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84화 (284/388)

◈ 92. 브랫 로이드의 소원 (3)

엘사 콜린스.

고작 19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사교계에서 그녀를 무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우아한 분위기는 그 자체로 무기였고, 왕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가문의 재력 역시 남들은 갖기 힘든 배경이었다.

말솜씨가 좋은 데다가 추종자들을 잘 부릴 줄 알고, 성격이 독한 면도 있다 보니 백작 이상의 고위 가문에서도 그녀와 맞서는 것을 꺼릴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그러한 요소들은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기 싸움? 말다툼?

그런 장난 같은 것이 아니었다.

자기 앞에 고열을 내뿜고 있는, 시뻘겋게 달궈진 금속 덩어리를 보며…… 엘사 콜린스는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공포를 느꼈다.

“……!”

“……!”

추종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녀들을 호위하기 위해 뒤를 따르던 호위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소 10년 이상 검을 수련한 자들이기에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여자가 손에 두르고 있는 기운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오러의 발현.

소드마스터가 뿜어낸 것처럼 단단하게 뭉쳐 있지 않고 아지랑이처럼 흩날렸지만, 그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드러났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엑스퍼트는 당연하고, 그중에서도 최고 경지에 올랐다고 봐야 했다.

‘주디스…… 크로노 검술관 출신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증명의 땅에서 활약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평민의 인생역전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들의 과장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과장은커녕, 오히려 소문이 실제보다 못했다.

화산을 마주한 듯 무시무시한 압박 속에서, 그 누구도 주디스를 막지 못했다.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붉은 마녀의 손아귀에 목줄이 쥐어진 상태였다.

헌데…….

후우욱

“가라.”

“……?”

주디스가 기세를 거두었다.

휙, 손에 들고 있던 호랑이 꼬리도 집어 던졌다.

완전히 오러를 갈무리한 그녀가 재차 엘사 콜린스에게, 추종자들에게, 주변의 호위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다 꺼지라고. 나 제대로 성질내기 전에.”

“…….”

“…….”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레이디고, 기사고 가릴 것 없었다. 그 성질 고약한 엘사 콜린스마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겁에 질려 사라졌다.

평생토록 잊지 못할 공포!

그것을 몸속 깊이 새겨넣은 채, 얕은 수작을 부렸던 이들 모두가 떠나갔다. 목적지는 무도회장이 아닌 각자의 가문이었다.

이런 일을 겪고도 파티를 즐길 만큼 정신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고.’

주디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허나 분명한 건, 자신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꽈악 주먹을 움켜쥔 주디스가 레이디들이 사라진 문 쪽을 바라봤다.

그때, 뒤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

꽤 오래 상대를 노려보던 주디스가 뒤늦게 예를 표했다.

그런 사람이 있다.

검을 수련하지도, 마법을 익히지도, 요술을 깨우치지도 않았는데…….

그야말로 무력으로만 따지면 손가락 하나만으로 상대할 수 있는 상대인데도, 무시할 수 없는 사람.

눈앞의 사람이 그랬다.

자신의 눈빛을 보고도 아무런 동요 없이, 화사한 웃음을 보이는 단아한 드레스 차림의 레이디.

‘방금 일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까지 성질을 낼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살갑게 무언가를 할 것도 아니었다.

“예, 안녕하세요. 그럼 이만…….”

짤막하게 인사한 주디스가 몸을 돌렸다.

피곤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도.

그녀가 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무시했던 귀족 영애들이 사라졌던 바로 그 방향이었다.

브랫에겐 미안하지만,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소원을 들어주지 못한 것은 미안하지만, 나중에 사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죄송하지만, 이렇게 가 버리시면 안 되는데요. 배상을 해 주셔야죠.”

“……?”

다시 신형을 돌린 주디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그 시간은 짧지 않았다.

레이디가 손으로 가리킨 쪽.

정확히는 자신이 훼손한…… 이제는 꼬리가 없어진 호랑이 쪽을 확인한 순간, 주디스는 상대의 정체가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혹시…….”

“예, 제 거예요.”

“…….”

“소개가 늦었네요. 클랜시 공작가의 여식, 릴리아나 클랜시입니다.”

“저는, 주, 주디스, 인데요. 그, 음…….”

주디스가 더듬거리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또다시 평민임을 밝혀야 한다는 부담감.

집주인의 재산을 훼손한 것에 대한 미안함.

거기에 더해 왜 자신이 이러한 상황에 처해야 하는지, 그에 대한 짜증.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섞여 바보 같은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제대로 생각도 나지 않았다.

괜찮았다.

