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나무를 키우기 위해 (1)
악마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이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지난 2년간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던 마인과, 숨어 있던 악마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흘러나간 소문을 전부 비밀에 부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민중은 160년 만에 찾아온 위기 속에서 두려움에 떨었다.
활발했던 상행이 감소하고, 비교적 치안이 좋았던 대륙 서부와 중부 간의 교류도 크게 위축되었다.
물론 상황이 최악인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악마들이 끔찍하다곤 해도, 신성왕국의 성기사단과 사제단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지!”
“암! 그렇고말고. 게다가 아빌리우스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지! 룬텔 왕국도 있고, 서부 5왕국도 있고. 검술관의 전력도 예전하고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하잖아?”
“그렇지! 이젠 소드마스터가 100명이 아니라 200명 가까이 있다며?”
사람들의 말대로였다. 지금의 인간계는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훌륭한 전력을 보유한 상태였다.
160년의 평화 동안 해이해지기는커녕 단단히 힘을 키워 왔던 신성왕국 아빌리우스.
폐쇄적이긴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큰 힘을 축적했으리라 예상되는 마법왕국 룬텔.
5대 검술명가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 서부 왕국들과, 대륙 전체의 전력을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검술관 문화까지.
해 볼 만했다.
아니, 확실한 우세였다. 적어도 대륙에 명성이 자자한 3대 검사, 10대 검사들이 살아 있는 동안은 분명히 그럴 터였다.
게다가…….
“그거 들었어?”
“뭘? 아…… 그, 용사의 제전?”
“그래. 아빌리우스에서 개최한 검투 대회! 듣기로는 소드마스터가 스물 가까이 참가한다는데? 아닌가? 더 많다고 했나?”
“나도 들었어. 기존에 알려진 이들 말고도, 강한 검사들이 무지하게 많다더군.”
“나이도 다들 젊다던데, 참 다행이야.”
“그렇지. 사실 조금 걱정되긴 했잖아? 마스터 양반들, 특히 3대 검사니 5대 검술가주니 하는 양반들. 죄다 오늘내일하는 나이니까…… 좋은 일이지. 그 사람들이 세상 떠난 뒤에도, 든든하게 받쳐 줄 유망주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거잖아?”
“그럼, 그럼.”
“애초에 참가자들의 실력에 자신이 있으니까 이런 일도 추진한 거겠지. 그 뭐야. 소문으로는, 크레센시아 백작의 수준이 벌써…….”
“남부의 소드마스터들도 상당하다는 얘기가…….”
악마들을 추살하고 다녀도 바쁠 시간에, 왜 구태여 이런 쓸데없는 행사를 여느냐고 불만을 토하는 이도 없진 않았다.
허나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이 소식에 화색을 보였다.
이안 검술관주와 신성왕국이 걱정했던 고민.
대륙을 떠받칠 거인들의 수명에 대한 염려를, 그로 인해 찾아올 불안한 미래를 대중들 역시 똑같이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젊은 강자들, 마스터치고 젊은 나이인 60세 미만의 검사들을 전면으로 내세운 이번 검투 대회는 정말 많은 이들로부터 기대와 관심을 받았다.
그야말로 모든 이에게 ‘희망’을 전하는 행사.
그로 인해 대륙에 팽배한 악마에 대한 두려움을 지워 내는 것이야말로, 마계의 문을 좁히는 것이야말로 아빌리우스가 원하는 미래였다.
* * *
“출전하시겠지?”
“당연하지. 소영주님만큼 어울리는 인재도 없잖아?”
“맞지! 명색이 ‘대륙의 미래’들을 선보이는 자리인데, 파레이라 도련님이 빠지면 안 되지. 젊고, 재능 넘치고!”
“기왕이면 우승했으면 좋겠구만!”
“하하, 이 사람아. 아무리 그래도 우승은 힘들지. 젊은 마스터들이라고는 해도 죄다 40대, 50대일 텐데…… 도련님보다 두 배는 더 살았을 양반들이라고?”
“힘들긴 하지. 이그넷 크레센시아 백작도 있고.”
“하긴, 흑기사단장의 실력을 자랑하기 위해 개최한 검투 대회라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니까…… 뭐,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긴 해.”
“그럼, 그럼! 우리 도련님은 천재 중의 천재라고!”
“하하하, 오랜만에 옳은 소리 하는구만! 자, 마시자고!”
다소 우울했던 대륙의 분위기를 바꿔 놓은, 신성왕국에서 개최한 용사의 제전.
번화한 도시부터 변방 촌구석까지 모두가 그 얘기로 화제였지만, 이곳 파레이라 영지만큼 뜨거운 분위기인 곳도 얼마 없을 터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그넷과 함께 대륙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망주가 바로 아이른 파레이라였으니, 기대를 없앨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부디 도련님께서 좋은 성적을 거두길.
대륙 만방에 파레이라 영지를 알리고, 용사가 되어 돌아오기를.
마인과 악마 따위는 범접할 수도 없는 위엄을 쌓아 돌아오기를. 영지민 모두가 간절히 바라고 원했다.
그렇다.
이러한 분위기는 당연한 거였다. 여관의 구석에서 민심을 파악하던 적기사단원, 게랄드 모우저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기분은 좋지 못했다.
그가 방에서 곤히 자고 있을 스승을 떠올리며,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었다.
‘중요한 인물이라는 건 알지만…….’
‘대륙의 미래’를 선보인다는 대회의 취지쯤은, 그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것이다.
아직도 초대장에 답을 하지 않은 건 아이른 파레이라가 유일했으니까.
문제는, 그런 그의 지지부진한 태도 때문에 몸이 편찮으신 스승이 먼길을 오게 되었다는 점이다.
