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브랫 로이드의 소원 (2)
무도회의 막이 올랐다.
오랜만에 열린 클랜시 공작가의 파티이니만큼 많은 이들이 참가했다.
밝은 표정으로 음악과 술을, 춤과 분위기를 즐기는 청춘들. 그런 그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는 중년인들.
그들 대부분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로이드 백작가의 장자인 브랫 로이드였다.
“브랫 로이드가 무도회에 온 게 얼마 만이지?”
“1년 정도 전에 본 것 같긴 한데…… 자주 오는 편은 아니긴 하죠.”
“그렇지. 이런 쪽에 관심이 많은 청년이었으면 마스터에 오르지도 못했겠지. 그런 젊은 나이에…….”
“그래도 할 건 다 하고 다녔던 거 같은데 말입니다.”
중년 귀족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의 시선에 누가 있는지를 확인한 다른 이 역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긴, 아무리 바빠도 연애 사업은 해야지. 젊을 때는 그래야 해.”
“맞습니다.”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 역시 대부분 비슷했다.
왕국의 위신을 세울 정도로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청년이 연애 좀 하겠다는데, 그걸 안 좋게 바라볼 이는 거의 없었다.
물론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브랫 로이드가 아닌 그의 상대를 향한 곱지 않은 시선이었다.
“누구야, 저거?”
최근 사교계에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아름다운 레이디, 엘사 콜린스가 눈을 치켜떴다.
처음 브랫 로이드의 모습을 봤을 때는 기분이 좋았다.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 없어 실망하던 차에, 왕국 최고의 검술 천재로 알려진 그의 등장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허나 그것도 잠시, 로이드 소영주의 옆에 웬 듣도 보도 못한 여자가 함께하고 있는 것을 보자마자 엘사 콜린스의 기분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붉은 머리칼, 큰 키…… 누구지? 저런 여자가 왕국에 있었나?’
아닌 것 같았다. 거베라 왕국은 물론이고, 인접 국가에서 견제의 대상이 될 만한 이들은 전부 머릿속에 담아 둔 그녀였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여자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혹시, 대륙 중부가 아니라 다른 곳 출신인가?
그럴 가능성이 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술 수행을 위해 꽤 오래 대륙을 돌아다녔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그 사이에 인연이 맺어졌을 수도.
여기까지 생각한 엘사 콜린스가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질투와 시기, 짜증과 분노가 술기운과 섞여 더욱 고조되었다.
그렇게 브랫 로이드와 의문의 여성을 지켜보길 30분.
짜증 가득했던 그녀의 표정이 또다시 변했다.
이해하기 힘든, 다른 무도회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 계속해서 벌어졌던 탓이다.
‘뭐야, 저거?’
춤이 어설픈 거야 그럴 수 있다곤 생각했다. 사실 엄청 못 추는 것도 아니었다.
곡의 해석이 엉망이었을 뿐이지, 동작 자체는 기사가 군무를 추듯 정확했으니까.
하지만 손으로 입조차 가리지 않고 하품을 한다거나.
입안에 음식이 남아 있는 상태로 수다를 떤다거나.
그 밖에 여러 교양 없는 행동이 반복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무도회에 처음 와 보는 사람이라고 해도 저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이건 마치…….
‘그냥 길에서 평민 하나 데려온 것 같은 느낌인데?’
그런 생각을 이어 갈 때였다.
호위기사 하나가 조용히 곁으로 다가왔다. 보고를 위해서였다.
엘사 콜린스는 불청객의 존재를 인지한 순간 정체를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다행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1분의 시간이 지나고.
비로소 상대의 정체를 파악한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하, 진짜 평민이었잖아?”
“저기, 아가씨. 평민이긴 하지만, 크로노 검술관의 정식 수련생…….”
호위기사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날카롭게 쏘아지는 레이디의 시선에 곧바로 눈을 내리깔았고, 조용히 물러갔다.
엘사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자신이 평민에게 밀렸다는 생각에 속이 부글부글 끓는 와중이었다.
“……흥.”
한 시간이 흘렀다.
엘사 콜린스의 시선은 여전히 브랫과 주디스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몇몇 남성들이 정중히 춤을 권했지만, 전부 거절했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엔 저 평민 여자에게 어떻게 망신을 줄 것인지, 그에 관한 생각으로만 가득 찬 상태였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왔다.
