무장에 도착해 검을 휘두르는 순간.
명백히 자신에게 영향받은, 자신의 검에 대한 대답을 검으로 표현한 순간.
더는 노인을 만류할 수도, 염려할 수도, 그의 말을 부정할 수도 없게 되었다.
“희망을 주는 검.”
그랬다.
노기사는 희망을 말하고 있었다. 자신의 검을 통해 행복을 느끼고 있었고, 미래를 노래하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검술이 얼마나 정교한지, 누가 얼마나 강한지를 말하는 수준을 넘어선 대답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다소 추상적으로 느껴지던 대회의 목적과 의도.
그리고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던, 자신의 검이 가진 힘.
‘……후자는 좀 많이 민망하긴 하네.’
세상을 위한 검을 들겠다고 생각했고, 그를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 다짐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를 시간이 지날수록 깨닫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가벼이 입을 열었던 예전과는 달랐다.
지금의 아이른은, 조금 더 차분하고 단단한 마음으로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와중이었다.
‘낯선 실력자들과의 검투는 분명 즐거운 일이고, 관중들이 보내는 함성과 열기의 짜릿함도 모르는 건 아니야. 경쟁이 자신 없는 것도 아니고, 패배하더라도 좌절하지 않을 자신도 있어.’
이런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의지가 서지 않았던 건, 그의 이상이 대회의 정점보다 더욱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제는 이야기가 다르다.
자신을 보고, 자신의 검을 보고 다시금 기운을 차린 정화단의 노기사처럼…… 다른 이들이 조금이라도 힘을 낼 수 있다면.
그로 인해 자신이 세운 뜻을,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펼칠 수 있다면. 용사의 제전이 검술이 아니라 신념을 펼치는 장이 된다면.
‘조금 미숙하더라도, 용기를 내는 게 맞겠지.’
“좋아. 다시 해 볼까?”
상념에서 깨어난 아이른이 강하게 검을 쥐었다.
그리고 지금껏 익혀 왔던 모든 것을 마음껏 선보였다.
뜻이 얼마나 높건, 신념이 얼마나 거창하건, 그것을 외적으로 펼쳐 내는 수단은 검술이었으니까. 절대 허투루 할 수 없었다.
후웅
후우웅
검을 휘둘렀다.
끊임없이, 쉬지 않고 휘둘렀다.
크로노 검술관에서 배운 기초와, 제트 프로스트를 만나 더해진 중검의 묘리.
존 드류에게서 배운 마음가짐과 수 싸움.
이그넷으로부터 배운 마음의 검.
정화단으로부터 배운 신성왕국의 검.
린제이 가주에게 두들겨 맞으며 체득한 것과, 친구들로부터 영감을 받은 여러 가지 것들.
마지막으로 강철의 검에서 시작하여 나무의 기운으로 끝나는…….
아니, 또 한 번의 순환을 시작하는 오행신공(五行神功).
놀랍게도, 성취가 있었다.
이는 수련을 시작한 아이른 파레이라, 본인조차 놀랄 정도로 빠른 진전이었다.
허나 당연했다.
일 년, 아니 그보다 더 긴 흐름 속에서 기운을 키워 왔던 그였다.
마음속에 자라난 나무처럼, 아주 약간의 계기만 있어도 위로 솟아오를 준비가 된 셈.
노기사의 방문은 마치 성장의 촉매제와 같은 역할을 했다.
게다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이른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일이, 그 뒤에도 연이어 벌어졌다.
“공자님, 편지입니다.”
“누구? 아…….”
[높은 곳에서 보자. - 브랫 로이드 -]
[신성왕국에서 봐. 그리고 지켜봐. 내가 다 쥐어패고 우승할 거니까. - 주디스 - ]
사이 좋은 커플 아니랄까 봐, 같은 날 비슷한 시각에 도착한 짧은 내용의 서신.
아이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브랫도 얼굴을 마주한 지 6개월이 넘은 것 같지만, 무엇보다 주디스가 그리웠다.
재작년 초에 있던 대련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얼마나 강해졌을지, 기대도 되고.’
아이른의 마음속에 불꽃이 피어났다.
최근 엄청나게 발전한 브랫과, 2년 전에도 심상치 않은 성장의 조짐을 보였던 주디스.
그들과 대련이 아닌 정식 검투를 벌일 생각을 하니 마음이 설렜다.
용사의 제전의 취지와 별개로도 가슴이 뜨거워졌다. 왜 참가할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허나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자극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연인인 일리아 린제이로부터의 서신이었다.
“…….”
편지의 내용은 길지 않았다.
딱히 대단할 것도 없었다. 주디스, 브랫과 마찬가지로 용사의 제전에서 보자는 말.
그리고 평소와 같은, 건조한 듯하면서도 진하게 느껴지는 일리아 특유의 애정 표현.
아이른은 이를 몇 번이고 읽어 내린 뒤, 소중히 품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더욱 열심히,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지금까지 보다도 더욱 열정적으로 검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으음, 사랑이란 좋은 거야.”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던 루루가, 이를 지켜보다 낮잠에 빠졌다.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직접 시중을 드는 마르쿠스 역시 은은한 미소로 자신의 도련님을 바라봤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신성왕국 아빌리우스로 떠나기까지 열흘 정도를 남긴 시점.
“파레이라 공자님.”
“응?”
“수련 중에, 대장장이 양반이 잠시 뵙기를 청했었습니다.”
“그래? 불카누스 씨 말하는 거지?”
“그렇습니다. 급한 일은 아니니 한가해 보일 때 다시 오겠다고 했습니다만…….”
점심 식사를 위해 연무장을 떠나려는 아이른 파레이라에게, 마르쿠스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불카누스를 본 지도 꽤 오래됐다.
같은 영지에 살고 있긴 하지만, 그가 자신의 요술대검을 본 뒤로 내내 대장간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째 자꾸 기다리게만 하는 것 같네.’
멋쩍게 뒤통수를 긁은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기다릴 필요 없이 그냥 내가 가야겠다.”
“알겠습니다.”
마르쿠스가 예를 표하고 물러났고, 그는 간단히 식사와 샤워, 환복을 마친 뒤 대장간을 찾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대장장이들은 열심히 작업을 이어 가고 있었다.
불카누스도 똑같았다.
깡
깡, 깡!
웃통을 벗은 채, 누가 왔는지조차 모르고 연신 단조를 이어 가던 그가 입을 연 것은, 아이른이 오고 30분이 지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