참새처럼 가벼운 걸음걸이로 다가온 공작 영애, 릴리아나 클랜시가 말했다.

“잠깐의 담소.”

“…….”

“그거면 배상으로 충분한데…… 잠깐 시간 괜찮아요?”

주디스로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 * *

“그니까요! 웃기는 녀석 맞죠. 그 자식이 얼마나 황당한 자식인데, 하…… 자기 왕국에서는 그렇게 가식을 떨었다고요?”

“음, 가식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람의 행동은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다를 수 있는 거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으으, 진짜 짜증 나네! 아아아악!”

릴리아나 클랜시와의 대화는, 엘사 콜린스와 달리 굉장히 편안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시작은 다를 것 없었다. 자신은 잘 모르는 무도회의 분위기와 약간의 교양이 필요한 화젯거리.

그런데도 훨씬 더 말을 주고받는 것이 수월했고, 마음을 열기도 쉬웠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다 보니 이렇게 브랫 이야기까지 먼저 꺼낼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런데 불편해.’

그러나, 주디스의 마음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릴리아나 영애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절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공작 가의 영애라는 높은 위치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배려하는, 또 이해해 주는 모습.

자신의 더러운 성격과는 완전히 다른 훌륭한 인품이었다.

그렇다.

바로 그 점이 문제였다.

‘귀족들의 세계에서는…… 선한 사람도, 쓰레기 같은 사람도 나와 완전히 다르구나.’

정말로 그랬다.

자신을 은근하게 돌려 까고 망신을 줬던 엘사 콜린스의 모습은, 자신과 달랐다.

자신을 상냥하게 배려하고 챙겨 주는 릴리아나 클랜시의 모습 역시, 자신과 달랐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무도회장에 모인 모든 이들이 자신과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다른 출생.

다른 환경.

그로 인해 지금까지 쌓여 온, 서로 다른 정서와 사고방식.

……그야말로 귀족적인,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상.

‘어쩌면 브랫과 나 역시, 함께할 수 없는 거 아닐까?’

갑작스러운 생각은 아니었다.

브랫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전부터, 연인으로 맺어지기 전부터 하던 생각.

다만 그것이 더 깊어지기 전에 상대가 밀고 들어왔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이에 대해 또다시 고민할 타이밍이 찾아왔다.

주디스의 표정이 조금씩, 조금씩 굳어 갔다.

“주디스?”

그런 그녀의 분위기를 클랜시 영애 역시 파악했다.

사실, 지금 막 깨달은 것도 아니었다.

조금씩 줄어드는 말수.

어두워지는 표정, 뭔가 신경 쓰이는 듯한 눈빛.

상대의 감정에 민감한, 또 상황 파악이 빠른 릴리아나였기에 알 수 있었다.

상대가 어딘가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고. 그것이 비단 자신만의 잘못은 아닌 것 같다고.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여기까지 생각하는데, 잠시 침묵했던 주디스가 멋쩍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저, 역시 가 봐야겠어요.”

“응? 그게 무슨…….”

“아무래도 여기는 제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아서요. 그 뭐냐, 사람들도 저랑 좀 잘 안 맞고. 분위기도 그렇고. 아! 그, 뭐야, 그러니까 여기 흉을 보는 의도로 말한 건 절대 아니고요, 제가 여기에 끼기에는 좀…… 교양도 부족하고, 배운 것도 없고. 그렇다는 의미였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

“어, 그러니까…… 실례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꾸벅, 주디스가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다. 브랫이 자신을 골탕 먹이기 위해, 괴롭히기 위해 여기에 초대한 것은 아니라는 걸.

허나 이번 일로 알았다.

녀석과 자신이 함께하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 마지막으로…… 죄송하지만, 브랫한테 말 한마디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조금 힘들어서,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다고.”

“…….”

“그…… 실례 많았습니다. 아, 방금 말했지. 하여튼, 호랑이 꼬리도 그냥 넘어가 주셔서 고마웠어요. 그럼…….”

“무도회장에 파트너와 함께 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요?”

할 말을 하고 떠나려는데, 클랜시 영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디스는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솔직히 궁금했다.

하지만 곧바로 돌아서는 것이 민망했기에, 그냥 그대로 서 있었다. 다행히 상대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별거 없어요.”

“…….”

“예전이라면 장래를 약속한 사이 정도는 되어야 함께 무도회장에 참가했지만, 지금은 아주 자유로워졌죠. 살짝만 호감을 품더라도, 혹은 서로 파트너가 궁해 일회성으로 함께 하는 경우도 일반적이니까요.”

“그, 그렇죠. 그런 거에 큰 의미를 부여할 리가…….”