둘이 떨어졌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로이드 소영주가 다른 곳으로 움직였고, 주디스는 혼자 남아 주변을 돌아봤다.
그러다가 멍한 표정으로 비스킷 하나를 집어 먹었다.
‘아그작 아그작 소리 내면서 먹는 것 봐. 꼴불견이네.’
자신의 속마음을 읽었음인가?
과자를 해치운 평민 여자가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무도회장 출구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산책이라도 하러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엘사 콜린스가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평소 함께 다니던 레이디들 역시 바쁘게 뒤를 따랐다.
* * *
“……나,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비스킷을 주워 먹던 주디스가 문득 중얼거렸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훑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붉은 드레스.
목에 걸려 있는 아름다운 장신구.
코끝을 은은하게 맴도는 향수 냄새.
어느 것 하나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특히 이 장소, 그리고 이 장소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그러했다.
물 한 잔을 마시면서도 귀족적인 미소를 잃지 않는 그들을 보며, 주디스는 일종의 자격지심을 느꼈다.
자신이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잠깐 밖에 나가자. 바람이라도 쐬자.’
주디스가 무도회장의 문을 나선 건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말을 걸어 왔다.
“산책할 장소를 찾고 계신가요?”
“아? 네, 조금 더워서…….”
“그렇군요. 그쪽은 공개되지 않은 곳이라 헛걸음을 하실 거예요.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길 안내를 해도 될까요? 아름다운 정원으로 모실게요.”
“아…… 어…… 그, 그래요.”
주디스는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긴장되는 와중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클랜시 공작가의 사람인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어떻게 내부 구조를 알고 있지? 많이 와 봤나?
하긴, 여리여리한 모습에 우아한 분위기를 보니까 이런 데 익숙한 사람인 것 같은데.
‘……지금 내 모습은 어떻게 보이지?’
엄청 촌놈처럼 보이려나?
나름 브랫 녀석 체면 안 상하게 하려고 노력하긴 했는데…….
생각을 이어 가던 주디스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왠지 모르게 기분만 더러워지는.
그냥 다른 쪽으로 사고의 흐름을 바꾸자.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한 발짝 앞서 움직이는 레이디를 보며, 정확히는 레이디의 다리를 보며 생각했다.
‘엄청 얇네. 로우킥 차면 똑 부러질 것 같다.’
“…….”
무도회에 어울리는 상념은 아닌 것 같았다.
주디스는 생각하기를 멈춘 채, 그냥 뇌를 비운 상태로 레이디의 뒤를 따라가기로 했다.
허나 그럴 수 없었다.
조금씩 속도를 늦춘 금발의 여인이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물었다.
“무도회는 처음이신가 봐요?”
“어…… 그렇죠.”
조금 불편했다. 솔직히 말해 혼자 있고 싶었다.
허나 웃는 얼굴에, 그것도 선의로 길 안내를 자청한 이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천둥벌거숭이 같았던 어릴 때라면 모를까, 이제는 자신도 배려라는 것을 할 줄 안다.
먼저 시비를 거는 개 같은 녀석들만 아니라면 예의를 갖춰야 한다.
크로노 검술관에서 배운 가치 있는 것 중 하나였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적극적으로 대화를 이끌어가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럴 수 없었다.
귀족.
레이디.
검은커녕 물조차 손에 대지 않고 살아왔을 것 같은 가녀린 여성.
그야말로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사는 듯한 인물.
그런 존재와 마음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리 없었다.
건네는 이야기가 무도회와 파티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조금씩 흘러나오는 정치, 경제, 문화와 예술에 관한 화제와 맞닥뜨릴 때마다 주디스는 삐질삐질 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궁했다. 할 말이 너무 없었다.
차라리 술집에서 시비 거는 용병 녀석들 상대하는 게 더 편하겠어.
그런 마음과 동시에, 그녀의 가슴에 부정적인 생각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게, 이 여자와 나 사이의 일이 아니라…….’
브랫과 자신 사이의 일이구나.
우리 둘, 생각보다 훨씬 더 다른 세상을 살고 있구나.
여태까지 느끼지 못했던, 고민조차 해 보지 않았던 부분.
허나 인지한 이상 굉장히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부분.
이에 주디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가는데, 레이디의 입에서 무시할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아직까지도 제 소개를 안 하고 있었네요. 미안해요.”