후우, 게랄드 모우저가 한숨을 쉬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왕국의 비밀 전력인 ‘정화단’에 소속될 정도로 정정했던 분이지만, 지금의 스승은 그렇지 못했다.
갑자기 찾아온 노화는 그를 엑스퍼트만도 못한 존재로 만들었다. 어쩌면 용사의 제전이 마무리되기 전에 돌아가실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고집을 부렸다.
어떻게든 아이른 파레이라를 출전시켜야 한다고, 자신의 비루해진 몸 상태를 동정표로 써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그것이야말로 신의 품으로 돌아가기 전, 자신이 마지막으로 수행해야 할 일이라고.
파레이라 영지를 찾아온 것은 그 때문이었다.
고된 여정 내내 스승을 보살피고, 나아가 스승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힘쓰는 것.
허나 그로서는 내내 감정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들었던 말이 옳다.’
게랄드 모우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술에 취해 떠들었던 말.
신성왕국은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세상에 자랑하기 위해,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대회를 개최했다는 발언.
그것은 사실이었다. 적어도 아빌리우스 성기사단의 일원인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도 작년에 있었던 백기사단장과 흑기사단장의 대련을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올랐다.
보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샘솟고, 찬란한 미래가 그려질 정도로.
그렇다.
다른 이들이 쓸모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다.
대륙의 분위기를 바꾸는 데는 크레센시아 백작 하나면 충분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2층에서 스승이 내려왔다.
“스승님!”
“허허, 이 녀석아. 뭘 그렇게 놀래?”
“아니, 더 쉬시지 않고 왜…….”
“안 되겠다. 잠이 안 와. 그냥 지금 가는 편이 낫겠다.”
“하지만…….”
게랄드 모우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아였던 자신을 거둬 업어 키우다시피 한 게 바로 스승이었다. 스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아버지에 더 가까운 존재였다.
그런 그가 여전히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대륙을 위해 힘쓰는 것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이른 파레이라에 대한 생각도 더욱 깊어졌다.
“알겠습니다. 채비를 하겠습니다.”
“흘흘, 출전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 걸까? 큰 사정이 아니었으면 싶은데…….”
“……별일 없을 겁니다. 스승님께서 직접 찾아오셨는데, 무조건 참가하겠죠.”
스승을 바라보며, 게랄드 모우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참가하고 말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른이 스승의 기대를 충족시킬 만큼 훌륭한 모습을 보이느냐, 충분한 성장을 거뒀느냐. 바로 그 부분이었다.
‘부디 그러기를.’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린 성기사 둘은 영주관에 방문할 채비를 갖췄다.
* * *
연무장의 중앙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은 아이른 파레이라.
허나 그가 보는 풍경은 암흑이 아닌, 10년 동안 가꾼 자신만의 세상이었다.
언제나와 같은 풍경.
언제나와 같은 분위기.
언제나와 같은 그리움.
마치 예전에 자주 있었던 꿈속 풍경을 보는 듯했다.
허나 그때처럼 영원히 변치 않고, 영원히 같은 시간 축에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어느새 드높이 자라난 나무.
아니, 자신의 신념을 바라보며 아이른이 생각했다.
‘나무가 자라난 건, 뜻밖의 행운이었지.’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가슴 속에 박힌 쇠말뚝을 다스리기 위해 떠났던 여정이다. 그저 그것뿐이었고, 그마저도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고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헌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꽃이 생기고.
그 불꽃을 다스리기 위한 물줄기가 생겼다. 이를 품을 대지의 마음도, 뒤이어 따라왔다.
그렇다.
넓고 단단한 땅이 생기고, 그 사이로 물이 스며들어 비옥한 토지로 거듭난 것은.
거기에 따스한 햇볕이 더해져 나무가 자랄 환경이 갖추어진 것은…….
의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우연에 의한 행운이라 보는 것이 옳을 터였다.
‘물론…… 그러한 행운만 믿고 아무것도 안 해서야, 말이 안 되지.’
앉아서 나무를 올려다보던 아이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쇠말뚝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것은 더는 쇠말뚝이 아니었다.
가열되고 단조되어 날붙이의 형태를 띤, 능히 명검이라 부를 수 있는 것.
그가 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꼭 맞는 크기로 줄어든 검이 손으로 날아들었다.
잠시 그 자태를 살펴보던 아이른이 싱긋 웃은 뒤, 위로 날아올라 검을 휘둘렀다.
서걱
석, 서걱, 서걱-
나무가 올곧게 자라기 위해서는.
바르고 훌륭하게 신념을 키우기 위해서는, 환경도 중요하지만 끊임없는 노력을 동반해야 한다.
지금의 아이른이 그러했다.
끊임없이 흐르는 물, 단단한 지반, 따사로운 햇살은 나무가 크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요소였지만, 무분별하게 뻗어 나가는 가지까지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것을 통제하는 것은 아이른의 역할이었다.
그가 처음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금기(金氣)의, 철검의 역할이었다.
휘익
휙-
휘익!
아이른이 무아지경에 빠져 검을 휘둘렀다.
계속해서 휘둘렀다. 나뭇가지를 베어 나갔다.
현실의 그 역시 더는 연무장에 앉아 있지 않았다. 어느새 일어선 그의 손에도 마음속의 철검과 같이, 요술대검이 단단하게 쥐어져 있었다.
……그런 그가 인기척을 느낀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가량이 지난 후.
“…….”
“…….”
비로소 눈을 뜬 아이른 파레이라.
그의 눈에 들어온 이는, 두 명의 성기사였다.
개중 한 명은 아는 얼굴이었고, 다른 한 명은 아니었다. 허나 둘 모두 비슷한 표정으로, 비슷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어진 눈시울.
감정의 요동을 느낀 파레이라의 소영주가, 손님들께 조심스레 제안했다.
“……차라도 한 잔, 하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