“하지만 오랜 전통을 이어 가고자 하는 사람도, 아예 없지는 않아요.”

“…….”

“물론 브랫 로이드가 그런 사람인지까지는 저도 잘 모르지만요. 아, 마침 저기 오네요.”

“네?”

주디스가 깜짝 놀라 옆을 돌아봤다.

정말로 그랬다. 저 멀리서 브랫 로이드가 다가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일반인보다 늦게 알아차렸다는 것보다, 그냥 그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이 강하게 인식됐다.

“주디스.”

“브랫.”

“하아, 잠깐 바람이나 쐬고 오는 줄 알았더니. 왜 안 들어왔…… 어?”

“뭐, 뭐야.”

“아니. 왠지 아까보다 더 예뻐 보여서.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퍼억

“컥, 크흡…… 잠깐, 진짜 세게, 아니, 장난이 아니라 너무 아픈데?”

“닥쳐. 조용히 해.”

“뭐지? 예쁜 걸 예쁘다고 한 것도 잘못인가?”

“아, 그만하라고.”

퍽, 퍼억, 퍽!

주디스의 자비 없는 손길이 연인을 두드렸다. 브랫은 과장 섞인 목소리로, 그러면서도 진중한 표정으로 이를 받았다.

그 모습을 클랜시 영애가 웃으며 지켜봤다.

그제야 깐족거림을 멈춘 그가 우아한 자세로 예를 표했다.

“제 모자란 연인과 시간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자라긴. 너무 좋은 분인걸.”

“제 눈엔 그렇습니다만, 다른 이들은 그리 생각 안 하는 경우가 많아서…….”

“조용히 좀 하라고…….”

“으윽. 아무튼, 공녀님께서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공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브랫이 한 번 더 예를 표했다.

그리하여, 천천히 멀어지는 푸르고 붉은 머리 한 쌍.

그 와중에도 말다툼을 멈추지 않는 둘을 클랜시 영애가 한참이나 바라봤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그녀의 입에서 쓸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시, 내가 이기는 건 무리겠네.”

아니, 이미 알고 있기는 했다. 그렇기에 그런 말을 했던 거기도 하고.

하지만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자신으로서는 스며들 수 없는 둘만의 분위기를 보고 있자니…….

“……이젠 그만 생각해야지.”

세차게, 허나 우아하게. 두어 번 고개를 흔든 릴리아나 클랜시가 반대편 하늘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바람이 찼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 * *

브랫 로이드와의 짧은 데이트를 마친 뒤, 주디스는 더욱 치열하게 수련에 임했다.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것 하나 놓지 말라는 스승의 조언도.

자신과의 미래를 그리는 듯한 브랫의 태도도, 자신으로서는 조금 벅찼다.

‘나는…… 내가 그럴 수 있겠다는 확신이 없는데.’

검의 최고가 될 거라는 자신감, 아니 독기와 깡은 있었다.

허나 딱 거기까지였다.

누군가와 행복한 미래를 함께한다는 것.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최강의 검사가 되는 것보다 더 자신 없는 일이었다.

혼자 노력해서 되는 일이 아니니까. 무언가 함께 해나가야 하는 거니까.

‘……나처럼 이기적이고 성격 나쁜 녀석이, 그런 게 가능할까.’

생소할 정도로 진하게 느껴지는 자격지심.

그런 자신을 과분할 정도로 믿고, 사랑해주는 스승과 연인, 그리고 친구들.

비겁한 말이지만, 주디스는 그것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부족하다고 생각했기에.

검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자신이 그들보다 많이 못났다고 생각했기에.

그녀가 검에 더욱 매진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해결하기 어려운 고민과 고뇌, 생각으로부터의…… 회피.

“젠장!”

주디스가 화를 터뜨렸다.

알고 있었다. 이게 옳은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예전에 아이른에게 들었던 그의 과거처럼, 비겁하고 용기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허나 아직은 어려웠다. 그런 생각들과 마주하기 힘들었고, 그렇기에 비교적 쉬운 검으로의 도피를 선택했다.

물론 그냥 도망만 간 것은 아니었다.

못난 자신에 대한 분노.

그것마저 불꽃의 연료로 사용한 주디스는 뜨겁게, 더욱 뜨겁게 검을 휘둘렀고. 그렇게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갔다. 계절이 바뀌었다.

“음? 이건…….”

그런 그녀의 앞으로 날아온 서신 한 통.

그것은 아이른 파레이라가 받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용사의 제전.

바야흐로, 증명의 땅보다도 치열한 증명의 장이 열리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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