“아, 괜찮…….”
“저는 콜린스 자작가의 2녀, 엘사 콜린스예요. 들어 보셨죠? 향수로 유명한 콜린스 가문이랍니다.”
“아아…….”
“참고로 그쪽이 뿌린 향수도 우리 가문의 상품이에요.”
“어? 그건…….”
“아, 모르셨구나.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래도…….”
“그것보다, 저도 이제 알고 싶은데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던 엘사 콜린스가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신형을 돌려 주디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통성명을 바라는 질문.
아니.
어느 가문인지, 어떤 계급인지를 돌려서 묻는 질문.
어째선지 의도가 곧바로 파악되었다.
주디스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고민이 떠올랐다.
‘어떡하지.’
자신이 평민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운가?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항상 그렇게 생각해 왔다.
대륙의 분위기 자체도 그러했다.
몇백 년 전이라면 모를까, 최근의 흐름은 능력만 있다면 태생 따위 별 의미가 없다는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신이 없었다. 정말 혼란스럽게도, 당차게 자기를 소개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이유는 이미 알고 있어.’
강대국의 고위 귀족, 브랫 로이드.
빈민가의 고아 출신, 주디스.
둘의 능력은 비슷할지언정, 살아왔던 세상과 그로 인한 정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쌓여 온 분위기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새삼스레 커다란 차이를 느낀 그녀가, 여전히 복잡한 얼굴로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알긴 아나 보네, 부끄러운 거.”
“……?”
“맞잖아. 말할 성이 없으니까 이야기 못 하는 거고. 그 말은 너도 네가 부끄럽다는 거고…….”
“…….”
“아니야?”
주디스가 멍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다른 사람이었다.
이제까지의 온화했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황당할 정도로 표독스러워진 엘사 콜린스의 모습.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아닐걸요?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었다면, 무도회장에서 그렇게 천박하게 있진 않았겠죠.”
“그러니까요. 보는 사람이 다 민망할 정도로 막 헤집고 다니던데.”
“그런가?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평민은 어쩔 수 없죠.”
어느새 주변에 모여든 레이디들이 엘사 콜린스의 곁에 달라붙었다.
주변에 사람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허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바람을 쐬는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그게 아니었다.
이 녀석들은, 애초에 자신을 놀리고 모욕할 생각으로 여기까지 따라왔던 모양이었다.
“아, 참. 길 안내는 여기까지랍니다. 저기 보이시나요, 주디스 양?”
엘사 콜린스가 우아한 손동작으로 한 쪽을 가리켰다.
문이었다.
공작가의 밖으로 이어진 통로.
이에 또다시 멍한 표정을 짓는 주디스에게, 그녀가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있는 건 꽤 고역이죠. 어때요? 괜히 분수에도 안 맞는 귀족들의 사교장에 버티고 있느니, 드레스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그것이야말로, 당신을 위한 참된 조언이 아닐까요?
……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엘사 콜린스는 끝까지 입을 열지 못했다.
휙 하고 몸을 돌린 주디스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기 때문이다.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레이디들이 웃었다.
비천한 출신 주제에 자존심만 강하다고. 온갖 있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서 흉보고, 물어뜯고, 씹어댔다.
그들 모두가 입을 다물게 된 건, 주디스가 웬 동상 앞에 멈춰 섰을 때였다.
꽈드득!
“……!”
“……!”
“……!”
호랑이를 형상화한 기념물은 우아하면서도 단단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철을 통째로 부어 만든 것이 무를 리가 없었다.
허나 불의 오러를 끌어올린 주디스에게는 별 차이 없었다.
와드득, 꼬리 쪽을 뜯어낸 그녀가 신형을 돌렸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꽈득, 콰드득
콰드드득!
주디스가 레이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철 조각을 움켜쥔 주먹 역시 멈추지 않았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붉은색의 오러 속에서, 뜯어진 호랑이의 꼬리가 시뻘겋게 달구어지며 원형 고리의 형상을 띄었다.
누구도 움직일 수 없었다.
누구도 계속해서 지껄일 수 없었다.
정적과 고요만이 가득한 이곳에서, 누구의 제지도 없이 무사히 엘사 콜린스의 앞까지 도착한 주디스가 웃으며 말했다.
“길 안내 선물로 만든 팔찌인데.”
“…….”
“거절은 거절하도록 할게.”